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결심이 무너지는 이유 (마 26:31~50)

  • 잡초 잡초
  • 312
  • 0

첨부 1


결심이 무너지는 이유 (마 26:31~50)
  
 
  아프리카 흑인의 친구로 불리는, 슈바이처 (Schweitzer, Albert) 박사는 21세 때, 다음과 같은 결심을 했다. "30세 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공부하자. 30세 이후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바치자". 이렇듯 봉사의 결심을 한 그는, 마침내 아프리카를 복음으로 구원하는데 공헌하는 큰 일을 하였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드는 스무 살 때, 1849년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1.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혼자서 기도할 것. 
2 쓸모없는 잡담의 죄를 될 수 있는 한 피할 것. 
3 사람들 앞에서, 겸허하고 부드러우며, 또한 열심히 행동하자 
4 매일 성경을 넉 장 이상 읽을 것. 
5 하나님께로 마음의 깨끗함을 구하고 그 뒤는 섭리하시는 손에 맡길 것. 

아마 여러분들은 다 신앙인으로서도 여러 가지 결심을 하였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를 위하여 말씀도 읽고 기도하고 선행도 하고, 전도하려는 결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심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래서 성공 자가 많지 않고, 신앙적인 면에서는 성자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는 아주 좋은 결심과 결단을 하게 됩니다. 31절입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 때 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힘있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몇 시간이 못 되어 이 결심은 무참히도 무너지고 맙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주님 앞에 나와서 말씀 듣고 기도할 때면, 주님을 따라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맹세하였던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밖을 나서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일에 주님을 부인하고 마치 신앙과 상관없는 일을 서슴지 않는 우리들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그렇게 결심하고 넘어졌는가 살펴보면서 우리의 거울을 삼고자 합니다. 


Ⅰ. 예수 따라가는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결심하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지불해야 될 대가가 무엇이라는 것을 깊이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희생과 수고와 장애를 예상치 아니하고 이루어지는 결심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것일수록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생각지 못하고 결심한 것입니다. 

예수 따라 가는 길이 영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십자가의 길이요, 골고다 언덕을 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하고 치러야 할 대가를 무시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님만 좇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 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눅9:57-61)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좇는 사람들은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주님과 함께 고난도 각오하고 세상의 환락과 이별하고 오직 주를 따르는 자기 희생과 고통과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Ⅱ.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결심이 무너진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면 매우 교만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마26"34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결국 자기 과신과 교만인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함의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너무 약합니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말하고 결심하면 그것을 이루는 힘이 자신에게서 온통 나오는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불과 서너 시간 만에 베드로는 여지없이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27:1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50절에 보니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에 검을 빼어 잡으려는 자의 귀를 베는 사건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은 의분이 아니라 혈기였습니다.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표출한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은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을 하다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감격하여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만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놀라운 특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이 그의 혈기였습니다. 혈기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혈기를 잘 부리는데는 첫째는 욕구 불만 때문입니다. 둘째는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22:24,25에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질까 두려움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혈기와 분노는 전염성이 있으며 우리의 영혼까지 파괴시키는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연약함을 알아 겸손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아 우리도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인 줄 믿고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여 어떤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 있는 장수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할 것입니다. 


Ⅲ.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험은 무엇입니까? 마음에는 결심하는데 육신이 약한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위대한 신앙인, 위대한 성자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9:29) 

예수님은 기도로써 시작하여 기도로써 마치신 분이십니다. 사역을 시작하는 초기에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사역을 행하시는 중에도 종종 성경은 "산으로 가시다!"라는 말씀으로 그가 기도의 사람인 것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은 처절한 기도로 매달리셨습니다. 

요즘 심리학자들은 사람을 그냥 '사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캐릭터'라고 합니다. 캐릭터는 무슨 말입니까? 성격이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배우들도 캐릭터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성격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 공통된 견해입니다. 

어떤 환경이 주어졌을 때 성격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다르고 반응하는 것에 따라서 운명의 길이 전혀 달라집니다. 사람마다 좋은 성격도 있고 나쁜 약점 나쁜 성격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성격 약점이 있습니다. 그 나쁜 성격 자기 약점 붙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자기 약한 점을 잡고 기도하면 그것이 고쳐집니다. 사람마다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약한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이성(異性)에 약하고 어떤 사람은 자식에게 약하고 다 사람마다 누구든지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단의 시험에 걸리게 하는 사다리들이 다 있습니다. 

그것 붙들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것 붙들고 기도해야 됩니다. 내 못된 성격을 아름답고 하나님께 합당한 것으로 고쳐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을 걸만한 그 약점을 붙들고 그것에 매달려야합니다. 기도할 때 시험이 물러갑니다. 기도할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 주세요 하는 달라고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날 좀 고쳐주세요 내 못된 자아 좀 깨주세요" 하는 기도가 더 많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것을 주셔도 그릇이 깨져있으면 다 새버리는 것입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그릇이 엎어져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나를 고치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흘리지 않고 쏟아버리지 않고 바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를 고쳐주세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멀찍이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자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자기가 말한 것은 있고 또 상황은 무서우니까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군중 속에 살짝 끼어 가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보자' 하고 지금 엉거 추춤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렇게 망설일 때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물에 가장 균들이 많이 들끓듯이 우리의 인생도 결단하지 못하고 미지근할 때 시험이 많이 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눈치 보면서 적당히 하는 신앙생활은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시험이 더 많이 오는 것입니다. 구경꾼 식 신앙생활은 마귀가 더 많이 역사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와 같이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믿는 사람의 기도는 전파처럼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마귀는 결단하는 자를 무서워합니다. 어려운 일이 올 때 더욱 믿음에 굳게 서고 하나님을 회의하지 않고 내가 죽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는 자에게 그 환란의 불은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인생이 승리하는 삶 부끄러움 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잘사는 것 많이 배운 것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은 깨끗하게 사는 삶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성공입니다. 

말씀대로 사십시다. 하나님 말씀 명심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약점을 붙들고 기도해야 됩니다. 내 성격의 약한 점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믿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결단하는 자에게 큰 용기와 하나님의 도움심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순간순간 굳센 결단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