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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이름 없는 소녀의 증언 (왕하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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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소녀의 증언 (왕하 5:1~6)


구소련이 지배하던 시절 정치범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실화가 있다. 콘필드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자 동지를 모욕하고 체제를 부인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로 끌려오게 된다. 전직 의사였던 그는 포로수용소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다.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죽어가던 중환자를 발견한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가서 죽음을 준비할 것을 얘기한다. 그리고 돌아서려고 하는 그 순간에 이 환자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의사를 불러 세우더니 이런 전도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십니까? 죽임이 인생의 종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 영생을 얻기만 하면 우리는 죽음의 공포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 시간 죽으면 주님의 품에 안기는 영광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기꺼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고 합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고서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는데,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자기에게 밀려오면서 그 환자가 남기고 간 그 말이 생각났다. 

‘영생을 얻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데 영생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죽음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영생을 내가 얻어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을 하고 그때부터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된다. 환자를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시에는 금기시되어있기 때문에 은밀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로부터 암환자가 들어왔다는데 내일 당장 수술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수용소 병원이라고 해봐야 열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암환자를 수술하라고 하니까 도무지 용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라니까 하긴 해야 되겠고 하자니 모든 것이 부족해서 실수할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환자를 찾아가서 이런 얘기를 하게 된다. 
“당신의 암을 수술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용소 병원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그렇지 않습니까? 또 제 실력도 변변치 않기 때문에 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다고 하는 확신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칼을 든 이상에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의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당신도 수술 받을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술을 잘 끝내고 자기 처소로 돌아와서 잠을 잘 자고 있는데, 누가 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 사람을 살해해버린다. 그러나 다행이도 수술 받은 암환자는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러가게 된다. 먼 훗날 이 사람이 수용소에서 있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감동적인 글을 쓰게 된다. 『수용소 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든지, 정말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소설을 써내게 되고 그 업적이 인정을 받아서 마침내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기자회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내가 실력이 있었거나, 남보다 똑똑하거나 잘나서, 내가 좋은 글을 써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어가는 이 세상이 살아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데 있습니다. 왜 이 세상이 점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전도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가? 소련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글을 남겼던 ‘알렉산드르 이사비치 솔제니친 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역량을 주고, 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역량을 주고, 또 역량을 받은 사람이 나아가서 수천, 수만명의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확대사건이 그 수용소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요즘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 ‘15 25 효과 fifteen twenty five effect’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이 영향을 받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다섯 사람을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각각 다섯 명씩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25명이 영향을 받고, 또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다섯 명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백이십오 명이 영향을 받고, 그리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영향이 확대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팔 때 많은 사람들에게 대량으로 물건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물건을 하나 팔더라도 한 사람에게 제대로 확실하게 팔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다섯 사람이, 다섯 사람이 스물다섯 사람으로, 스물다섯 사람이 백이십오 명으로 계속해서 그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포로로 끌려온 한 계집종을 통해서 군대장관의 가족이 변화되고 또 그 나라의 왕이 변화되고 그 나라가 변화되고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서 북이스라엘에까지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계집종 하나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적어도 나아만처럼 크고 존귀한 자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 영웅적인 인간이 뭔 일을 하더라도 영웅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 포로로 끌려온 그 계집종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해봐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무시해버릴 수 있는, 별 볼일 없다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계집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 포로로 끌려온 계집종이 이런 큰 역사를 이룬다고 하면 우리라고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계집종이 한 이상의 큰 역사를 이루며 주 앞에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뭐하겠나?’ 그렇게 스스로 자학하고 자기 비하에 빠져서 하던 일을 그만두거나 하더라도 대충 하는 일이 없기 바란다. 하나님이 이곳에 나를 보낸 데에는 분명한 뜻이 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지만, 종의 신분이지만 남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하찮은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자 하시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의 가정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직장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 믿는다. 

나 같은 사람이 뭐하겠냐고 지레 위축이 되어서 도망갈 생각부터 하지 말기 바란다. “하나님, 비록 포로로 끌려온 계집종처럼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 상대가 군대장관이든, 왕이든,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주님께서 변화시키고자 하시면 하실 수 있으니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도구로 기꺼이 자신을 바칠 때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놀라운 변화를 이뤄갈 줄 믿는다. 

영혼을 사랑하라

어떻게 해서 이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한 계집종이 어떻게 해서 군대장관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또 그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면 계집종의 마음에 영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전도를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의 기술이나 전도의 내용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는냐,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못하는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지만 그 이유는 하나이다.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왜 어머니가 위대하고 아버지가 위대한 것인가? 자식을 위해서 온갖 사랑을 쏟아 붓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가? 지위가 높은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자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좋은 어머니, 좋은 아버지를 결정한다고 하면 좋은 전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처음서부터 이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을까? 이 사람을 어떻게 좋은 말로 교회로 인도할까? 그런 것부터 고민하지 마시고 ‘하나님, 이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주셨듯이 그 사랑의 마음을 내게 주셔서 그 사랑으로 다가가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만약 여러분들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상대방은 그 사랑에 감동해서 먼저 마음을 열고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줄 믿는다.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계집종의 입장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 군대장관 나아만은 원수 중의 원수이다. 자기의 일생을 망쳐버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부모와 고향을 떠나서 억지로 강제 이별을 시키고 한창 공부하고 한창 뛰어놀아야할 그 나이에 남의 집 종살이나 하게끔 만들어놓은 장본인이다. 원수 중의 원수가 무엇인지 아는가? 원수 중의 원수를 가리켜서 철천지원수라고 말한다. 하늘 천, 땅 지. 하늘과 땅을 뚫을 만큼의 원수라는 뜻이다. 가정적으로도 원수요, 나라적으로도 원수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스라엘을 급습해서 그 지방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로 끌고 가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이 아이에게 유관순 누나와 같은 애국심이 있었다면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사람을 죽이고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이 녀석아! 죽을병에 걸렸지?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봐라’ 이런 식으로 보복하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여기에 나오는 이름 없는 소녀가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과연 내가 이 아이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살 길이 있어도 아마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도 방법이 있어도 아마 입을 다물고 그대로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원한이나 개인적인 불평을 털어놓기 이전에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에게 살 길을 가르쳐준다. 여기에 이 아이의 위대한 점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전도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평소에 나를 얕잡아보고 내게 잘 못한 사람이라면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사람에게 찾아가나 잘못을 빌 때까지는 내가 절대 가르쳐주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을 홀대하고 그 사람을 우리가 거부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전도 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영혼을 사랑하고 항상 선행에 힘쓴다는 것이다. 

여러분, 위대한 전도자처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수많은 영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얼마만큼 선대하면서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베푸는 일에 힘쓰게 된다면 여러분들의 행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여러분들을 보고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될 줄 믿는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전도자가 갖추고 있어야할 첫 번째 요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접촉점을 찾아라

두 번째, 이 아이는 전도의 접촉점을 잘 발견하고 있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대방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조건을 잘 헤아린다. 어떤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어떤 문제로 기도하고 있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잘 헤아려서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주님께로 인도 하는 것이다. 

여러분, 나아만이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가? 본문에도 보면 ‘크고 존귀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크고 존귀하다는 말은 히브리 어로 ‘까돌’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얼굴을 높이 드는’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위대한 영웅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나아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자기의 고민이다. 문둥병이라고 하는 천형을 앓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고 겉으로는 부귀영화의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 접촉점을 잘 발견할 줄 알아야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하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선입견을 갖는다는 것이다. ‘저 정도의 사람이 내 말을 듣겠어? 저렇게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못 배운 내가 무엇을 얘기하겠어? 그저 귓등으로 듣고 말겠지.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이 내 말을 듣기나 하겠나? 저렇게 지체 높은 양반이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고 내 말에 관심을 갖긴 하겠는가?’ 만약에 이 아이가 그런 선입견을 갖고 ‘지체가 높으니까, 권세가 있으니까, 크고 존귀하니까 내 말을 안 들을 거야’라고 했다면 나아만이 고침을 받을 수가 있는가? 

여러분, 상대가 누구냐에 대해서 자꾸 선입견을 갖고 하게 되면 평생 가도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이 겉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속으로는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이 아이에게 있어서 탁월한 점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 누구도 구원해줄 수 없는 그 절망적인 모습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전도를 잘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기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전도를 잘하지 못하게 된다. ‘그 사람의 입장은 그 사람의 입장이고 나만 잘 믿으면 되지 않는가? 그 사람이 믿게 되면 어떻게 되든 낫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가 전도를 할 수 없게 된다. 

또 하나는 전도했을 때 ‘과연 저 사람이 잘되면 좋지만 잘못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확신을 가지고 전하긴 했는데 저 사람의 문제가 풀리기보다는 자꾸 꼬이고 문제가 복잡해져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내가 공수표만 남발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기꺼이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이 아이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이 아이가 ‘우리 선지자에게 가서 기도 받으면 낫습니다. 응답 받습니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다. 그런데 막상 가서 기도까지 받았는데 낫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고 그래서 더욱 근심걱정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겠는가? 그 아이의 생명이 온전하게 붙어있게 되었겠는가? 상전을 속인 죄로 아마 단칼에 목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접촉점을 잘 발견하고 그가 무슨 문제로 고민하며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잘 헤아려서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하신 구원자,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할 때 그 영혼이 주님 앞에 나아가 문제를 해결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앞에 살아나게 되는 줄 믿는다. 


확신을 가지고 전하라

여러분, 오늘 이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다. 3절 말씀이다.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보통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대상이 누구인가? 군대의 장관이다. 그 나라의 2인자이다. 실세 중의 실세이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큰일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가 군대 장관에게 선지자에게 찾아가면 그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할 때 의심하면서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말씀을 통해서 모든 약속을 해주셨는데 왜 주저하는가? 왜 망설이는가? 왜 하던 얘기도 제대로 못하는가? 왜 사실도 가짜같이 말하는가? 분명히 약속해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는 것이다. 그 다음은 누가 책임지는가? 하나님께서 책임지는 것이다. 군대장관을 움직인 힘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계집종이 얘기를 잘 했기 때문에 군대장관이 감동해서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인가? 계집종은 다만 복음을 소개할 뿐이다. 그 다음은 복음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복음을 일단 전하고 보라. 복음을 일단 전하고 보면 여러분이 그 사람을 주님께로 이끄는 게 아니라 그 복음이 그 사람을 이끌어서 주님께로 데려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어떤 능력이냐? 로마서 16장 1절 말씀을 보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복음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따라서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주님께로만 가면 당신은 나을 수 있습니다. 고침 받습니다. 응답받습니다. 해결됩니다. 분명하게 여러분의 신앙을 고백하며 증거할 때 복음이 그 사람을 이끌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이는 복음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담대하게 군대장관에게 소개한다. 다른 말로는 초청한다고 할 수도 있다. 여러분, 확신만 하면 뭐하는가? 알고만 있으면 뭐하는가? 여러분이 초청하면 그때부터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초청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고, 계집종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아만 장군의 하나님도 되시고, 여러분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움직여주실 줄 믿고, 이루어주실 줄 믿고, 구원시켜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서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드리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란다.


(기 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포로로 끌려온 한 계집 아이의 입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시고 또 증거된 말씀을 통하여 아람 군대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이 고침을 받는 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저희들이 읽었고 배웠습니다. 우리들에게 계집아이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증거할 수 있는 담력과 용기를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고 또 주의 말씀을 증거할 때마다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셔서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나올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능력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연약할 뿐이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셔서 우리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를 통해서 우리 가정이 변화되고 우리 사회가 변화되고 이 나라가 변화되는 역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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