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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일하는 사람들 (요삼 1:5~8) -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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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사람들 (요삼 1:5~8)

 
며칠 전 이스라엘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분이 특별한 선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시험산 기도원” 건립 프로젝트입니다. 이스라엘 여리고 뒷산이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산입니다. 지금 이 산은 팔레스틴 사람들의 땅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인 팔레스틴 사람들의 땅에 기도원을 건립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길을 여셔서 그 길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답니다. 

이 선교사님이 시험산에 올라 기도를 했답니다. 기도 중에 이곳에 기도원을 지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소원이 들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 땅 주인인 팔레스틴 기업가를 만나게 됐답니다. 그 사업가가 대화 도중에 자기가 땅을 내놓을 테니 기도원을 지으라고 제안을 하더랍니다. 물론 이 사업가는 기도원을 지으면 자기가 운영하는 호텔과 케이블카 사업이 잘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제 기도원 건축을 후원할 사람을 찾는 중이랍니다. 

그러면서 그 기도원을 지으면 기도원 정면에 손 셋을 밀랍으로 만들어 전시하겠답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기도하던 자기의 손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제공한 팔레스틴 사업가의 복 받을 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원 지을 수 있도록 후원한 사람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손입니다. 이 기도원은 세 사람이 힘을 합해서 하나님께 봉헌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랍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일은 이렇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결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일꾼이라고 해도 자기 혼자서 독불 장군처럼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자기의 장점을 살려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협력하면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잘 깨달았습니다. 롬 16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우리가 아는 이름은 고작 디모데와 브리스가와 아굴라 정도입니다. 그 이외에 뵈뵈, 에베네도, 마리아, 안드로니고, 유니아,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고, 아벨레,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루포, 아순그리도, 불레곤, 허메, 바드로바, 허마, 빌롤로고, 율리아, 네레오, 오름바 등등 정말 생소한 많은 이름들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자기와 함께 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자기 사역을 도왔다고 말합니다. 이들과 함께 주의 사역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기가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동역자”(同役者) 곧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수네르고스”(suner-gos)를 번역한 것입니다. “함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협동하여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물론 자기가 주도적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저들의 도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역자라는 말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동역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소중한 사람들 그들을 동역자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역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의 사역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때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동역자로서 섬겨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함께 일하는 사람” 곧 동역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편지를 쓴 장로 요한이 사랑하는 사람 가이오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사용한 말입니다. 

요한 3서는 장로 요한이 가이오에게 쓴 사적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요한은 가이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순회 전도자를 가이오가 있는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가이오가 저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었습니다. 순회 전도자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요한에게 전했습니다. 요한이 감사한 마음으로 가이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가이오가 어떻게 사역자들을 도왔는지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이런 사역자들을 잘 도와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가이오는 “함께 일하는 사람” 곧 동역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 곧 동역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신앙태도를 갖추어야 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실해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가 함께 일하는 자로서 순회 전도자들을 신실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사전에서는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믿음직하다”, “믿고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대표적으로 신실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을 지켜본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발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모든 소유를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셉의 신실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모함을 받아 투옥됐습니다. 요셉을 지켜본 간수장이 요셉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옥중 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요셉의 신실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바로 왕 앞에 서게 됐습니다. 요셉을 지켜본 바로 왕이 요셉을 전국 총리로 기용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다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요셉의 신실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요셉을 보면 믿을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요셉을 보면 믿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하듯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보지 않더라도 대충할 수 없었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가림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속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더라도 죄를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켜보는 사람들마다 믿음이 갔습니다. 누구라도 요셉에게는 믿고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신실하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 노력해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심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실함이 우러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자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철저한 불교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됐답니다. 시어머니는 불교 신도회 회장까지 할 정도로 불심이 남달랐던 분입니다. 다행히 혼자 교회 다니는 것은 묵인해 주었습니다. 몇 해가 안 돼서 시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가 됐답니다. 

자녀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목사님 모시고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루거라”고 말하더랍니다. 자녀들이 물었답니다. “어머니 평생 믿던 불교는 어떡하고요?” 이분 말씀이 “내가 며느리를 쭉 지켜봤는데 저 아이가 저렇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가는 것을 보니 저 아이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이신 것을 내가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이제 저 아이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련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실함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그들을 마음 든든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 줍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믿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마음 든든해서 더욱 힘차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가이오의 교회에 파송되었던 순회 전도자들이 자기 교회로 돌아와서 보고 했다는 것입니다. 가이오의 교회에 파송 받아 사역을 하는 도중에 가이오의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80이 넘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인지 할머니는 집 밖에 나오셔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곧잘 말을 걸곤 했습니다.한 번은 지나가는 목사님을 붙들고 넉두리 삼아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우리 영감 빨리 하늘나라 가도록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우리 영감 때문에 못 살겠어요 중풍에 걸려 누워있는지 벌써 여러 해 됐어요 정말 영감 뒷바라지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그렇지만 그 할머니 목소리는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가 집 밖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뒷바라지 하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영감님이 세상 떠나시던 날부터 식사를 못하신답니다.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베지말만 마시고 산답니다. 

사실 말로는 영감님이 빨리 세상 떠나면 병수발 뒷바라지 그만하고 훨훨 날아다닐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영감님에 대한 애뜻한 사랑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당신의 삶을 든든하게 버티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던 영감님이 세상 떠나니 이제 당신의 삶을 지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우리 삶을 지탱시켜줍니다. 사랑이 식으면 우리 삶도 흔들립니다. 그러다 사랑이 떠나면 우리 삶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 곧 진정한 동역자가 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동역자를 지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동역자를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요일 4: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되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서로 지탱해 주고 서로 세워줄 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더욱 하나가 되어 힘 있게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야구사에 그 이름이 남겨진 선수 가운데 루 게릭이란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14년 동안 2,130 게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속 출전하는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한 번은 이 선수가 소아마비에 걸린 소년이 재활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 소년을 사랑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간곡하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년이 자기를 위해 홈런 하나를 쳐 주면 재활치료를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루 게릭은 약속을 하고는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두 개의 홈런을 쳐서 소년에게 힘찬 응원을 보냈습니다. 

2년 뒤 루 게릭은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죽게 됐습니다. 그 해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특별 은퇴식이 열렸습니다. 6만 관중이 기립하여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 때 2년 전 만났던 소년이 목발을 내던지고 걸어와 그의 품에 안겼습니다. 루 게릭은 소년을 품에 안은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별사를 남긴 뒤 야구장을 떠났습니다. 

루 게릭의 사랑이 한 소년을 용기를 주었고, 그 소년의 사랑이 죽음의 병으로 투병하게 된 루 게릭에게 큰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은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장로 요한은 앞으로도 가이오가 계속 이런 순회 전도자들을 잘 영접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후원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이오가 순회 전도자를 물질적으로 뒷바라지 하고 기도로 뒷바라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그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 10:14-15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 말씀 속에서 두 종류의 선교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는 선교사”입니다. 직접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내는 선교사”입니다. 직접 가지는 않지만 복음 전할 사람을 파송하고 저를 뒷바라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TV에 히말라야 등반에 관한 다큐멘타리 방송을 보았습니다. 세계 최고봉을 등정하는 내용을 준비부터 정상 정복 그리고 하산해서 귀국하는 전 과정을 프로그램에 담았습니다. 

제가 새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상 등정은 대장 한 삶이 했지만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수십 명에 달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기업에서 후원했습니다. 모든 경비와 각종 장비를 후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8명의 대원이 출발했습니다. 그 장비와 짐이 대단했습니다. 현지에 도착해서 또 그 짐을 운반하기 위해 십여 명의 세르파가 고용됐습니다. 그러니까 수십 명에 등반 길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정상 공격은 한 사람이 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지에 파송되는 선교사는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를 파송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없어서는 결코 그 선교사가 현지에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목회도 그렇습니다. 앞 장 서서 목회하는 사람은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목회자를 뒷바라지 하는 사람들이 있고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없어서는 결코 그 목회자가 제대로 목회를 해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에게 직접 돈을 주시지 않습니다. 구약을 보면 엘리야가 놀라운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재정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때론 까마귀를 보내시고 때론 사르밧 과부 같은 사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을 보내셔서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신약을 보면 바울도 놀라운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재정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동역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역자들도 겸손하게 후원을 받고 기도 지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역자들을 후원할 때 동역자로 그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재정적으로 그리고 기도로 후원하고 뒷바라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내가 그 사역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함께 일하는 자리로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목회가 됐든, 평신도 사역이 됐든, 해외 선교가 됐든 동역자로 참여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신실한 태도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최선을 다해서 후원해야 합니다. 재정적으로 기도로 후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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