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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 얻은 구원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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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얻은 구원 (엡 2:1~10)
 

“은혜”라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줍니다. 은혜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누구나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띠게 되고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내지, 얼굴을 찡그리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해 본 은혜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것은 어버이의 은혜일 것입니다. 사람은 저 혼자 태어나서 제 힘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어버이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억지로 할 수 없고 이 은혜를 깨닫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어버이의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있는데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00편 3절에 보면 하나님을 일컬어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말씀하기를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시 139:13)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중 그곳 광장에 모인 헬라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시고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든 영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은혜를 올바로 알게 될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감동을 체험하게 됩니다. 뇌성벽력 치던 밤이 지나고 밝은 햇살이 비쳐 오는 평온한 아침을 맞이할 때와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또는 큰 빚을 지고 고민하던 사람이 그 빚을 몽땅 탕감 받았을 때의 홀가분함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사형 선고를 받고 절망 가운데 지내던 사형수가 특사를 받았을 때의 벅찬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구원의 은혜를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구원의 은혜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하게 살아있지만, 그 영이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는 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은 것처럼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이 죽은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몽매 무지하여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지 못하고 하찮은 우상을 신으로 숭배합니다. 

인간들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원인인 죄의 기원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면서 한 가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했습니다. 그 순간, 아담의 영은 죽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므로 그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순종이 죄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영적 죽음과 더불어 육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육신의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떻게 전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 온 것일까요? 아담이 범죄했을 당시에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조상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으므로, 그의 범죄는 그에게서 태어날 모든 사람이  범죄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했습니다. DNA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죄도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유전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들을 보면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우상 숭배로 일관해 왔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3절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 범죄한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하찮은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게 되어야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유대나라의 최고 종교재판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겸손한 태도로 예수님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유대인의 관원이요 바리새인이라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탁월하고, 학문이 뛰어나고, 권세가 높고, 재물이 많더라도, 또 아무리 건강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결국 썩어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질문을 어리석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므로 영적인 세계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죄인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려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을 믿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이르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곧 죽은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원의 은혜는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본문에 보니, 범죄한 인간들의 실상에 대하여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이 세상의 사악한 풍속을 행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종노릇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상태입니까? 인간들이 이처럼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 것은 앞에서 말씀한 대로 죄가 그 원인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하신 대로, 인간은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 받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죄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터득해도 그것으로 죄를 없이하지 못합니다. 위대한 과학 기술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줄 알지만, 돈으로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심지어 철학이나 종교로도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할 수는 있어도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고 비극이 있습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시거나 용서하실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죄란 결국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돌려할 영광을 헛된 우상에게 돌리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지만, 사람에 대한 범죄도 역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를 금하신 하나님께서 인륜에 대한 계명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 받으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십니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는 미워하시되 죄인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날이 서늘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셨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숨으려고 할 뿐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지 못합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하실 실질적인 방안을 갖고 계십니다. 그 한 가지 예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죄 없는 짐승이 죽임을 당한 것은 대속의 원리를 말해 줍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우리의 의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기 위해 할 일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 이르기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말해 주는 예화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루는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제 몫의 재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주었더니, 둘째는 곧바로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낭비를 하는데 오래갈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쯤 지나자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련하게도 이 아들은 들판에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보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돼지가 먹는 쥐염열매를 얻어먹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제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부끄럽지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일어나서 아버지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저 멀리 정든 고향집이 보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이 아들을 알아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용서입니다. 여기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타락한 인간들을 상징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을 때 무조건 용납해 주었습니다. “가지고 간 재산은 다 어떻게 했느냐? 그런 몰골로 무슨 체면으로 돌아왔느냐? 아들로 받아는 주긴 하겠지만 너의 못된 소행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 때문에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곧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대합니다. 


세 번째로, 구원의 은혜는 우리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본문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표현은,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의 죽었던 영이 거듭난 것이나 죄 사함 받는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도 없이 여전히 죄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로부터 구세주를 칭하는 자들이 적지 않게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우상 종교의 창시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외에는 다 우상의 종교입니다. 죄인은 죄인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으므로 구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종교의 창시자들이 하나같이 죽음에게 삼킨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으나 주님의 죽음은 자신의 죄값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가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요 10:8)고 하셨으며, 또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선포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구원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고 구원의 길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다수가 지지할지라도 멸망의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도리를 믿고 따라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장차 성도들도 부활하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상속받고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보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그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받는 데에 우리의 공로가 조금도 소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곧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2장 8절에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물은 거저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진주 목걸이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내가 “여보, 이 목걸이 값이 얼마지요.” 그러면서 값을 지불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는 친척 집 잔치에 초대받아서 진수성찬을 대접받고서 일어나 돌아가면서 음식 값을 지불하려고 한다면 주인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값을 치루고 얻는 것은 선물일 수 없습니다. 

선물은 크든 적든 간에 거저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은혜라, 선물이라 하신 것 역시 구원은 대가 없이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것은 몰라도 구원은 값을 치루지 않고 거저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값을 지불하고 구원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너무나 귀하고 값진 것이기 때문에 선물로, 은혜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가 없으며,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애쓰고 힘쓰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자의 무지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능력으로 갚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만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매일 같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찬송해야지, 은혜를 갚기 위해서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으로 은혜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십시오. 그러나 은혜를 억만분지 일이라도 갚을 목적으로 헌신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찬송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진정한 은혜로 알고 누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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