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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불어 (사 19: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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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 19:23~25)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여자 성악가 마리아 앤더슨은 평소에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관심있게 듣던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래 한 곡 부를 때도 작곡가가 있어야 하고 피아노 제조업자가 있어야 하며 반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속의 나는 작은 협력자일 뿐입니다.'

더불어 번성함이 자연의 원리입니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미나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는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내 보았습니다. 이가지 저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고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들인줄 알았는데, 원숭이들이 떠난 숲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고 덮히면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짐으로 숲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공존하며 관계가 아름답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사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우람한 적송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레드우드 공원과 같은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물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엔 늘 그늘이 지고 습기의 증발이 억제되어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의 나무들도 한 그루씩 자꾸 베어지면, 앞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보습 기능을 잃고 메마르게 되어 나머지 나무들도 전부 말라 죽고 맙니다.

독불 장군은 재앙을 당하나 더불어 살 때 위기를 이겨 내기도 합니다.

어떤 '평화스런 바다 마을'에 크고 사나운 물고기가 나타나 좀 컸다 싶은 물고기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먹었습니다. 포식성이 강한 이 물고기는 심지어 '그물을 감지하고 피하는 지혜'를 갗춘 물고기까지 잡아먹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주 작은 물고기들만 남았습니다. 어느날 어부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이 '크고 포악한 독재자'만 잡혔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너무 작아 그물 사이로 다 빠져나간 것입니다. 큰 물고기는 그물 사이에서 몸부림치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가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농부가 새를 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았습니다. 어느 날 여러 마리의 참새들이 그물에 걸려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걸린 참새 가운데 한 마리가 외쳤습니다. '이대로 잡힐 순 없다. 살아야 한다. 자아, 우리 모두 동시에 힘껏 날아 올라 이 그물을 저 큰 나무에 걸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 우린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마자 참새떼들이 동시에 힘껏 솟구쳐 날아 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무겁게 쳐져 있던 그물이 움직였습니다.참새들은 그물을 큰 나무에 걸고서 모두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먼 길을 떠나는 두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치게 되자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산길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히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그네는 '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하며 도망치듯 가는 것이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은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걸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더 심해지고 정신마저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으로 점점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길 옆에는 혼자서 먼저 간 친구의 얼어 죽은 시체가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간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혼자 간 나그네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전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더불어 살 때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썰매를 끌 수 있는 건강한 말을 뽑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1등을 한 말은 2,0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2등을 한 말은 1,8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이 두 말의 주인들은 만약 두 말이 힘을 합하면 얼마만큼의 무게를 끌 수 있을 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두 말이 함께 썰매를 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5,5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 수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어 함께 하기를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거리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참으로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서 일하기를 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며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도 더불어 함께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애굽과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일본과 북한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까지 구원하시고 더불어 복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까지 구원하시고 더불어 복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왕래하고 교류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 19: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더불어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끊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불어 나라들 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기에 세계주의적, 평화주의적 비전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날에 유다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끊어진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유다를 교량으로 하여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가로놓인 전쟁의 통로가 그날에 복음의 통로, 평화의 대로로 바뀔 것입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시키시고 이 둘을 화목하게 하심같이, 신자들은 오늘의 한국상황에서 분열되고 갈라진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합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관계의 우선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그럴 때에 적대적인 관계들도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리라 합니다. 

(사 19:23)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인간의 역사에서는 이방 나라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사람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니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어떤 흑인 한 사람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흑인은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다음 성경과 찬송을 소중히 들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 줄 리가 없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고 흑인인 것에 뼈저린 아픔을 느끼면서 그 교회의 바깥뜰 계단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흰 옷을 입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반가워서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님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형제여! 나도 이 교회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네.”

그러나 더불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 대학부에서도 외국인들이 함께 예배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이 비전을 보았습니다.

[계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오늘 우리 시대에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더불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더불어 스스럼없이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더불어 복이 되리라 합니다. 

(사 19: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저주 받아 망할 이 세상의 나라들이 더불어 세상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복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역사는 만남과 나눔과 복 받는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기를 해롭게 한 사람들에게 저주의 폭탄을 투하하는 보복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를 반역한 원수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온 세상을 대표하는 두 초강대국,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이스라엘이 셋 중의 하나로서 참가하게 될 것인데, 이전에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림을 받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중재해 주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영적으로 연합된 세 나라에 대한 복을 선언하면서 이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배타적으로 허락되었던 권리와 영예로운 이름이 애굽과 앗수르에게까지 확대 적용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내 백성(아미) 애굽이여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렘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니콜라스 2세가 구소련을 다스릴 때였습니다. 소련 경찰은 독일 히틀러 학정을 피하여 소련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을 잡아 독일로 넘기면서 짭짤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소련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과 도망 온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경찰에 들켰습니다. 잡히면 독일로 끌려가 죽을 판입니다.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힘껏 달아났습니다. 경찰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한참을 달린 후 섰습니다. 경찰이 영주권 제시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여유 있게 내밀었습니다. 경찰은 영주권을 갖고도 왜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의사가 약을 먹고 달리라고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경찰은 재차 도망쳤다고 다그치자 유대인은 “경찰관님도 나와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은 줄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덕분에 영주권 없는 유대인은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순간적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주십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내 손으로 지은(미아세 야다)앗수르여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수고로운 작품이란 말입니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쓰임 받았던 앗수르가(10:5)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탈바꿈 할 것을 말씀 합니다.

불란서 루불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 중의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수작이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가난한 조각가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피와 땀을 짜내는 노력의 결과로 걸작품을 완성시켰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에 조각품이 얼어 상할까봐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덮어놓음으로써 조각품은 보존이 되었지만 그는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얼어 죽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업(나할라티)이스라엘이여 합니다

(신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시 47: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이 놀라운 예언은 그날(바욤하후) 곧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질 신약 시대에 성취되어질 일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의 사람들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영적 기업가들은 물고기 뱃속에서 동전을 끄집어내고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고 공중에 메추라기를 날려 보냅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꿀 수 있으며 안될 때 되게 하는 능력의 주인공이 영적 기업가들의 특징입니다. 

6.25를 맞으며 더불어 교류하게 하시며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며 더불어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아름답고 구체적으로 임하기를 기도하며 준비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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