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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좋은 만남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한다 (요 3:16~17) -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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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은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한다 (요 3:16~17)

 
옛날 어느 농가에서 명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인절미를 만드는데 젊은 색시가 인절미를 만들다 말고 고물을 묻혀 사랑하는 남편 입에다 쏙 넣어주고 쏙 넣어 줍니다.
저만큼의 거리에서 시아버님이 바라보고 있는데 목구멍으로 군침이 흘러 들어갑니다.  
체면 때문에 "그것 나 하나 먹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먼 산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습니다.
때마침 시어머님이 들어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드렸냐?"
"아뇨.  다 만들어서 드릴려구요."
그래서 인절미를 한 사발 담고 김치 국물을 곁들여서 아버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몇 개 잡수시더니 아들 쪽을 향하여 냅다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색시 있냐?  나도 색시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인사하십시다.
"제 옆에 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옆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이렇게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1992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인기상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던 노래 가운데 노사연씨가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우리의 만남이 바램이 있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가사였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특별히 새로 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교회에 귀빈초청 축제가 있으니 이번 한번만 꼭 같이 가자는 간절한 권유에 의해서 "그래.  이번 한번만 간다.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다짐하시고 오신 분들이 혹시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와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여러분을 너무나 보고 싶어했고,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보다도, 저희 교회 성도님들보다도 더욱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했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이 여러분의 인생 중에 최고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아주 행복한 만남이 될 것입니다.  인생에서 잊혀지지 못할 만남이 될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올 때는 만 가지 생각을 가지고 왔지만 예배당 문을 나설 때는 행복과 만족과 기쁨을 가지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풍성한 삶이 펼쳐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향한 예수님의 바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거기에다 프리미엄으로 더 풍성한 삶을 얻는 것,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병이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실려왔는데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관이 이 환자를 두고 무심코 이런 말을 하고는 지나갔습니다.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죽음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사가 군의관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희망이 있어요.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의미 없이 던진 군의관의 이 한마디 말에 희망을 걸고 그는 기를 쓰고 새벽까지 안 죽겠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죽음을 저항한 것입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붙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드디어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넘쳐흐르기 시작합니다.  "새벽이 되었다.  이제 나는 살았다!"  그 군의관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죽어가던 그 사병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한마디 희망의 메시지를 붙들고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그 마지막 희망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붙들고 살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한하고 허무한 것인데 말입니다.

한 과학자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젊은이들에게 한 가지 재미있는 설명을 했습니다.  열 개의 동전에 1부터 10까지 표시한 후 주머니 속에 넣고 흔들어 섞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서 동전을 하나씩 꺼냅니다.  수학적인 확률로 계산해 볼 때 처음에 1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입니다.  다시 집어넣고 그 다음에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역시 1/10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1번 동전을 꺼내고 두 번째는 2번 동전을 꺼낼 확률은 1/100입니다.  이런 식으로 열 번을 꺼낼 때에 1번 동전부터 10번 동전까지 차례대로 꺼낼 확률은 10에 10승, 즉 1/100억입니다.  100억번을 시도하면 한번 나타날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확률입니다.

여러분은 그 불가능한 확률에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우주에는 동전 열 개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그 과학자는 분명 이 우주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창조도 운행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10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납니다.  낮 120시간 동안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입니다.  반면에 밤 120시간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 24시간이라는 적절한 간격에 따라서 낮과 밤이 흘러갑니다.

그런가 하면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천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은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그러니까 성경은 우주의 만물이 어쩌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이 우주 저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당신 곁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풍성하신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입으로만 그 맛을 음미하고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각할 수록 신비한 이야기입니다.  생각할 수록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누가 누구를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높고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나를 사랑하셨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하셨다는 이 사실을 제외해 놓고 세상에서 아무나, 아무 곳에나 쓰는 평범한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그분의 풍성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분이 그토록 우리를 사랑했더란 말입니까?  여러분이 고상한 학력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 것입니까?  여러분의 삶이 거룩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 것입니까?  정말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남달랐기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 것이었습니까?

일찍이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 세상 사람들 죄악을 보며 사람마다 머리 위에 불을 내려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조리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존재가 나요 여러분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배반자였습니다.  반역자였습니다.  사랑스럽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소중하다 말씀하시고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여기에 바로 그 풍성함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풍성함의 차원은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사' 라는 말이 헬라어 원문에는 '아가페쎈'입니다.  헬라어에서는 현재능동직설법이라고 합니다.  못난 과거에도 사랑했습니다.  별로 쓸모 없는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기대할 것 없는 내일도 사랑할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할만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자를 골라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무가치한 자를 사랑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을 먹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아픈 것은 배가 고플 때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어서 괴롭고 아픈 것입니다.  배신한 사랑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제일 먼저 압니다.  이것 때문에 평안하고 행복해 합니다.  이것이 깨질 때 온갖 문제가 생깁니다.  젖을 빠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빠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이 태어나 보십시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낍니다.  투정하고 말썽을 피웁니다.  사랑이 갈라지는 아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풍성한 삶이 깨어지는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먹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데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당신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대관령 산봉우리에 풀을 뜯는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금은 보석이 아니었습니다.  아파트가 아니었습니다.  주식이나 증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주만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서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전을 다 펼쳐놓고 찾아본들 어떤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아름다운 단어를 찾아내서 그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이 말은 먼저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처럼"이라는 말은 본문 14절과 15절의 말씀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사건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광야 여행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핏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불뱀에 물려서 모든 백성이 죽게 생겼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우리가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죽어 가는 백성들의 사정을 가슴에 끌어안고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백성을 이대로 죽어가게 하겠습니까?  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백성을 살려 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광야 가운데 장대를 매달아라.  그리고 놋뱀을 거기에 매달아라.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본즉 살게 될 것이다."

백성들은 하나님에 약속의 말씀을 믿고 놋뱀을 바라보았습니다.  장대 높이 달려있는 그 뱀을 쳐다본즉 그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별의별 약을 다 써도 낫지 않았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별 수가 있겠느냐면서 불신앙으로 거부했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다 죽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저주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가 바로 당신을 위한 죽음이란 걸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었고 누구든지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놋뱀을 쳐다보듯 주님만을 신뢰하면 그 풍성한 사랑이 나의 몫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값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받은 용서의 값이 얼마나 될까요?  내 생명의 값이 예수님하고 맞바꾼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 용서하시는 사랑은 독생자를 내어 주고 얻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너무나 풍성하십니다.  그분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떤 잘못도, 아무리 무서운 죄도 다 용서받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허물과 죄는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으로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이미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깨끗해 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정한 풍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죄를 도말했다고 했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이처럼'이라는 말이 주는 풍성함은 본문 16절 안에서 우리가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의 사랑은 너무 높아서 바라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사랑의 높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너무 깊어서 들여다 볼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의 그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자기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배신자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끝까지 찾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팔레스타인에 많은 양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사나운 이리떼가 나타나 모든 양들을 물고 찢고 죽였습니다.  들판은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나머지 양들은 혼비백산 산으로 들로 개울로 골짜기로 다 도망을 갔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주인은 도망친 양떼를 찾아 나섭니다.  놀란 양들은 가랑잎 소리에도 기겁을 하면서 도망을 갑니다.  주인도 못 알아봅니다.  자기 모습하고 조금만 다른 무엇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을 갑니다.  가시덤불에 찔려서 음메~음메~ 소리를 지릅니다.  허겁지겁 도망 가다가 더 이상 달려갈 수 없을 때까지 도망을 가서 들판에 벌렁 나자빠져서 두려움에 네 다리를 부들 부들 떨고 있습니다.  도망가다가 저 죽을 줄 모르고 언덕에서 굴러 떨어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음메~ 소리지르며 죽어 가는 양들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안고 아버지는 양을 찾아보았지만 한 마리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못해 아들이 나섭니다.  "아버지, 제게 맡겨주십시오."  아들은 죽은 양 한 마리의 가죽을 뒤집어썼습니다.  음메~ 음메~ 양의 소리를 내며 들로 산으로 양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양처럼 벌벌 기어서 양을 부릅니다.
 
손바닥은 물집이 생겨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허리는 끊어지는 고통으로 신음해야 했습니다.  무릎은 벗겨져 피가 땅바닥에 줄줄 흘러내립니다.  양처럼 양의 소리를 내고, 양처럼 언덕을 기어다니며 양을 찾아냅니다.  한 마리의 양을 안심시켜서 데려다 놓고, 또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안심시켜서 데려다 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양을 다 찾았을 때 이 아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기진맥진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그런 몰인정한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구요?
그런 바보 같은 아들이 어디에 있느냐구요?
양 몇 마리를 찾아내자고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느냐구요?
그런데 여러분, 그보다 더 엄청난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아니었습니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사탄에게 찢겨진 내 영혼, 당신의 영혼을 찾아내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날카로운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외아들을 죽이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이처럼 풍성한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를 내어 주시고 무가치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누가 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처방전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오직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아 천국 백성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처방전을 일컬어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 조계종에 속한 대구의 어느 비구니에게 1시간을 줄테니 대학생들에게 당신이 믿는 불교에 대해서 마음껏 자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포교를 해서 이 학생들을 다 불제자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구니는 1시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만 하더니 결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불교는 힘들고 어렵습니다"  석가모니 이후로 지금까지 열반한 부처는 한 사람도 없을 만큼 불교는 고행이요,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쉽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마음을 열어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은 바로 당신의 것이 됩니다.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입을 열어 주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나의 하나님 만왕의 왕이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주님이 이 시간 여러분들을 찾아가 주셔서 여러분을 구원하고 건져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식의 신분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이 순간 여러분의 신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래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비전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축복의 분량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분명히 이 세상을 사랑했지만 구원받는 자는 "믿는 자마다"입니다.  이 풍성한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지만 오직 믿는 자만이 그 풍성한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내 생명이 다하는 날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버림을 받습니다.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 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각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옥문 앞에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기서는 이미 끝장난 운명입니다.

'15분'이라는 연극 각본이 있습니다.
유망한 청년이 30세에 대학을 마치고 결혼을 앞두고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이 들어 의사로부터 15분 후면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불안과 초조에 떨며 몸부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15분, 14분, 12분, 11분 지나갑니다.  그때 "편지요" 하는 소리와 함께 배달된 편지 내용은 억만장자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고 그 삼촌의 재산 상속자가 귀하라는 변호사의 통보서였습니다.
 
청년이 몇분 남았느냐고 물어 보는 시간에, 시계는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 때 "편지요" 하면서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내용은 박사 학위 논문 통과 통지서였습니다.  시간은 생명이 7분, 6분, 5분, 4분 남았음을 가리키는데 또 "편지요" 하면서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용인 즉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결혼을 승낙했다는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시계는 멈추어지지 않고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그 청년은 숨을 멈추는 것으로 그 연극의 각본은 끝이 납니다.  억만장자의 상속권도, 박사학위도, 결혼승낙도 그 청년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15분은 15개월이 될 수도 있고, 15년이 될 수도 있고, 15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아무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십니까?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십니까?

교회를 잘 나가지 않던 한 어린아이가 주일 아침에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친구들하고 교회 갈래"  이 아이가 교회에 갔다오더니 "엄마, 교회에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그 다음 주일도 또 교회 갔다 왔습니다.  그렇게 몇 번 하길래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야, 교회에 가니까 무엇이 제일 재미있든?"
"응 찬송도, 하나님 말씀도,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참 재미있어.  그런데 엄마,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한참 예배를 드리면 돈주머니가 우리 앞을 지나가.  그래서 내가 지난 주일날 돈을 몇 개 가져 왔거든.  다음 주일에 가선 좀 더 많이 가져올래.  교회에 가면 무지무지 재미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의 멋진 만남을 위해서입니다.  전기의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만나는 순간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한번만 그분과 접촉되어지면, 영원에 접촉되어지면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처음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과의 소중한 만남을 가져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은 아름다운 삶을 낳습니다.  귀한 만남은 귀한 인생을 만듭니다.  행복한 배우자와의 만남은 행복한 가정을 만듭니다.  복된 성도들의 만남은 복된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지치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교회에 찾아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나의 빈 잔을 채우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거기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관광버스가 손님들을 싣고 관광지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내리막길에 들어선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습니다.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눈동자에서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 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는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 길을 한 개, 두 개, 잘 운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저 앞에 자신들의 마을이 보입니다.  이제 마을 모퉁이 어디엔가 버스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을 입구 신작로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피하라고 소리까지 쳐댔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 하며 야유를 했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둬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이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주님과의 만남!'  이 만남이 고통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이 만남이 지친 인생을 일으켜 세우는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 만남이 고독에 외로워 지쳐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성령님과의 접촉!'  이것이 상처난 가슴을 어루만지는 치료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붙들어 주시는 피묻은 예수님의 손!'  이것이 방황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는 사랑의 손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좋은 만남은 분명히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합니다.  이 좋은 만남을 소개하고자 저희 교인들은 여러분들을 위해 지난 12주 동안 여러분의 이름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풍성한 삶을 약속해 주는 좋은 만남의 자리에로 여러분을 초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당신은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당신이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그 하나 만으로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금 그 사랑이 풍성히 넘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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