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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받아야 할 예수믿는 사람들 (롬 1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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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받아야 할 예수믿는 사람들 (롬 10:1~15)


지난주에 교역자들과 교제하면서 우연히 일본에 다녀 온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있었습니다.
2년 전에 다녀왔던 일본에 대한 기억은 정말로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일본다웠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면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보았던 기억과 신칸센 열차 안에서 느꼈던 기억입니다.

도쿄 디즈니랜드는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겨냥해서 만든 위락시설인데 그 시설의 방대함과 치밀함도 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디즈니랜드에 가족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보도블록의 한 부분에 우리로 말하면 돗자리를 펴놓고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선을 맞추어 약속이나 한 듯이 책을 보고 있었던 광경이었습니다.

닛쿄에서 도쿄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신칸센 열차를 이용했던 시간은 아침이었는데 도쿄로 출근을 하는 시민들이 객실 안에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시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본에 나가기 전에 이미 일본을 다녀오신 분들이 일본인들의 독서 습관과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일 많이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저 역시 일본에서 느낀 기억으로는 이 기억에 제일 인상에 깊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질서를 잘 지키는 나라하면 일본을 말합니다.
우리는 책을 참 많이 읽는 잠재적 능력이 무궁무진한 나라를 말 할 때 일본을 말합니다.
우리는 소매치기가 없는 나라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아쉽지만 인정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감정이 역사적으로 참 좋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좀처럼 우리들의 사고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처럼 일본을 칭찬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러한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일본이라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장점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아침 설교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왜 들추고 있습니까?
그것은 일본하면 떠오르는 제일 먼저의 인상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든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 ○ 라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떠오르는 첫 번째의 생각이 그 사람의 삶을 대변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많은 말이 필요 없이 정말로 단 한 줄로 그 사람의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선한 평가는 거의 대부분 그 사람의 묘비명에 기록이 될 정도로 아주 인상이 깊은 평가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영원한 모델로 남아 있는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찌의 묘에는 이렇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 여기 잠들다.”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이빗 리빙스턴의 묘비명도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다 살고 응답하다 죽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은 그의 후세의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진한 자욱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차원에서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이라는 명제를 해석하면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까?
아마도 그것은 너무 쉬운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총체적인 표현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11장을 잠시 살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6절을 보면 안디옥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원어는 ‘Cristiano"’ 라는 단어를 썼는데 해석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안디옥교회 공동체에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부른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이 단어는 당시에 안디옥교회 공동체 밖에 있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단어였습니다.
이런 말을 쓰면 인 되는 것을 알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낮추어 부르는 언어로 조센징이라고 불렀던 것과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사람들을 쪽발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런 류의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안디옥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바로 이 이름을 너무나 자랑스러운 이름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별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유산으로 넘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단어는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단어가 아닐 수 없으며, 영광스러운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이 쓸 수 있는 영광의 단어라는 말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면 오늘 설교의 제목은 틀렸습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예수 믿는 사람들’

저는 오늘 로마서 36번째의 강해를 이 말도 인 되는 제목을 갖고 선포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제목이지만 말이 되는 은혜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귀한 주일에 예배하러 나오신 우리 모든 교우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을 잠시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9장 1-3을 통해서 바울이 얼마나 자신의 조국이었던 이스라엘을 사랑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무슨 말이라고 설명했습니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자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정작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래서 예수라는 메시아를 거부했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족속이기에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경험한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만약에 나의 혈육과 친척과 민족이 예수에게로 돌아올 수만이 있다면 나는 지옥에 가도 괜찮다는 간절함을 갖고 있었음을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들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구원의 은혜를 받기를 소망했는데 왜 유대인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했는가를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예수라는 존재 없이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단순히 확신했기 때문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런 그릇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통하여 재삼 곱씹으려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그릇된 그 확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바울이 본문을 통하여 제시해 주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2-3절은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기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잘못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위한 것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지적은 자기의 삶의 고백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열심을 낸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빌미로 자기만족을 위하여서였다는 간증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 3:5-6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 자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 시에 돌을 던지는 자들의 옷을 관리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발본색원을 위하여 직접 대제사장에게 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은 부여받을 수 있는 공문을 요청할 정도의 열심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자신의 그릇된 열심의 고백을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다시 음미합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그릇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어떤 참회의 고백이었습니까?
내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한 열심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다메섹에 거주하던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정리할 수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유대적인 엘리트로서 앞날에 대한 야망과 계획을 이룰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유대교적인 입지를 견고히 하겠다는 자신의 의를 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자기만족의 열매라고 생각하고 달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릇된 자기만족을 삶으로 깨닫고 우리들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길은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의 고집 중의 하나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고집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포기하지 않으려는 선입관을 바울이 지적합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아마도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이 바로 그 율법을 지키는 의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그들만의 영적인 고집들이 바로 행위로 인해 얻어지는 의였습니다.

이러한 율법 사수의 전제를 갖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오늘 결정타를 날리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율법의 마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율법을 통하여 의를 얻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딴지걸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본문 6-7절에 주의 종이 해석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기 위하여 그러면 죽은 예수를 무저갱에서 올려서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하늘에 있는 예수를 내려서 믿어야 하는가? 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딴지걸이에 대하여 바울이 오늘 너무나도 감격적이고 명쾌한 통찰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줍니다.

본문 8절을 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바울이 시비를 걸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까?
우리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하늘에 있는 예수님 때문도 아니요, 지옥에 내려가 있는 예수님 때문도 아니라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바울은 이미 이사야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을 예로 들었습니다.

롬 10:11-13절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이를 토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9-10, 13절을 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 성경의 줄거리요 요약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상의 성경을 통하여서 우리는 로마서 36번째의 강해의 귀한 영적인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 교회 안에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다 구원을 받은 것이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듯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열심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렇게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자들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부인하고 싶으나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자기의 의의 도구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3절에서 바울이 지적한 유대인들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3절이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인생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나의 삶의 주인공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종교생활로 즐길 수 있는 자기만족의 대상으로 여기며 또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가지의 주님의 기사 중에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우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준 기사를 하나 뽑으라면 살로메의 기사를 으뜸으로 뽑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로메가 누구입니까?
살로메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입니다.

마태복음 20장으로 초청합니다.
살로메는 아들 둘을 데리고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 그대로 청탁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살로메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 20:22-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은 살로메와 두 아들에게 주님의 나라는 자리에 있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이 얻게 될 것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이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그리고 살로메가 이 일을 겪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청을 거절하자 그들이 주님을 떠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잘 받아들였고 그들은 전인생을 주님을 위해 걸지 않았습니까?
살로메는 어떤 사역자가 되었습니까?

마가복음 지은이 마가는 16:1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살로메는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는 처절한 예수님의 고독과 고통과 슬픔을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한번이라도 더 향유를 바르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어두운 새벽에 오르노라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로마 병정이 지키는 그의 무덤을 향했던 여인들 속에 그녀가 끼어있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지기만족의 삶으로 예수님을 삼았던 여인이 도리어 주님을 위하여 전인생을 걸었던 구원의 반열에 선 행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랑의 사도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고 야고보는 주님의 제자 중에 첫 번째로 순교를 당하는 순교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은 나의 삶의 만족의 도구로 삼는 한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한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할지라도 주님만을 높이는 삶을 살게 되면 나는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무하던 교회의 한 중직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중직과 아주 사이가 안 좋은 관계였습니다.
안 좋은 관계가 아니라 정말로 원수 같은 관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애를 두고 있는 딸을 이층에서 자신과 라이벌 관계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계단 밑으로 떠 밀쳐 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허울 좋은 중직이라는 자리에는 있지만 전혀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인격장애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구원을 받아야 하는 명목적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새로 등록하여 나오는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새신자 심방을 하면서 가정을 파악하고 기도의 제목을 나누었습니다.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여집사님에게 이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집사님, 호주 되시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러자 그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괜찮아요. 우리 남편은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요.

명심하십시다.
구원을 어느 선한 행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어떤 행위를 통하여 주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시거나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결코 내가 어떤 자의적인 선행을 통해서 당신에게 오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주님을 찾기를 원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다시 강조하거니와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롬 10:9-13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우들에게 부임하여 지난 4년 동안 들은 이야기 중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목사님, 부흥회를 참석하면 강사 목사들이 그냥 말씀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매년 부흥회의 레퍼토리 중에 하나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로 믿고 잘 섬기라는 것을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다가 그 말만 나오면 아주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그래서 연합성회 같은 데는 가고 싶지가 않아요라는 말을 정말로 많은 성도들에게 들었습니다.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담임목사에게 잘 하라는 부흥강사의 말을 들으면 짜증이 나시지요?
나는 더 짜증이 납니다.
제일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어느 부흥사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나는 목사님이 좋아 나는 목사님이 좋아 나는 목사님이 좋아 참 좋아 할렐루야
나는 장로님이 좋아 나는 장로님이 좋아 나는 장로님이 좋아 참 좋아 할렐루야  

저도 이 노래를 부르게 하면 아주 짜증이 납니다.

왠지 아십니까?
좋아하지도 않는 목사님 좋다고 찬송하라고 하니 성도는 짜증이 나고 그것 듣고 있는 목사는 더 짜증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교경협의회 부흥회에 참석한 우리 교우들의 보고를 들으니 이번에 한 수 더 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담임목사님에게 선물을 줄려면 현금으로 주라고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결심합니다.
내가 다시 부흥회를 가면 성을 바꾸리라.

좋습니다.
부흥회를 다시 안 가겠다고 결심해도 좋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들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니까 교회가 이 모양이라고 비난해도 목사인 저 역시 받겠습니다.
도매 끔으로 여러분의 담임목사를 함께 공격해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여러분이 담임목사를 섬긴다고 현찰로 가지고 오지 않아도 절대로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목사님이 좋아’라고 노래 부르지 않아도 울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수준 이하의 목회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수준 이하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상식 이하의 성도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자기만족을 누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예수님을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는 타당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구원을 바라는 구절이 그래서 그런지 여러분의 담임목사에게는 더 큰 글자로 보입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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