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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이는 교회, 보내는 교회 (행 1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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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교회, 보내는 교회 (행 14:19~26)


지난번에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고 단동까지 갔는데 16시간의 긴 항해였습니다. 저녁에 배를 타고 다음 날 아침에 중국 부두에 내리는데 참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큰배가 뻘 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다시 저녁이면 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갯벌에 빠진 배가 다시 항해 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입니다. 갯벌에 박혀있는 배를 손상 없이 끌어내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온 몸에 진흙을 묻히며 배를 꺼내 보려고 애를 써봐야 소용이 없고 밀물이 쏟아져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뭐, 교회도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갯벌에 좌초되어 있는 것처럼 지금 한국 교회는 세상 앞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사실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을 통하여 이 민족이 일제 암흑시대를 이겨내고 순수한 복음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을 축적하였습니다. 또 민족의 대 수난사인 6·25때 민족의 선두에 서서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으며 이 민족과 영적인 호흡을 같이 하며 민족에 소망을 주었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가 놀라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이 엄청난 부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지금은 안팎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소명을 지속하는 길 역시 성령의 능력에 붙들림으로 은혜의 밀물, 기도의 밀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아주 분명합니다. 먼저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한국 교회는 여기에 온통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부흥을 가져왔고, 그 부흥의 상징이기라도 한 듯 교회들은 앞다투어 본당을 넓히고, 교육관을 짓고, 형편이 되는 대로 땅을 사는 이 외형에 관심을 갖고 하나 같이 성장위주의 사역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는 여기에만 만족한 채 교회의 또 다른 날개인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소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경향이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삼아 큰 은혜를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곳에서만 머물러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모으시지만 다시 세상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여러분이 사는 가정일수도 있고, 여러분의 일터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이 나라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나가서 사는 삶, 나가있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이 진짜 신앙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선포하는 게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인데 이 빛이, 교회에서 만 비취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빛 취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자꾸 자신이 빛이 되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소금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꾸만 자기 인생을 드러내게 해서 교회 안에서만 신앙 생활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 책상에 '크리스찬 투데이'라는 잡지 창간호가 배달이 되어 왔습니다. 거기 표지에 보니까 제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는데 '먼데이 크리스쳔, 주일의 선물, 월요일'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우리 성도들이 주일에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물이 월요일이라는 선물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장, 바로 이 월요일이 그 사역을 펼쳐나가는 축복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편집장인 김 목사님은 글을 하나 썼는데 " 주님이 보내신 세상에서 우리는" 이라는 것인데 여러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유진 피터슨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유진은 이 시대에 최고의 영성 신학자 중에 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려하는 것은 요즘처럼 이 영성이라는 단어가 오용되고 있는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뭐가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태도,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가 우리의 영성이 자라고 열매맺는 곳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영성이 어디에서 자라야 되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입니다. 여러분과 살고 있는 일상에서, 여러분과 저가 살고 이 사회 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성을 영적인 주일에만 이용되는 이라는 것이 바로 이 주일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편집장인 김 목사님은 리처드 마우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성도의 삶은 그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한 것에 속한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은 정말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삶이 세상과 다른 신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비는 일상 생활 속에 나타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우리 속에 담겨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의 신비를 보고 저들이 믿는 예수를 나도 믿어보자!!는 영적 갈증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만 잠시 '영적인 모드'로 전환하는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주일만 되면 잠깐 영적으로 전환했다가 주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 영적인 모드를 꺼버리고 일주일 동안 살다가 주일이 되면 다시 영적인 모드를 켜는 것이지요. 그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일에만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월, 화, 수, 목, 금, 토에도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서 강탈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에 여러분을 부러 모으시고 능력과 권세를 입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물러 있게 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나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왜 여기 있어도 좋을 인생을 왜 내어 보내시는 걸까? 왜 변화산에 있는 제자들을 재촉하게 하셔서 산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시는 걸까? 그 변화산은 성도라면 한번쯤 경험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신비한 현장이 아닙니까? 오죽 했으면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 이곳에서 살자고 까지 했겠습니까? 그런 현장을 주님은 ?아 내듯이 산 아래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진정한 복음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도행전 가운데 우리가 함께 본 14장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겪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개척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먼저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교회에 지도자를 세상의 일터에 보내는 사역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코가 석자인데도 불구하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불러들이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이때가 안디옥 교회에 불신자들이 몰려오는 부흥을 경험하는 시기였습니다.

행전11:21절에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흔히 자리가 모자라니 본당을 넓히고, 교육관을 짓고, 친교실을 넓히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그것도 지도자를 세워 파송을 했습니다. 파송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본문 7절에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는 말씀처럼 그렇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본문에 보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그 말씀을 받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부류입니다. 행13: 48절에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본문14: 4절에도 "사도를 좇는 자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전파될 때 아멘으로 쉽게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행13: 50에 보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5절에 보세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을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여기 보면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충동질하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것처럼 그렇게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개도 그렇게 잔인하게 처리하지는 않을 겁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정신을 잃고 기절을 하자 그들은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버렸습니다. 여러분,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좌절에 빠져 아예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킨 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허탈감이 일어났겠습니까?

여기 11-13절을 보면 이 이 앉은뱅이 환자를 고친 일로 그들은 신으로 추앙을 받습니다. 이 정도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눈한번 지긋이 감고 그냥 받아들여도 ?찮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15절에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너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 보이는 우리를 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자신들에게 주목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겸손하게 낮아지고 복음만이 이방사람들의 가슴속에 심어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의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하다 얼마나 많은 핍박과 아픔을 당해야했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받들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얼마든지 고생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핍박당한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두가 예수 믿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족을 잃었습니다. 직업을 잃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핍박받아 나중에는 산 속에서 유리하고 사막에서 방황하다가 굶어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형장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그 자리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했습니다. 알면서 다 따라갔습니다. 가장 어려웠을 때가 '로마 황제가 신이다. 예수를 배반하고 로마 황제를 믿어라. 그렇게 하겠다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유혹을 받을 때였습니다.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 속에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갈 때 보냄을 받은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절에서 사명은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해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1위는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녀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 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라이프 스토리를 알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그녀는 사생아입니다. 할머니에게 맡겨져 학대 속에 자랍니다.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 때 사생아를 낳습니다. 마약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인생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조롱합니다. “당신 사생아지? 마약도 했다며? 사생아도 낳았다지?”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소. 그게 바로 오프라 윈프리요! 그러나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하십니다!” 통쾌할 정도로 멋진 대답입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오프라 윈프리의 네 가지 인생철학이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네 번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가 여러분을 통하여 보여지고 확장되기 위해 우리를 세상에 사명자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가정과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직장과 학업의 현장인 그 학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보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대사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이 땅에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락 그룹 U2라는 그룹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시면 제가 설명을 할테니까 한번 들어보시죠. 이 그룹이 얼마나 유명하냐하면 이 그룹이 낸 음반이 팔렸는데 몇 장이 팔렸냐면 1억 2천만 장이 팔렸답니다. 1억 2천 만장... 돈으로 계산하면 우리는 다 놀래거든요. 돈으로 계산해드리죠. 그 CD하나가 1불만해도 얼마냐면 1억 2천만불! 한국 돈으로 바꾸면 또 놀래죠. 거기에다 천을 곱하면 천억이죠. 1불에 팔아도 얼마냐구요 천 2백억을 번단 말이죠. 천 이백억! 근데 이게 1불하지 않죠. CD 얼마 하죠? 만 오천원내지 2만원하죠. 그래서 미국도 대게 20불이예요. 그럼 20불하면 얼마냐하면요 일불에 팔아도 천 2백억인데 20불에 팔면 얼마냐 2조 4천억입니다. 와~ 제가 자주 그러지만 안 놀라는 여러분 참 부럽네요. 여러분 음반하나 팔아가지구요 2조 4천억을 벌었단 겁니다.

근데 이 그룹의 리드 싱어가 있는데 그 리드싱어의 이름이 보노라는 예명을 가지고 있답니다. 원래 이름은 폴 데이빗 휴슨이란 사람이랍니다. 근데 이 사람이 작년에 시카고에서 콘서트를 열고 그때 있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제 막 콘서트가 끝나니까 관객들이 일어나서 막 앙콜을 외칩니다. 그때 리드싱어인 보노가 모든 것을 멈추고 그의 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세상을 구원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갑자기 공연을 하다가 앙콜 부르는데 여러분은 세상을 구원할 준비가 되었냐니까 그러니까 관객들이 듣고는 무슨 얘긴지 또 막 소리를 지르고 환호성을 지르는 거예요.

다시 조용하게 하고 난 다음에 “지금 여러분의 휴대폰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이 화면에 뜨는 번호로 문자를 보내 주십시오.” 번호하나가 쫙 뜨는데 그 번호가 뭐냐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보내는 이 문자는 하나됨. 이 땅에 극심한 가난을 몰아내는 캠페인으로 문자가 보내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땅의 가난을 몰아내는 일에 함께 동참하게 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다면 이것은 지금 우리 세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깜깜해진 그 밤에, 불 다 꺼진 그 공간에 휴대폰 불이 쫙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문자를 보낸 사람이 곧장 전화국과 연결 되서 이름이 하나 둘씩 스크린에 뜨는 거예요. 얼마나 멋진 장관이었겠습니까?

이 보노는 어떤 사람이냐하면 좋은 크리스찬인데 자긴 어릴 때부터 락 스타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뭘 하기를 원하냐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세상으로 향하여 가서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가는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임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살아갑니다. 그의 꿈은 이 땅에 모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가수, 리드싱어, 그리고 콘서트를 열 때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전파할까,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음반을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그래서 음반을 제작하는 것은 제작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위하여 제 인생을 바치고 삽니다.”

여러분 사명이 뭐예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뭐예요? 이 땅에 나가서 우리가 해야 되는 게 뭐냐면 나를 통해서 내 자녀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거예요. 나를 통하여 직장 동료와 상사가 하나님의 나라가 저런 모습일까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나를 통하여 나의 모든 삶의 발걸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상상하게 되는거예요. 그래서 보노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습니다. 저는 열정 없이 부르는 노래를 가장 싫어합니다. 저는 성의 없이 작곡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생명이 없는 공연은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자기는 열심히 사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심을 다해 열정을 다해 생명을 바쳐서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싶어서. 그래서 생명이 없는 공연은 자기가 가장 싫어하고 정말 이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니까 성의 없이 부르는 노래 성의 없이 작곡 그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도 청년들이 7/5일부터 캄보디아로, 그리고 7월 말에 지방의 3군데 교회로 사역을 떠납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 들어가서 우리 속에 담겨있는 생수의 강줄기를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합니다. 요즘은 길떠나 그 자체가 고생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가서 활동하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보여 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위해 또 교회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도 모이는 교회뿐만 아니라 보내는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의 ‘일상’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들이 주일에만 잠시 ‘영적 모드’로 전환하는, 이른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강탈당하지 않길 바라시면서,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이 소명 앞에 붙들려 사는 여러분과 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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