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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성공과 실패인가?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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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성공과 실패인가? (창 12:10~20)


요즘 서점에 나가면 성공 비법 서들이 많이 나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비롯해서 “성공재테크 10계명”, “성공하는 직장인의 대화법” 같은 성공이라는 타이틀이 들어간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반면에 실패에 관한 책들도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패의 힘”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작가 <찰스 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실패는 위장된 성공이며, 성공은 실패의 뒤를 좇아온다. 성공하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이 실패하라.”말합니다. 

실패를 알게 될 때 성공하게 되기에 실패원인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 그 정의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저렇게 하면 실패한다 하는데 과연 그 성공과 실패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본문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인정을 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성공한 사람들로 인정받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성공한 것은 단순히 성공만을 이룬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공한 배경 속에는 무수한 실패가 있었습니다.  

모세도 엄청난 실패를 했던 사람이고 베드로도 엄청난 실패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끝나지 않고 성공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국 그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말씀으로 본문이 시작이 됩니다. 
농경 시대에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기근은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은 그 기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대 용어로 이 문제를 해석한다면 요즈음 말로 바꾼다면 대지진이 발생했다든지, 아니면 주가가 폭락했다는 말로 사용 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주식 투자를 하신 분들은 무척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수많은 형태의 기근소식이 들립니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환율이 불안정합니다. 중국의 지진소식과 버마의 재난 소식을 비롯한 각국의 재난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결과 주식이 떨어지고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어 심각하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이 시대에 주식 투자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으로 날랐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근, 이것은 여러 형태와 모양을 달리하지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제적 기근, 어떤 사람에게는 신체적 질병의 기근,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 기근이 찾아옵니다. 여러분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우리 성도에게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철저하게 실패를 하고 망신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처절한 실패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그가 실패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은 그가 왜 실패했느냐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 성공의 요인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실패가 있으면 뒤집으면 성공입니다. 성공이 있으면 뒤집으면 실패가 보입니다. 

그러기에 과연 성경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는 무엇인가를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모습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약속의 자리를 너무 쉽게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 오늘 우리가 본문 10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라함이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그랬습니다. 왜 애굽으로 내려갔을까요? 거기는 기근이 없어 보였습니다. 거기는 풍요가 넘치는 곳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그 사실 자체를 지나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굽으로 갈 수도 있지요. 또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내려간 사연과 그 배경은 좀 다릅니다. 

본문의 문맥을 찾기 위해 창세기 12장 앞의 부분을 보세요. 
창세기12장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무엇을 따라왔다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나안 땅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2장 7절에 보세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 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할렐루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나안까지 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아브라함은 그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금 어려움이 생겼다고, 조금 기근이 생겼다고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을 도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기근들이 닥칩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문제도 닥칩니다.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교통사고가 생기기도 하고 자녀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닥치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토록 충성하던 회사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를 찾아보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도피처를 찾고 도망을 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면 인생의 길은 만사형통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지 기독교의 실상은 아닌 것을 아셔야 합니다. 

찬송가에는 “만사형통 하리라”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진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에 살 때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얻어먹는다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살아갈 때에 환란은 있을 수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왜 환란을 주시는지 그건 사람마다 다르고 형편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망하게 함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고 결국은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현재만 보면 안 됩니다. 

현재만 보고 판단하면 엄청난 실패를 합니다. 그러기에 그 고난이 왜 왔는지, 그 환난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난이 찾아오고 기근이 찾아오면 긴장을 풀지 말고 계속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설교할 내용인데 저 유명한 느헤미야가 고국을 떠나 페르시아라는 나라에서 출세해서 장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소식을 들으니 예루살렘 성이 다 불타고 성벽은 다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그가 금식하며 기도를 합니다. 

거의 넉 달 동안 기도하고 마음을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는데 어느 날, 드디어 왕이 물어봅니다. 그때 그는 그동안 기도했던 소원을 아뢰어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돌아가서 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라. 성을 쌓아주고 오너라.”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일을 시작하자마자 만사형통 했을까요? 엄청난 시련이 덕칩니다. 아시나요? 읽어보셨어야 알지? 

일을 시작하자마자 어려움이 생겨요. 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 기도에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착수하자마자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장애물 때문에 느헤미야는 더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과업을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의 장에 불어 닥친 폭풍우, 경제적인 시련, 그 밖의 어떤 시련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도피하십니까? 쉽게 자리를 옮기십니까? 

혹시 너무나 쉽게 “그래 여기 있을 곳이 못돼,” 하며 직장을 옮기시는 분은 아닙니까? 너무 쉽게 이사를 결심하지는 않으십니까? 

좀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고 너무나 쉽게 결별하지는 않으십니까? 
너무나 쉽게 주님이 주신 직분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너무 간단하게 교회를 옮기지 않으십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 뜻일까요? 
“하나님! 과연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기도해봐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주의 뜻을 찾고 묻기보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보다는 단순히 “어렵다” “불편하다” “힘들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쉽게 축복의 자리를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mistake 실수입니다. 
아브라함이 배웠어야만 했었던 교훈은 무엇입니까? 
약속의 자리, 축복의 땅, 은혜의 자리를 너무 쉽게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리를 굳게 붙잡고 사수하는 것이 성공이고 너무 쉽게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실패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공은 남다른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리, 축복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성공입니다. 
또 현실을 피하는 것은 더 큰 성공을 위한 것인데 너무 쉽게 옮기면 그보다 더 큰 실패가 닥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한 번 실패하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생기면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일단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고와 판단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방향이 막 흔들립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에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고소공포증이란 병을 아시나요? 제가 아는 형제 하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산을 올라가는데 올라가면 벌벌 떱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폐쇄 공포증도 마찬가집니다. 좁은 공간에 갇혀본 사람은 작은 공간에 혼자 있는 것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훌륭한 대통령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통령이 루즈벨트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경제 대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유명한 취임사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입니다. 이 두려움을 빼고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 연설을 들은 미국 백성들은 용기를 갖고 일어섰습니다.  

성경에 두려워한다는 단어가 400번이나 기록되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창 15:1을 보세요.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런데 오는 본문의 아브라함도 바로 그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뭔가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애굽으로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두려움이 닥쳤습니다. 
평생 처음 가보는 곳입니다. 당시 애굽의 문화와 문명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사람들도 대단해 보였고 모든 것이 거대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 원인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부인이 절새미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보 누가 당신에게 나하고의 관계를 묻거든 내 누이라고 그럽시다. 안 그러면 내가 죽을지 모르오.” 

여성성도 여러분! 이런 남편 안 만난 것을 감사하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하기에 사래처럼 미모가 받쳐 주어야 들을 수 있긴 합니다만……. 농담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것도 남편 하나 믿고 그 머나먼 길 따라 왔는데……. 물론, 아브라함은 변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게 아브라함과 그 아내의 관계가 누이관계였던 것은 맞습니다. 이복누이 관계입니다. 

창세기20장 12절에 보시면 “저는 나의 이복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내입니다. 과거는 누이였을지라도 현재는 어쨌든 아내요. 그러나 자기가 두렵다 사람들이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와이프에게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누이라고 말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 아브라함의 그 꼴을 보세요. 

나는 절대 이런 사람 아니라 장담할 수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 베드로를 보세요. 왜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지요? 그가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친 시간이 몇 시간도 안 되어 나는 그를 모른다고 3번 부인한 이유가 뭡니까?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다 자기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보호한다고 칼을 휘둘렀는데 말고의 귀가 잘렸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른 그 귀를 붙여주어 무마되었으나 어떻든 살인미수 죄입니다. 그러니 붙들리면 같이 죽게 될 판입니다. 그러니 갑자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결국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부인하고 마는 결과가 찾아 왔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지었거나 실수를 했으면 자수하면 광명을 찾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찰스 스윈돌 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어느 주일날 설교를 하다가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운전을 하면서 집에 가다가 딴 생각을 하다가 빨간불에 그냥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순간 감이 이상해서 “아! 내가 빨간불 지나갔구나!” 그러고 옆에 보니까 교인들 몇 사람이 자기 차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교통법규 지키라고 설교 해놓고 자기는 안 지켰으니 순간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교인들에게 들킨 거라 말이죠. 

너무 부끄러워 얼른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잠시 후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좀 전에 어디어디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목사님 만나고 싶습니다.” 

이거 큰 일 났다. 교인들이 아마 따지자고 나를 만나자는 것 아닌가 걱정이 생겼습니다. 목사님이 순간 고민을 하다가 그러자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이튿날 점심시간에 약속된 자리로 갔습니다. 그 약속 장소에 목사님이 나타나는데 목에다 무얼 걸고 나왔어요. 무얼 써 갖고 나왔어요. 영어로 I am guilty. “나는 죄인이다”
교인들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을 하더래요. 그러자 목사님이 갑자기 뒤를 딱 돌아섰어요. 뒤에도 뭔가 써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치라.”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잠 29:25를 보세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실수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두려워지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두려워지면 성공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자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3. 제단 쌓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평상시 잘하다가도 막상 어려움을 당하면 흔들립니다. 그러나 경건의 훈련이 되면 어떤 기근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늘 제단 쌓기를 소홀히 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이 닥쳤을 때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내를 빼앗겼을 때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엄청난 시련이 닥쳤는데 기도한 일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흔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직 덜 훈련되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초기부터 믿음의 조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근이 닥치니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니 제단을 쌓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진자 신앙은 기근이 닥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뱀잡이 수리(Secretary bird)가 있습니다. 이 새는 독수리와 비슷한 새입니다.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와 낚아챕니다. 그래서 평상시는 민첩하게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으면 날아가지 않고 계속 뛰어갑니다.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계속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왜그럴까 학자들이 연구해 보았는데 두려움이 갑자기 임하면 날개를 못 움직이지 것입니다. 그냥 날면 되는데 날지를 못합니다. 왜요? 두려움에 싸여 날개를 젓는 것을 생각지 못한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뱀잡이 수리 같은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믿음을 적용할 상황이 오면 당황하거나 휘청거립니다. 믿음의 날개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만나면 믿음으로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지금 믿음의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접어둔 채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정말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하지 못 하는 나. 예배를 드려야 할때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나, 그 새의 모습은 꼭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방불합니까? 다 같이 따라하세요. “그 꼴이 내 꼴입니다.” 

제단을 잃어버린 아브라함, 그러니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단을 쌓아야 할 때 단을 쌓지 못하면 그 자체가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단을 쌓아야 할 때 단을 쌓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다시 제단을 쌓게 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 여기 창세기13:1~4을 보세요.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호되게 망신당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나온 후 벧엘에 와서 거기서 비로소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제단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기도가 필요한 시각이고 예배가 필요한 시각인데 완전히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은 살아났습니다. 어떻게요? 아브라함이 작전을 잘 써서인가요? 사래가 뭔가를 해서인가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기12 장17절 한 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이 그 못난 아브라함 가족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왕을 그냥 두시질 않습니다. 갑자기 바로의 궁중에 큰 재앙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로가 그 원인을 알고 보니 그 데려온 여인이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왕이 그녀 손도 못 댑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주요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그 땅에 재앙을 내리시며 아브라함과 사래를 보호하십니까? 
사래가 불쌍해서요? 아브라함이 불쌍해서요?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1) 첫째 이유는 <사래> 때문입니다. 

재앙이 누구 때문에 임합니까? “사래의 연고로” 

아브라함이 형편없는 믿음으로 실패했지만 하나님이 보시니까 그 부인 사래가 안 됐습니다. 결국 사래를 보시고 ‘사래의 연고로’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고 그녀와 그 가정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보호된 것은 사래 때문입니다.  

남성성도 여러분 잘 들으세요. 
여러분이 잘나서 여러분 가정이 잘나가는 것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원인이 기도하는 아내의 덕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여기 남자들은 자기들이 잘 해서 집안이 무사한 것 같이 착각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서 있는 최 목사도 이따금씩 참 제 부족을 느낄 때 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왜 쓰시나”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제 아내 “복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웃지 마세요. 

저뿐만 아니라 여기 그런 사람 많아요. 따라서 하십시오. “당신의 연고입니다.” 
우리 가정이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은 같이 오신 남자들은 옆에 있는 여자들 보고 “당신의 연고입니다” 한번 말해 보세요. 다같이 “당신의 연고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 당신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 있는지 몰라요.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2) 둘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뭐지요? 
창세기12:1~2절을 보세요.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이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맺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약속을 지키실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아내 사래가 남의 부인이 되면 이 약속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언약을 지키십니다. 

오늘 우리를 왜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나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28:20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십니다. 이 약속을 붙들고 사시고 제단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시련을 받으셨습니까? 배고픈 시련이 있었습니까?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제발 도피처를 찾고 현실을 모면하려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찾으세요. 그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시험하시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기근이 닥치고 환난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 축복의 땅을 너무 쉽게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라며 영적 제단을 쌓기를 잊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성공은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 하지만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성공은 자리를 지키는 것이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제단을 쌓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실패는 너무 쉽게 약속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실패는 사람을 너무 두려워하는 것이고 제단을 잃어버리는 것이라 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실패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약속이 있는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시기 바라며 예배의 제단, 기도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게 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실패의 길에서 성공의 길로 돌이키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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