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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눅 5:18~26, 히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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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눅 5:18~26, 히 11:6)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한 중풍병자를 데려오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헌신을 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보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 속에 헌신도, 수고도,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은 행함이 아니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행함으로 받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진실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죽은 믿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쁜 세상 속에 살면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착각이 생겨났습니다. 좋은 말씀 들으면 좋은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은혜스러운 말씀 들으면 스스로 은혜스러운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들으면 하나님 사람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듣는 것으로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듣는다'는 뜻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듣고도 행치 않는다면 그것은 듣지 않은 것과 똑 같습니다. 오히려 안들은 것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다는 '그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불치의 병이 걸려서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네 사람(막2:3)이 협동하여 예수님께 데려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협력하면서 들것에 환자를 싣고 달려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포기할 듯 한데 이들은 다시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지붕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기로 한 것입니다. 놀라운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자 하거나, 믿음을 가진 사람도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그 믿음을 가로막는 벽들을 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로막는 장애, 문제, 유혹, 욕심 앞에서 속절없이 주저앉습니다. 사람들의 체면 때문에 용기를 못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잘 못된 신앙인의 모습에 상처를 받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의 벽을 뚫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들의 벽입니다. 용기를 내서 이 사람들의 벽을 헤치고 나갈 수 있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경의 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면 핍박이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이나 경제여건이 신앙생활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벽도 주님께 가고자 하는 믿음만 있으면 여리고 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죄의 벽도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결단하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죄악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높은 담을 쌓게 만들어서 주님을 만날 수 없게 합니다. 결단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 반드시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병자와 함께 이 다섯 사람들이 믿음으로 달려 왔지만 사람들이 가로막고, 벽이 가로막아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의 간절함과 그를 돕고자 하는 섬김의 사람들의 열심을 그 어떤 벽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은 것입니다. 
     
갑자기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 머리 위에서 흙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금이 가고, 작은 구멍이 뚫리고, 점점 구멍이 넓혀지면서 그 위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집 지붕은 큰 나무로 보를 놓고, 그 위에 잔잔한 나무를 엊은 후에 흙으로 이겨 바르는 형태의 지붕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붕을 뚫기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점점 넓어진 천장 구멍으로부터 들것이 달려 내려옵니다. 위에서는 네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줄을 달아 내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 앞에 이 중풍병자가 놓여졌습니다.
     
사실은 예수님도 놀라셨을 것입니다. 지붕이 뚫리는 일이 흔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면 이런 행동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기적은 그 병자 자신의 믿음보다도 그를 데려온 네 사람의 믿음이 더 귀하고 큰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것도 그 사람들이었고, 병자를 데리고 온 것도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열심도 그 사람들의 것이었고, 지붕을 뚫고 협력했던 정성도 그 네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으로 하나되어 형제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의 이름으로 섬김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섬김은 무언가 남아돌아서 베푸는 행위가 아닙니다. 시간이 남아서, 또는 조금 넉넉하니까, 아니면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섬김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님 때문에. ♬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내 작은 정성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는 것이 섬김입니다. 하나님께 더 하지 못해서 죄송해 하면서 하는 것이 믿음의 섬김입니다. 이것밖에 못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면서 하는 것이 믿음의 섬김입니다. 그런 섬김이 되지 않으면 안 해도 될 일을 인심쓰면서 하는 것 같이 하게 됩니다. 일을 해놓고 교만하거나, 여차하면 그만두거나, 시간 나면 해보다 말다 하는 것은 믿음의 섬김을 알지 못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인심쓰는 것처럼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대접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지붕을 뚫는 네 사람의 섬김에서 우리는 참된 헌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천장을 뚫고 내려온 그 병자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지금 중풍병을 고치려고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예수님 앞으로 왔는데, 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다니? 당시에 불치의 병이 걸린 사람들은 하나님께 정죄 받은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고통, 죄의 대가를 받고 있다는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이를 풀어주시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실제로 이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 있다가 불치의 병이 걸린 것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가책을 느끼면서 혹시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외면하시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죄사함은 은혜를 내려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경우였던지 이 사람의 죄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은혜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그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저 빈 말 하는 것처럼 여겼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믿음의 통로로 그 능력이 나갑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에 중풍병자가 자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도 놀라고 옆에 사람들도 놀라고, 네 명이 섬김의 사람들도 놀랐습니다. 믿음으로 왔지만 막상 기적은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고 놀라워했습니다(26). 
     
우리가 믿음생활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가장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 믿음대로 행치 못한 연약함에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있을 때, 죄사함의 깊은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 은혜의 경험이 없다면 나머지 믿음이나 행위들은 모두 속이 빈 것입니다. 바로 그런 빈 믿음에서 하나님께 선심쓰는 듯한 헌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죄사함의 은혜의 경험으로부터 진실된 예배도, 섬김도, 헌신도, 수고도,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활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고, 짊어 져야할 짐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막히고, 때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이러한 생활속에도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 중풍병자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가 바로 이 두 가지 은혜입니다. 첫째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둘째는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입니다. 첫째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 받은 것이요, 둘째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Key Word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11:6)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늘 진실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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