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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5) -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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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5)


70년대에 한국교회를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은 한국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캐나다에서는 숲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일본에서는 공장의 요란한 엔진소리와 출근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잠을 깼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에 잠을 깨었다.” 한국교회는 열정적인 예배와 기도 선교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밤에는 아름다운 십자가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게 된 것도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교회는 힘을 잃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도 정체되어 있고 노령화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거룩성을 잃고 세속화되어 간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회 내에서 도덕적, 정신적 영향력을 잃고 있으며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도 여전히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 열매는 아름답지 못할까요?

기도는 그 양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질, 곧 기도의 방향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옛날만큼 기도의 양이 줄었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의 소리가 잦아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기도의 방향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목표는 부산을 향하여 가야 하는데 평양쪽으로 갔다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느리더라도 정확한 방향을 향하여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방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기도가 적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매일 세 번씩 정해진 시각에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기도가 적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방향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기도 또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터는 주기도가 기도의 알파벳이라 하였습니다. 터툴리안은 주기도는 기도중의 정수이며, 기도를 가르치는 기도라 하였습니다. 주기도는 기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우리 기도의 잘못을 교정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서처럼 주기도문이 수록된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하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기본이 중요합니다. 프로 골퍼나 프로 야구 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들이 그 슬럼프를 탈출하는 가장 빠른 길은 기본기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몇 백 번씩 기본 스윙만 정석대로 합니다. 그러다보면 다시 자기 실력이 회복됩니다. 주기도가 바로 우리 기도의 기본입니다.

주기도문은 지난 번에 연속 강해를 하였습니다. 아마 다음 주면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기도』(좋은씨앗)란 제목으로 책으로 출판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한 구절 한 구절을 다 강해할 수는 없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 정신에 대해서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합니다.

기도의 첫째 계명 : 아버지여!

주기도문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실제 주기도문 원문은 “아버지여”, “우리”, “하늘에 계신”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여! 하고 부르며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6장 5절부터 15절까지에 이르는 기도에 대한 교훈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8절에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4, 15절에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거나 심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라 말씀합니다. 기도는 “아버지여!” 로 시작해서 “아버지여!”로 끝납니다.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 앞에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라는 신뢰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기도의 깊이는 그분이 정말 우리 아버지이심을 체험하는 데서 절정에 이릅니다. 

기도는 어느 때까지 해야 하는가? 기도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 아버지시구나’ 하고 느껴질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감동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며 “하나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우리 기도는 절정에 이릅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할 때는 다름 아닌 이처럼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입니다. 그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4:7)이 우리 속에 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듭니다. 

기도는 이 확신이 들 때까지 해야 합니다. 기도가 막히고 퍽퍽한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로 느껴지지 않고, 이웃집 아저씨나 어떤 이념이나 어떤 벽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전심을 다해서 찬송하거나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의 깊은 데로 들어가 하나님이 타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분, 나와 하나 된 하나님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곳이 기도의 정상입니다.

결국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첫째 계명입니다.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말씀은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도에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어떤 문제 해결이나 축복을 받으려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지성소로 부르기 위한 수단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사귐입니다. 이는 남녀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결혼의 목적은 사귐 자체이지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목표로 하는 만남이라면 그것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물질, 명예, 자녀, 행복은 사귐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들일 뿐입니다. 이런 축복들이 목적이 될 때는 불행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우리 기도가 마치 업무 보고하듯 진행될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밀린 서류들을 내밀며 빨리 결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결재는 쉽게 떨어집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축복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아니라 그 손에 든 동전만 바라보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언짢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주는 물질을 더 사랑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제일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집중할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실 때의 일입니다. 베드로도 이 모습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시자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보았을 때 무서워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마14:30).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횡단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을 때 그들은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느라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마14:24). 예수님이 같은 배 안에 타고 계시더라도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풍랑을 만났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이때는 어떤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기도가 그렇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면 문제의 풍랑에 빠지고 맙니다. 급하고 어려운 문제가 많을수록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도의 첫째 계명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주기도는 무엇보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내 이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 내 축복보다는 하나님의 나라,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 내 힘보다는 하나님의 권세, 내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주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주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법을 깨닫습니다. 주기도의 여섯 개의 간구 중 처음 세 개가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간구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캠벨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도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내가 실직을 하거나 재정적으로 곤란할 때 우리가 먼저 구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내가 모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거나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유익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기도의 둘째 계명 : 우리

기도의 둘째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개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기도의 이런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주기도에는 ‘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라는 단어만 있을 뿐입니다. 한글 주기도에는 모두 여섯 번의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러나 헬라 어 원어로는 ‘우리’라는 단어가 모두 아홉 번 등장합니다. 생략된 곳은 ‘일용할 (우리의) 양식’, ‘죄를 (우리에게서) 사하여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대로 기도하고 주님의 기도대로 살았다면 자기 안에는 나라는 존재 대신 우리라는 존재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만 알고 나만 살아 있다면 그것은 주기도의 정신에서 벗어난 기도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의 가족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주기도는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내 식사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 내에 한 사람이라도 굶주리고 있다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할 때는 그 죄에는 내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까지 포함됩니다. 타인의 죄 때문에 내가 아파하고, 내 죄가 사함 받는 것 때문에 옆에 있는 형제가 기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 기도하면서 우리는 시련 앞에 한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주기도문대로 제대로 기도하면 ‘나’는 사라지고 ‘우리’라는 단어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둘째 계명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바로 기도의 첫째 계명에서 형성된 관계의 힘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또 다른 ‘나’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큰 원을 중심으로 서로 한 몸 된 공동체를 이룹니다. 십자가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떼어 놓으면 십자가 모양이 파괴되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일체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도는 은밀한 골방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골방에서 우리는 형제와 자매를 만나고 온 우주를 만납니다. 주기도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간구들도 실상 우리 현실, 곧 우리 이웃의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 땅에 가득한 불의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와 권세는 하나님께 속했는데도 세상 나라와 어둠의 권세는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 냥 행세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굶주림과 전쟁과 폭력과 분열과 헤어짐과 아픔과 눈물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한 간구는 이 세상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선언하며, 보다 완전한 세계의 도래를 바라보는 믿음의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형성되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해방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도의 안테나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의 기도

주님께서 주기도와 관련하여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용서의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14, 15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바로 앞 5장에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론과 관련된 말씀을 하시고 있는 마태복음 18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그 때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아 그 주인으로부터 원래의 빚 탕감이 무효가 되는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경고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더 가혹하게 요구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주님은 우리 기도에서 용서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용서 못할 사람들이 꼭 생깁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분노가 솟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중요한 세력도 아마 우리가 미워하는 이 원수와 같은 존재들일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중심으로’ 용서하라고 합니다. 그 원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욕하고 악한 말을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을 핍박하고 때리며 감옥에 가두던 자들입니다.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에서 쫓아내며, 심지어 목숨까지도 위협하던 자들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도무지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데. 그래서 용서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안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생 그 미움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먼저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용서가 됩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 원수가 우리에게 행한 것은 오히려 작게 여겨집니다. 둘째는 우리가 어떤 존재였음을 생각하면 용서가 됩니다.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요 악인이었습니다. 단지 우리는 요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천성적으로 우리는 선하지 않습니다. 또 원수 관계라는 것은 단지 입장이나 환경이 달라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그 사람 입장이고, 같은 환경이었다면 내가 그 사람의 원수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는 우리 영혼의 평화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분노와 미움을 품고 산다면 정작 우리가 더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원망과 분노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이것을 품고 있으면 미워하는 그 사람보다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맥밀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노예가 되고 만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안 되고, 우리의 영혼을 분노로 불사르고 맙니다. 린다 클링이라는 시인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내 가슴에 적개심의 불을 지르는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통제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친 그곳에 그를 남겨 두지 않고
내 마음 속의 집으로 그를 데려 온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는 내 생각들을 지배하며 나에게 명령한다.
그는 내 혀를 통치하며 내가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채찍을 가하도록 자극한다.
내 속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증오의 불이 증오의 목표물에게보다 
증오하는 자에게 더 큰 피해를 주었던 것이 그 몇 번이던가! 
오 주여, 당신의 용서의 은혜를 내 불난 가슴에 부어주소서
제가 품은 모든 상처들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용서는 타인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행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남은 용서하면서도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도 사랑하고 구원의 은혜도 인정하지만 자신만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들은 자기 외모나 학벌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합니다. 불우한 환경이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심한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자신의 과거 실수에 대해서, 또 어떤 일로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아픔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후회합니다. 개중에는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놓았다가도 어떤 계기로 그 상처들이 표면으로 다시 올라오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를 미워할 권리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모두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감히 누가 정죄한단 말입니까? 우리 주인 되시고 장차 온 우주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판단이 우리의 판단보다 더 정확하고 더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학하지 마십시오. 자학은 교만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적 태도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한 번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제가 과거에 많은 실수를 하였고, 아픈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6월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달입니다. 용서는 전 사회적으로도 필요합니다. 분단과 전쟁이 일어난지 6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하며 미움을 곱씹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미움과 증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평화나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증오의 불이 증오의 목표물에게보다 증오하는 자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중심으로 형제의 과실을 용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평화와 번영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용서와 사랑과 화해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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