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왜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수밖에 없을까? (고후 4:7~11)

  • 잡초 잡초
  • 338
  • 0

첨부 1


왜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수밖에 없을까? (고후 4:7~11)  
  
이제 본격적인 여름과 무더위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올 한해 또 다른 여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삶의 시간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녹원이 더욱 무성해지고 또 뿐만 아니라 여름을 알리는 장미가 활짝 그 꽃을 피우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이 흘러가는 삶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운영하며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마음에 원하는 것 이룰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삶이 우리의 방향과 그리고 삶의 계획과 전혀 다르게 달려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때마다 마음아파하며 슬퍼하고 지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 같은 삶의 눈앞에 열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늘 승리할 수밖에 없는 백성입니다. 왜 우리는 눈앞에 여러 가지 실패로 점철된 삶이 있고 마음에 실망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움직여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는 당장 내 뜻과 내 계획과 다를지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그것이 과정을 거쳐 결과에 이를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현재의 모든 것이 끝이 아니니 결국 그와 같은 단계를 거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아 그 상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른 대처와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그 전제 속에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삶을 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특별히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핍박을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결코 망하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은, 다시 일어나는 믿음의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지만 우리 안에 보배로운 예수그리스도로 품었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그릇의 가치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보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치는 보석과 같은 가치를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그 자리까지 결코 가고야 말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주님의 생명과 지혜를 품은 백성으로서의 자부심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능가하여 상황을 만들고 섭리해 나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 내 눈앞에 열어지는 모든 현상을 보고 모든 것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과 현상이라는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전부가 아닙니다. 상황은 언제나 주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언제나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 마음을 두면 우리는 언제나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정의 순간마다 우리는 어떤 과정이 내 눈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이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흘러간다라는 것을 느끼고 믿고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의 삶은 밋밋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준비되어지고 훈련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야말로 극적인 삶이었던 것을 봅니다. 탄생 때부터 하늘의 영광의 찬송이 있었고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헤롯이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하기 위해서 바로 군사들을 보내게 될 때 예수님의 부모는 벌써 천사의 지시를 받고 애굽으로 피난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이라는 빈한한 동네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라는 조소를 들어야 하는 빈한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곧 공생애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세례를 받고, 제자를 선택하고, 이어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며, 또 배고픈 자들에게는 음식을 만들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길에다 겉옷을 그들이 펼쳐서 그것을 밟고 마침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화려했던 예수님의 입성이었지만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쓴 잔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옵소서” 하고 원하였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음을 알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 속에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지막 고통도 결국 그것이 마지막 고통이 아니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서 놀라운 은혜와 영광으로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간에게 생명의 영광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저 땅속으로 고꾸라지는 것 같지만 결국 그와 같은 극적인 삶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에 대한 영원한 생명을 구원의 역사로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일생이 이럴진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극적인 것 같은 어려움에도 처하고 때로는 최고의 자리에 거하기도 하며 또 거기서 떨어지기도 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극적인 것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에 때로는 여러 가지 고통을 줄지 몰라도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삶이니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을 보지 말고 내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능력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간을 위한 죽으심이었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부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잠시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가운데 처했다할지라도 그 실패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면 우리 인생은 전혀 다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를 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질그릇의 가치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를 품은 보배로서의 가치로 나타나는 거죠. 
상자 갑이 있죠. 이 상자 갑이 있는데 거기에 보물을 담으면 그 상자 갑은 그냥 상자 갑의 가치가 아니라 그 상자 갑을 건네줄 때 그것은 보물로서 대접을 받게 되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셔서 우리는 더 이상 누추한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품은 은혜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왜 승리할 수밖에 없는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승리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셔서 그것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의 뜻과 섭리 속에 있고 결국 그 뜻대로 이루어짐을 봅니다. 
이 세상의 승리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가는 게 승리가 아니에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가는 게 승리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어요. 그들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절규하면서 그 인생들을 용서하신 예수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들에 대한 이해의 완성, 사랑의 완성,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주님이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는가가 승리의 기준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내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승리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승리를 선포하고 그것이 이룰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함을 믿고 순연히 당연한 승리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패해도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으로 승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진행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져지게 됐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마음이 변함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내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지금 가고 있느냐가 바로 승리와 성공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인생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고난의 때를 통해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요셉의 최고의 승리의 때는 무엇입니까? 형들에게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왔는데 거기서 최고의 가정 총무의 자리에 이르러요. 또 거기서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갔지만 거기서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요. 지루한 시간 보냈지만 바로의 궁에 가서 마침내 총리가 돼요. 그것이 최고였습니까? 

저는 요셉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점은 요셉이 어느 날 총리대신에 올라서 정말 정치를 잘해서 가뭄 때에 사람들을 잘 구휼하지 않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이웃나라에서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에 왔다가 요셉과 마딱드리지요. 그리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요셉이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죠. 형들이 깜짝 놀라요. '우리는 죽었구나!' 
그런데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당신들은 두려워마소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죠. 그리고 그는 용서합니다. 
비로소 사랑을 완성했고 이해를 완성했고 용서를 완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공은 무엇이에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성취하여 거머쥐는 것이 승리입니까? 아니면 내가 성취하여 거머쥔 것을 다시 내주어 베풀 수 있는 것이 성공입니까? 
우리의 성공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까지가 성공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또다시 나누어줄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야 우리 인생의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까? 
우리가 보통 이렇게 생각하죠.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원하지만 내 여건이 돼야 되고, 내 시간이 돼야 되고, 내 모든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건이 되고 상태가 되고 시간이 돼서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여건이 되고 시간이 되고 상태가 돼서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떠날 때까지 그런 기회는 아마 오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 어떤 상태가 돼도, 내게 어떤 여건이 돼도, 내게 어떠한 모습이 돼도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무엇인가?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무엇인가를 우리가 생각한다면, 어떤 상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상태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삶인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세상 밥 먹다 갈 수는 없잖아요. 세상 옷 입고 가다 이 세상 떠날 수는 없잖아요. 세상에 좀 더 편안한 자리 찾다가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살았다고 우리 인생을 마감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잘 먹었고, 편한 집 살았고, 우리가 편한 의복 입었고, 이것이 우리에게 잘 살았다는 기준은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잘 살았다는 것은 정말 주님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수행한 것-이것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잘 산 삶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일물일어설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 가장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고 그러죠. 
그것을 잘 뽑아 쓰는 사람이 시인이고, 또 작가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나 하나를 통해서 꼭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것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단 말이에요. 그것을 가장 잘 이루는 사람이 가장 잘 산 사람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것을 꼭 성취하는 게 내 삶이 승리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통해서 꼭 그 일을 이루신단 말이에요. 내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저 낮아진 지경을 통해서 슬픔을 배우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슬픈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자로 만드시지요. 

또 때로는 실패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패한 자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거죠. 
눈물 젖은 빵을 먹고 밤새워 눈물로 지새운 밤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결국 믿음의 백성은 이러저러한 어떤 지경 속에서도 결국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뜻을 인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린 가장 큰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논리는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니 승리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을 맞이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말씀드렸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냐고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에요.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일이냐고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어떤 때냐고요? 
지금 바로 이 순간이에요. 
지금 바로 이 순간, 내게 주어진 상태에서,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헌신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죠.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데 그 방법이 뭐죠?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은총의 백성입니다. 내가 가야할 길 하나밖에 없는데 우리는 갈등해야 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지금 실패하고 있는가, 성공하고 있는가, 갈등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당연히 성공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가야 할 유일한 한 가지 길을 걷고 있는 거예요. 
어차피 거기 가야 합니다. 슬픔이 있어도 그 길목 건너야 되고, 눈물이 있어도 그 길목 건너야 합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예요. 피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돌아간다고 해서 면해지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걸음 한걸음을 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떻게 승리해야 할까? 라는 구체적인 생각을 하고 가야 합니다. 
초조한 전투가 아니라 온전한 작품을 이루는 전투가 돼야 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익숙해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어떤 일을 익숙하게 할 수 있도록 그 정도까지는 정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있어요. 우리가 어떤 일을 익숙하게 할 수가 있죠. 익숙하게 하는 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그 다음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익숙해진 그 상태에서 우리는 익숙함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은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림 그리는 분들 여기 계시죠? 
기초적인 데생이 끝나고 일정한 수준의 훈련을 거치면 어느 정도는 다 하시겠죠? 또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경력이 쌓이게 되면 어느 정도의 모양은 다 그릴 수 있겠죠. 원하는 것 어느 정도는 그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그린 작품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붓에다 물감 찍어서 캔버스에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그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정한 모양을 그린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중요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똑같이 할 수 있는 일도 내가 고뇌하며, 정말 내 혼을 쏟아 부으며 내 모든 열정을 다하며 이전까지 하는 것과 또 다른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자 하는 이와 같은 뜨거운 열정이 발휘될 때, 그 때 우리들에게 진정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고 백 년, 천 년이 가는 이와 같은 작품이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여기 음악을 연주하는 분들 계시죠? 익숙해질 때 있습니다. 일정한 훈련을 거치면 어느 정도 익숙하게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끝나면 안 되죠. 내가 익숙한 상태에서 하는 것은 그 정도 수준이죠. 그 가운데 내가 고뇌하며 어떠한 철학을 불어넣고 내 삶을 어떻게 쏟아 넣을 것인가 생각하고 그 가운데 익숙함을 벗어나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감동어린 연주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나아가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갈등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승리하는 것 어떻게 승리하면 될까?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애쓰며 그 길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사람으로 어떻게 이것을 또 많은 사람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며 누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품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주님처럼 다시 일어나고 결국 승리해야 합니다. 

출애굽의 고초와 광야의 긴 어려움, 정복의 전쟁의 지루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출애굽 할 때 첫 번째부터 유월절의 역사를 일으키면 다 해결될 텐데 왜 이렇게 열 번까지 지루하게 갔을까? 

광야의 사십년의 긴 행복, 가나안에 입성해서도 하루아침에 끝난 것이 아니에요. 수년을 거쳐서 지루한 전쟁을 거쳤단 말입니다. 그들은 결국 정복의 전쟁을 해가면서 여름과 겨울을 겪었으니 얼마나 고초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훈련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무엇을 주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 주시되 자격을 갖추어 영구히 누리기를 소원하시고 한 번 가장 알맞고 합당한 때에 주시는 분임을 봅니다. 

늘 이런 말씀을 드리잖아요. '하나님,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학생이 기도했으면 학생에게 답안지 번호를 가르쳐줘서 합격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4,2,2,1,3...... 이렇게 가르쳐주시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학생의 마음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주시고, 전에는 도저히 자리에 앉을 수 없었는데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의지도 주시고, 정말 잘 안 됐는데 지혜도 주시고 끈기도 주셔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하여 그 마음에 원하는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왜 답안지 번호 가르쳐 줘서 이룬 것과 무엇이 달라요. 답안지 번호 가르쳐줘서 그것으로 합격했다면 그 학생은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같은 시험 보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안 되죠.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마음을 주셔서 그 학생이 합격했다면 다음에 동일한 시험이 있을 때 그는 또 노력하게 될 것이고 갖추어진 기본 실력을 통해서 그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어려움 주시는 것은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거죠. 또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주심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백성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구해요. 

"하나님, 배가 고픈데 밥을 주세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밥을 떨어뜨려 주실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더 보편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자리 주시고, 일할 수 있는 의지와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것을 위해서 소득을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밥을 사먹는 거겠죠. 그러면 그는 그건 한 번 뿐이 아니라 그는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회적으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늘 하나님 앞에 질질 끌려 다니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주님을 우리가 좇아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은총의 백성으로서의 능력을 부여하시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참된 기쁨의 의미를 우리는 생각을 하죠. 그 기쁨과 평안과 행복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체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지루하게 하시고 또 불평의 지경에도 놓게 하시며,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며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해서 어느 날 우리에게 문득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쁨으로 따를 때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죠. 
방황했다가 가나안에 입성했잖아요. 
그런데 가장 먼저 버티고 있는 것이 가장 견고한 여리고성이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하루에 한 바퀴 돌고, 이틀째 두 바퀴 돌고, 칠일동안 한 바퀴씩을 더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를 도는데 마지막 바퀴에 "와"하고 함성을 지르니 무너졌어요. 

여러분 무슨 기적 같죠? 아무 수고도 안했는데 재미있게 게임했는데 이루어진 기적 같죠? 
절대 안 그렇잖아요. 여러분 그 수많은 백성들이 어떻게 여리고 성을 도는데 한마디도 말을 안 하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집중했던 거예요. 한 마디도 얘기하면 안 돼요. 어느 누구하나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어요. 그와 같은 집중이에요. 

여러분,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마지막순간에 우리에게 발휘되는 능력이지요. 집중력이잖아요. 
우리가 어떤 일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우리에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우리의 상태를 보세요. 가장 집중해서 몰입해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그런데 바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의 상태가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백성들이 그야말로 그와 같은 것을 통해서 마음이 하나가 된 거예요. 집중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럴 수 있었습니까?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지내오면서 그들은 깨달았던 거예요. 불평했던 모든 백성들 광야에 다 묻혔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대로 따라온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그것을 배웠습니다. 삶으로 그것을 체득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셨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그 일을 이루어야만 우리는 그 일을 승리할 수 있고 이 가나안에 입성하여 마침내 모든 성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그들은 확연히 그들의 삶에서 체험했던 겁니다. 

광야의 사십년의 방황이 없으면 그들은 여리고성을 점령할 수 없었어요. 
광야의 사십년의 방황을 통해서 그들은 많은 것을 체득했기에 그들은 여리고성의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것을 짊어집니다. 곧 고난의 감수를 통해서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기적과 능력만 행하셨다면, 과연 우리 인간들이 본을 받았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박수 받았죠. 병을 고치실 때 박수 받았어요. 기적을 행할 때,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때, 그리고 자연을 정복했을 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먹였을 때, 이런 각종의 능력으로 사람에게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나귀를 타고 사람들이 겉옷을 펼친 그 길을 걸어가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기적으로 우리 생명을 구원하셨습니까? 예수님의 그 놀라운 기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에서 절규하며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에 절규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런 고통 없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눈물 젖은 빵을 먹고 밤을 지새우고 우리가 괴로워하고 고통 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영화로워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고귀한 우리를 세우는 은혜의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요셉이 고난의 스토리 없이 그와 같은 영화를 얻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다니엘에게 위기가운데 헤쳐 나오는 일이 없었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겠습니까? 
결국 우리의 삶에는 고난도 있고, 고난이 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참된 은혜의 기쁨과 승리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이라는 것은 결국 승리가 나타나는 삶입니다. 
근본적인 승리를 가지고 사는 성도에게는 슬픔과 실패라는 것이 다 승리를 향해가는 한 단계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눈앞에 있는 당장의 한 순간만 가지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잖아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기적, 그리고 환호, 배척, 고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와 같은 모든 것을 알기에 그 과정을 우리가 눈여겨보면 그 순간마다 은혜를 받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결과를 안다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과정도 기쁨으로 갈 수 있잖아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방황했지요. 저는 이 의미를 굉장히 깊이 생각하는데 그들이 사십년 동안 방황을 하면서도 어떻게 이탈하지 않고 가나안에 끝까지 갈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잖아요. 가나안에 간다는 것을 그들은 확실히 믿었어요. 알고 있었어요. 

만약에 '우리가 가나안에 갈지 안 갈지 몰라.' 그러면 어떻게 광야에 있었겠습니까?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동했습니다. 이동한 증거를 아시잖아요. 그들은 씨를 안 뿌렸어요. 씨를 안 뿌렸다고요. 내가 씨를 뿌리면 거두어 먹어야 된다는 거거든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씨를 안 뿌렸어요. 그들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 움직인 거란 말이에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왜 만나를 주셨죠?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으니까, 씨 뿌려서 거두어 먹을 수가 없으니까 날마다 날마다 이동하는 중에 그들은 음식을 취할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던 거죠. 그런데 사십년을 어떻게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었습니까? 왜 지루한 그 일정을 그들이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예요.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믿고 있었어요. 그러니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죠.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도 힘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승리하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힘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잖아요.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결국 목표가 뚜렷한 사람이 승리하죠. 왜 그런지 아시죠? 우리 삶은 길어요. 지금은 승리했지만 그 승리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해요. 
우리의 지식과 지혜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저기 끝까지 가려면 승리와 성공의 단계를 얼마나 많이 넘어야 돼요? 
승리했지만 또 넘어갈 것이고, 우리가 성공했지만 또 실패할 것이고, 이와 같은 과정을 수없이 넘어야만 저기 끝까지 가는 거예요. 
지금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그 승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한 번 어려웠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결국 우리의 힘이 소진되고, 능력이 소진되고, 지혜도 지식도 소진될 때, 결국 마지막까지 갈 사람은 힘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목표를 버리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뛰어가지 못하면 걸어서라도, 걸어서 못가면 기어서라도, 끝까지 가는 사람이 결국 목표까지 가는 거죠.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이죠? 결국 의지가 굳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사람은 누구죠?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에게 의지도 주신단 말이에요. 그에게 다시 힘을 북돋워주시고, 그에게 다시 지혜와 능력을, 지식을 더해 주시는 거죠.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는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람이고 우리가 주님의 것이니 실패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실패예요. 
'아, 나 실패했네. 가슴 아파.' 그 때 여러분 과감히 하셔야 될 게 있어요. 
'이건 내일이 아니야.' 
버려야 돼요. 그리고 승리를 찾아서 누리셔야 돼요. 
내거가 아닌데 왜 짓고 있어요. 
'나는 실패할 리가 없는 사람이야.' 
그 때 왜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낙심해요. 이것 버려야 돼요. 
'나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내 생활에서 승리한 요소들을 빼내서 누리시면 돼요.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내 삶의 일상이 될 수 있도록 가고, 가고, 또 가는 겁니다. 

항상 승리하는, 먼저 뛰어나가는 사람이 아니고, 중간에 앞서가는 사람도 아니고, 결승라인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까지 가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가나안에 입성했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가는 거죠. 
힘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되지만 결국 목표가 뚜렷해야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해야 결국 그것들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성경에 나온 훌륭한 인물들은 어떤 사람이냐면 이런 사람이더라고요. 
그 사람이 훌륭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 것이 아니더라니까요. 
그 사람이 훌륭해서 '너 훌륭하구나!' 하고 하나님이 택한 것이 아니더라니까요.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그 사람이 훌륭해진 겁니다. 
그 사람이 훌륭해서 하나님이 함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했더니 그 사람이 훌륭해졌던 거예요. 그러니 우리 모두가 다 훌륭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훌륭해 질 수 있지 않습니까? 
훌륭한 사람만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면 가능성이 없는 사람도 너무 많아요. 
모든 사람이 훌륭하겠어요? 훌륭함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잖아요. 그러면 그중에서 몇몇만 뽑힘을 받는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잖아요. 하나님은. 
누구든지, 누구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사람이 훌륭해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에 속으면 안돼요. 삶에 속으면 안돼요. 
우리는 자꾸 현상을 보고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인생에 현상은 전부가 아니에요. 늘 말씀드리죠. 우리가 초보일 때는 현상을 보고 판단해요. 그러나 우리가 익숙해지고 숙련되고 우리 수준이 높아지면 그 다음에 현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서 사용한다니까요. 

여러분, 이 성경책을 보세요. 현상이라고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냥 눈앞에 성경책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이 의미는 전혀 다르잖아요. 어린애는 그냥 구기고 찢을 수도 있고요, 성경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말씀을 읽고 깨닫는 사람은 그것이 삶의 큰 지침이 되고 가슴에 감동이 되고 그것이 몸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여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그를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 현상이라는 것은 수시로 바뀌어요. 그런데 어찌하여 거기에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현상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여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삶의 이러한 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전부는 아니에요. 그것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인은 2차적인 의미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여 그 가치를 부여하는가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거예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실패고 고난이라고 얘기해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실패와 고난이 아니에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공의 자리로 이끌게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단일 뿐이에요.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사십년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까? 
왜 사십년 동안이나 방황하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믿었었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목적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면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온다는 사실이에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마음껏 누리고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