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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놀람에서 위로로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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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에서 위로로 (행 20:7~12)


1. 시작하면서

성찬식의 정당한 시행은 참된 교회의 중요한 표지(sign)입니다. 교회개혁자들은 성찬이 임의로 의례적으로 혹은 미신적으로 시행되지 않도록 늘 조심시켰습니다. 이유는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연합과 일치를 이루며 동시에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영적 권위로 성찬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몸이 되며 한 가족이 됩니다. 뿐 아니라 믿음으로 받을 때에 주님의 영적인 임재가 이 성찬 안에 실제로 나타나 이 한조각의 빵과 한잔의 포도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오늘 힘들고 지친 우리 모두에게 성찬이 새 힘이 되고 새 소망이 되고 우리를 성찬으로 하나 되게 하시어 거룩한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드로아에서의 성찬

본문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주의 형제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밤새 복음을 강론하고 성찬을 베푼 내용입니다. 그러는 중에 유두고의 졸음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내용을 잠시 살펴봅시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헌금을 모금할 목적으로 다시 마케도니아 일대의 교우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시아를 거쳐 예루살렘을 향하는 중에 드로아를 거쳐 지나갔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4절에 그 이름이 거명되어 있습니다. 아주 충성스런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는데, 그 곳에서 그들과 일주간을 함께 지냈습니다. 드로아는 전에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터닝 포인터였습니다. 이곳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했던 그 환상을 보았던 곳입니다(행 16:8-10). 

그곳에 도착하여 한 주간을 보내던 그 첫날에 떡을 떼려하여 모였습니다. 여기서 떡을 떼려 함은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곧 성찬식을 거행하려한 것입니다. 오순절 초대 가정교회에서 성도들은 떡을 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2:42)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6-47)

성찬식은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정체성의 표지였습니다. 당시 유대교회와 다른 차이점은 곧 성찬을 거행한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들은 공동체의식을 함양시켜 나갔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영적 동기로 삼았다고 보여집니다. 뿐 아니라 갈수록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합적인 공동체를, 곧 다양한 종족, 전통, 언어들을 성찬을 통하여 하나로 묶어 나간 거룩한 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함께 한 사람들이 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한 가족으로 한 몸으로 그리고 복음의 한 목적 한 비전을 갖고 나아가도록 할 수 있는 것이 곧 성찬식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성향을 갖고 배경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 됨을 오늘 성찬을 통하여 확인하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 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찬 220장 3절)


3. 성찬식 앞서 한 설교

그런데 성찬식 앞서 바울은 복음 강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그 이튿날 떠나고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밤중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바울에겐 복음 증거가 성찬식보다 더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시간상 자기가 곧 떠날 사람이기에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동시에 바울에겐 성찬의 진정한 예식을 위해서도 복음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던 것일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먹으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꼴이 된다(고전 11:27)고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강조했던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지금 성찬을 받기 전 우리가 받을 이 성찬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성찬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케 하는 것이며, 그 기억은 곧 ‘그분의 죽으심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자가 되어라’는 명령을 기억하는 것이란 설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찬을 받으시면서 예수님을 만나길 축원합니다. 속죄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길 빕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이 자리 흘러넘치는 기적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143장 1, 2절)


4. 놀람에서 위로로

바울의 설교가 밤중까지 계속되면서 유두고란 한 청년이 3층 창 털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졸아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예배 중에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 사고는 설교 중에 졸았다고 하나님이 그 청년을 심판한 사건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놀람에서 그를 살리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준 위로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당황치 않고 죽었다고 한 그 청년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이 하신 것  처럼 그 청년 위에 엎드렸습니다. 이 행동은 그 청년의 죽음에 동참하려는 거룩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생긴 후 바울은 곧장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바울은 성찬의 의미를 지금 실물로 보여준 것입니다. 죄로 이미 죽은 우리위에 엎드리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울이 유두고를 실물 교재로 삼아 몸소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곧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된 것임을 말입니다.

드로아의 교인들이 유두고의 사고로 인하여 모두 놀랐었다가 그가 다시 일어남을 보면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제 어떤 사고 사건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런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적은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자신의 목숨을 걸고 대처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성찬을 받을 때 이런 진리의 삶에 대한 결단과 순종을 이루어갑시다. 

“나도 죽은 자 위에 엎드리리라”
고 말입니다. 찬송으로 맺겠습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요 
저 사망 권세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찬 27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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