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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입니다 (갈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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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입니다 (갈 3:1~9)


중국 동쪽 지역에 가면 유명한 대나무가 있다. 모소라는 품종의 대나무인데 가지와 잎으로 만드는 음식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대나무는 4년 동안 전혀 땅 위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 대나무를 키우는 농부들은 땅 위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4년 동안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5년 째가 되면 대나무는 땅 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그 후부터 6주 만에 무려 48 피트 만큼 자란다고 한다. 

이 엄청난 성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4년 동안 땅 밑으로 자라는 뿌리 때문이라고 한다. 그 긴 세월을 땅 밑으로만 자라고 나서 마침내 엄청난 power로 땅 위의 성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러한 성장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골2:6-7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사람들이니 성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당에 간다? 그것은 물론 대단히 귀한 구원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 하나님은 엄청난 가능성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대에 대하여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적으로 보아도 지금은 뿌리를 깊게 내릴 때이다. 전반기 다락방 사역과 훈련 사역을 마치고 지금은 방학으로 들어가는 시기이다. 이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밑으로 자라가야 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성장하며 내년에는 새로운 사역을 통해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 가야 한다. 내면으로 깊은 뿌리를 내리는 기초 작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성장할 수 있다. 

교회 크기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리고 환경적으로 불경기를 보더라도 우리는 지금 뿌리를 내릴 때이다. 힘들수록 본질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나무가 엄청난 높이까지 성장해도 곧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깊은 뿌리 때문이다. 그리고 뿌리들이 서로 얽혀서 연합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로 기도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어렵지만 우리는 함께 뿌리를 내려야 하고 서로 연합해야 한다. 배는 풍랑을 만날 때에 anchor를 더욱 깊이 내린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한 때 복음을 듣고 매우 든든하게 세워 갔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point가 있다.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붙잡고 똑바로 서라고 강조한다. 훈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을 닮아가고, 어떠한 폭풍 앞에서도 믿음을 굳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복음의 본질을 붙잡고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성도들은 언젠가부터 그들의 선행과 노력과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짓 선생들이 그들을 흔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키운 사도 바울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면서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본질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지금은 세 가지를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1)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 죄인들이 온전히 용서를 받는 곳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곳이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을 벌려서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한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십자가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이 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건이 바로 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 가운데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해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이었다. 이것이 은혜의 십자가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용서 받고 깨닫고 구원 받았다. 이 십자가를 보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의 행위를 더 할 수 없다. 무엇을 더하며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가? 만약에 내가 더할 것이 있다면 나는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이런 고백이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찬양과 감사만 드릴 뿐이다. 

우리가 요즈음에 부르는 기도송(놀라운 사랑 찬양하리라 우리를 위해 생명 주셨네…)은 이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같이 십자가 앞으로 나와 감격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것 뿐이다. 우리가 이것을 missing하니까 요동을 치는 것이고 삶이 dry해지는 것이다.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려서 마음의 강퍅함이 녹아내리게 하고 치유를 받게 해야 한다. 다시 한번 더 힘을 받고 믿음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축복이 함께 하기를 소원한다.


(2)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오늘 본문의 2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성령 받은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공로 없는 자가 선물로 받은 것인가? 5절을 보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여러가지의 일을 체험하게 된다.

- 하나님은 우리 안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요16:8을 보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우리는 그 분이 오시기 전까지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분이 오심으로 우리들이 born again하게 되었다. 

- 요3:5-6을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거듭나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이 세례를 주심으로 한 지체로 만들어 주신다. 

- 엡1:13-14을 보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인치심으로 기업에 보증이 되게 하셨다. 이는 우리를 후사로 삼으셨음을 뜻하는 것이며 오직 인치심으로만 가능하다. 주님께서 주실 것을 다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데 저들은 과연 무엇으로 받았다는 것인가? 이것은 그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 요14:16을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 분은 또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주하신 성령이 역사하게 해야 한다. 그 분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적이다.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 마음을 붙잡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다. 증오가 변하여 사랑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요동할 수 밖에 없을 때에 깊은 뿌리를 내리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영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요동치는 것이다. 오직 성령 충만하면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3)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

본문 6-9절을 다시 보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이다. 

6절을 보면 우리의 선행과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가능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5-16장의 내용과 같다. 백 세를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약속했을 때에 그는 그 약속을 믿었다. 그는 그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먼저 출세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 세상의 상식과 관례를 의존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우리의 방식과 체험을 뛰어 넘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이 땅의 현자보다도 더욱 승하다는 믿음을 갖고 움직여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희석될 수도 있지만, 비록 불리할지라도 하나님을 택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이 약속의 시작이다.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인생을 살 때에 우리는 그 분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깊이 내리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을 붙잡고 사는 삶을 뜻한다. 모소 대나무는 참으로 소박하다. 다만 깊이 내린 뿌리 때문에 높게 성장하는 대나무이다. 

물론 교회의 성장을 위한 Know-How와 비결이 있다. 성장을 위한 현대 목회의 방법이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순박한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먼저이다.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 이 세 가지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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