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 곁을 걷는 천사 (롬 12:9~13) - 대접, 노동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우리 곁을 걷는 천사 (롬 12:9~13)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 거악집선(去惡執善)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는 지금 초기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1610)의 그림 한 점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인 상상력을 발휘해 그 그림을 한번 머리에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어깨 품이 넓은 비단옷을 입은 한 청년이 무릎을 꿇은 채 두 팔로 땅을 짚고 있습니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려 드러난 그의 팔은 미끈하고 든든합니다. 살짝 드러난 초록색 바지는 고급스럽습니다. 눈은 황홀경에 빠진 듯 반쯤 감겨 있고, 입은 조금 벌린 채입니다. 그는 연못에 비친 자기의 영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끌려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입니다. 

나르시스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그를 연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한 번도 반응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탓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나르시스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은 적이 없는 영혼의 비극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 없이 스스로 자족하려는 마음(superbia)이야말로 교만(hybris)입니다. 그 교만 속에 자기 파멸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음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홀로 자족하는 사람은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홀로 자족한 사람이 아니라, 값없이 베푸신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삶은 사랑의 빚 갚음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지칭하는 말 중에 제게 가장 깊이 와 닿는 단어는 ‘서로 지체’라는 말입니다(롬12:5).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은(렙2:8) 이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라는 요청 앞에 서있습니다. 필요에 응답한다는 것, 누군가의 지체가 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성도는 거짓 없는 사랑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첫째는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去惡)이고, 둘째는 선한 것을 굳게 잡는 것(執善)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악의 충동과 선의 충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가장 선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악의 충동은 있습니다. 흉악한 범죄자에게도 선의 충동은 있습니다. 어느 충동에 반응하며 사느냐에 따라 인생은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 전통은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뿌리를 일곱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교만, 탐욕, 식탐, 색욕, 분노, 시기, 나태가 그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죄의 유혹이 뿌리치기 힘들만큼 달콤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뒷맛은 씁쓰름하지만요. 죄의 유혹을 뿌리치는 방법은 선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맛을 들이는 순간, 악한 것은 맛을 잃고 맙니다. 섬기는 맛, 나누는 맛, 돌보는 맛,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기꺼이 하는 맛, 그 맛에 빠지는 순간 죄의 인력은 약해집니다.


• 다정한 사람

선을 굳게 붙잡은 사람의 마음은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움은 생명에 가깝고 굳어짐은 죽음에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선을 굳게 잡은 사람은 다른 이의 마음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고 선한 것을 이끌어 냅니다. 분주한 세상살이에 지쳐 우리 마음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복잡한 서울 시내 거리를 걷다 보면 짜증날 때가 많습니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이들 때문에 발걸음이 지체되면 슬슬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의 충동이 승리하는 순간입니다. 촛불 집회에 나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인파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짜증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그들을 묶어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사람에 치인다고 느낄 때마다 김준태 시인의 시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좋아라>를 읽습니다. 

좋아라
빽빽한 시내버스 속이
이다지도 좋을 수 있으랴
가난한 마음들이 서로
옷을 부비며 살갗을 부비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늦여름 시내버스 속은
좋고도 정말 좋아라
땀냄새를 섞으며 함께 흔들리는
때론 하느님을 서로 나누어 갖는
한 시대의 슬픈 살덩이들
정말로 아름답고 좋아라
정말로 소중하고 소중하여라
손잡이 하나에 몇 명씩 매달려도
이웃의 발등을 쬐끔이라도 밟지 않으려고
벌컥벌컥 숨을 쉬는 사람들……
내 이대로 돌이 되어도
백년 만년 바라보고 싶어라.

이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는 사람은 늦여름 시내버스 속에서 땀 냄새를 뒤섞는 이웃들조차 살갑게 대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 나라의 문턱에 당도했다 할 것입니다. 미워할 때 우리 심신은 긴장되고 작은 자극에도 극단적인 반응을 할 때가 많지만, 사랑할 때 우리 심신은 이완되고 웬만한 자극쯤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 다정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 속에 원기가 솟아납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우리 속에 영적인 에너지를 불어 넣습니다. 천사는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우리 곁을 걷고 있는 이들이 천사인지도 모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는 천사, 길을 못 찾아 애쓰는 사람을 잘 안내해주는 천사,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건네는 천사, 울고 있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천사, 다정한 말 한 마디로 울울한 심사를 어루만져주는 천사…. 시인의 말대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함께 나누어 갖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먼저 다가가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사람입니다. 


• 노동과 기도

바울 사도는 또한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환난을 만나도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는 이것을 ‘즐거운 낙천주의자’가 되라는 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에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어진 일감 앞에서 한숨부터 내쉽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기는 하는데 늘 징징거리며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욕까지 떨어뜨립니다. 둘째는 어떤 일이 주어져도 마치 자기가 그것을 선택한 것처럼 기꺼워하며 일을 해내는 사람입니다. ‘즐거운 낙천주의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신바람을 불어넣습니다. 요즘은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달인’이라 할 만큼 자기 일에 숙달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즐거운 낙천주의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자기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엊그제 정동교회 수양관 산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현주 목사님이 가사를 쓰신 <밥을 먹는 자식에게>라는 곡을 흥얼거렸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을/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이 가운데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라는 대목이 딱 목에 걸렸습니다. 허겁지겁, 건성건성, 대충대충…. 이게 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일상적인 일 속에도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해놓은 일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일이 뒤죽박죽이면 그의 속도 뒤죽박죽입니다. 우리의 일을 거룩한 일로 바꾸는 방법은 다른 것 없습니다. 자꾸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게 바로 기도입니다.

‘즐거운 낙천주의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과 기도가 내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노동과 기도의 내적인 결합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은 밀레의 그림 <만종>입니다.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한 부부가 삼종기도(Angelus) 시간을 알리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아내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머리를 깊이 숙여 기도하고, 남편은 모자를 벗어 들고 기도를 올립니다. 캐다 만 감자가 흩어져 있는 황톳빛 들판 저 너머로 아스라하게 교회당이 보입니다. 기도를 위해 잠시 일을 멈추는 순간은, 우리 속에 쌓인 상처, 분노, 스트레스, 슬픔 같은 감정의 악순환을 끊고 나를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기도와 일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을 때 우리의 일상적인 일은 거룩한 일로 변합니다. 힘겨운 일은 즐거운 일로 변합니다. 기도로 조율된 일은 그 자체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 됩니다.


• 대접하는 기쁨

자기 스스로 ‘즐거운 낙천주의자’로 살아가는 성도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누군가의 지체가 되어주라는 말일 겁니다.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잠시 동안 맡기신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자꾸 주는 것입니다. 주면 줄수록 지갑은 줄지만, 내적 자유는 늘어납니다. 넉넉지 않아도 주는 기쁨을 터득한 사람들은 생의 비애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혈안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물질적인 부족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말벗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거지에게 나사렛 예수를 소개했습니다. 얻을 게 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가 바로 천사입니다.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 없이 줄 때, 우리의 줌은 하나님께 드림이 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눅14:12). 우울한 시대입니다. 우리 마음이 각박해지기 쉬운 시대입니다. 이럴 때 문득 멈추어 서서 우리 곁에 머물던 천사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영혼이 정화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원로 모임에서 성도의 별명은 ‘덕분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고마움임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 누군가의 천사가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누군가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살맛을 불어넣으시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나르시스적인 인물들이 많은 세상을 따뜻한 정이 통하는 곳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서로 지체’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뿐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