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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초청 (요 1:35~46) -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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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초청 (요 1:35~46)


나와는 직접적인 교제는 없지만 나의 목회에 영향을 끼친 분 중에 한 분이 서울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다. 그분이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강남구 서초동 어느 건물 2층에 세를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그때가 1978년, 지금부터 꼭 30년 전이었다. 

나는 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처음에 어떤 사람들이 모였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마침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란 이름으로 개척 후 10년의 과정을 엮은 책이 나왔다. 

옥목사님이 교육전도사 시절 불광동 은평교회를 섬겼는데, 그 교회 배기주 목사님의 권유로 개척을 해서 강남 은평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때 한창 강남이 개발되는 중이었는데 불광동에서 강남으로 이사간 불광동 은평교회 교인들이 개척 멤버가 된 것이다. 설립예배 때는 축하객들로 붐볐는데 첫 주일에는 12명이 모여서 옥목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와 의자를 둥그렇게 놓고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초기 몇 되지 않은 교인들은 옥목사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오늘 매주 출석 교인만 2만명이 넘는 대교회로 성장하였고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었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 시작은 관심이 없어도 괜찮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전세계의 종교가 된 기독교의 시작에 대하여는 궁금증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기독교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오늘 본문 속에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으리라 기대가 된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벵겔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기독교의 기원을 보여 주는 기사라고 말했다. 

기독교의 시작점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점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벵겔의 주장대로 오늘 본문을 기독교의 기원이라고 볼 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시작되었는지 그 근거를 살펴 볼 수가 있다. 오늘 본문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세례 요한이다. 


1. 세례 요한의 사역

(요1: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세례 요한의 부친은 제사장 사가랴였으며(눅1:5),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다. 노년에 무자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 그는 광야에서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철저하게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했을 때 그의 인기가 절정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분명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30년의 짧은 인생을 살았으나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자였다. 그의 증거 사역은 이 땅에 기독교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산파 역할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조금도 사심 없이 이렇게 증거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가 말한대로 ‘광야의 소리’처럼 사라졌다.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충실하게 잘 닦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오늘 본문 36절에서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서서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은 자신의 선생을 떠나 예수님에게로 갔다. 

(요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세례 요한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내가 아니요 바로 저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저 분에게로 가시오.’ 그러자 두 제자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갔다. 세례 요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는 30년 밖에 살지 못했다. 그는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고급 요리를 먹어 본 적도 없다. 평생 약대 털옷 한 벌이 그의 의복이었고, 메뚜기와 석청이 그의 음식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 믿고 죽도록 충성했는데 지지리도 복 받지 못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셨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올라갔느냐? 얼마나 살았느냐? 예수님은 관심도 없으시다. 세례 요한처럼 얼마나 예수님을 증거했느냐? 예수님께로 인도했느냐에 물으실 것이다.


2. 기독교 최초의 신자들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시쯤 되었더라
(요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세례 요한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간 두 사람은 안드레와 요한이었다. 그들은 갈릴리 어촌에 사는 청년들이었으나 단순히 어업에만 종사하던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의식주 문제 해결이 그들의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 상태에서 수탈당하고 있는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문제 의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배우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좋은 스승을 만났었다. 그러나 그 선생은 참된 스승인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 자리에서 떠났다. 두 제자는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들이 예수님을 뒤좇아 오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물으셨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따라오는 것이냐?’ 
이때 요한의 두 제자가 공손히 물었다. “랍비여 어디 머물고 계십니까?” 이 말은 가서 배우겠다는 뜻이다. 그때 예수께서 즉시 허락하셨다. “와 보라!” 그때 시간이 오후 4시경이었다. 안드레와 요한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날을 예수님과 함께 보내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여러분, 나는 이 두 사람의 태도를 보면서 상당한 도전을 받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갔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다.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은 찾아가 만나겠다는 것이 아닌가! 때때로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이와 같은 용기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린다. 배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찾아나설 때 얻게 되는 것이다.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의식주 문제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 교회당 문턱을 밟았어도 영적 성장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와 같다. 이곳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배울 수 있다. 

왔다가 금방 가지 말고, 안드레와 요한처럼 오랫 동안 밤 늦게까지, 아니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과 밤새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을런지 모른다. 그들은 그날에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염원했던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안드레와 요한과 같은 적극적인 열심히 필요하다.


3. 형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안드레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는 자기 집으로 먼저 가지 않고 형 시몬의 집으로 달려갔다. 시몬 베드로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리고 만나자 마자 첫 마디가 ‘형,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오늘 본문에 두 형제 사이의 다른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다. 안드레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갔다. 예수께서 시몬을 보자 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게바’는 아람어고 ‘베드로’는 그리스어다. 그 말의 의미는 ‘반석’이란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보시고 장차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흥왕케 될 것인가를 예고하신 것이다.
그날로 즉시 시몬은 예수님을 믿었고, 훗날 그는 가리샤라 빌립보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을 때 수장인 베드로가 성전에서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최초의 신약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드레의 이름은 복음서나 다른 서신서에 별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안드레가 없었으면 베드로로도 없는 것이다. 안드레가 평상시 신뢰할 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동생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야! 나 지금 배 타야 돼, 나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 믿어!’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기초돌을 놓은 분이 있다. 길선주목사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6명의 목사 중에 한 분이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분이다. 그리고 3.1 만세 운동의 기독교 대표로서 33인 중의 한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 믿도록 인도한 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분은 김종섭씨라는 분이다. 그분이 길선주에게 전도하므로 한국교회의 부흥의 불이 붙었던 것이다. 김종섭 없이 길선주도 없는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 교육의 선구자인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 주일학교 교사였던 월트라는 분을 잊지 못한다고 그의 책에 적고 있다. 월트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으나 어린이들을 사랑한 교사였다. 자신이 전도한 13명의 어린이 중에 9명이 결손 가정 아이들이었는데 그중에 11명을 목회자와 전임 사역자로 키워냈다. 월트라는 교사가 없었다면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큰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려 있는 것이다. 


4. 빌립을 부르신 예수님 -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빌립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은 럭키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시다가 빌립을 만나신 것이다. 빌립은 갈릴리 호수 북쪽 벳새다에 사는 사람인데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자 마자 말씀하셨다. ‘나를 좇으라!’ 그 다음에 뒷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그는 매우 순종적인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소개자, 인도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지만 빌립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초대를 받은 행운의 사람이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부모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구,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만남 중에 최고의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최고의 만남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영원에까지 이르는 복된 만남이기에 그렇다. 이것이 우리 삶에 항상 감사의 조건이 된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그의 친구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 나선다. 


5. 빌립의 전도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지적인 사람이었다. 구약 성경에 조예가 있었다. 그래서 빌립은 성경에 예언되었던 사람을 만났다고 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다나엘에서 나온 반응은 냉담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어?’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지금까지 변변한 선지자 한 사람 난 적이 없는 동네인데 어찌 그 동네에서 메시야가 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식적인 면에서 부족한 빌립은 포기하지 않았다. 앉아서 따지지 말고 ‘와 보라’고 전했다. 

나다나엘은 친구의 권유를 듣고 따라 나섰다. 믿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갔던 것이다. 예수님은 만난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복음을 체계적으로 잘 전달할 능력이 없으면 빌립식 전도방법이 효과적이다. “와 봐!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반대하고 비난하지 말고 와서 보고 난 후에 말해!”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와 보라!’라고 초청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기독교의 기원과 초기 발전 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그 시작이 예수님 한 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점점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때때로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신 것 같은 직접적인 초청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께로 나오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여기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교훈이 들어있다. 
예수님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달려 갔고, 요한 역시 야곱에게로 달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렇게 증거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어! 내가 메시야를 만났어!” 그들의 심장의 피는 뜨거웠고,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들이 만난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왜 그렇게 소극적일까요?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천년 전에 요한과 안드레가 만난 예수, 빌립과 나다나엘이 만난 예수와 오늘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는 다른가요? 예수를 정말 만난 사람들은 나다나엘 처럼 고백할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의 능력이며, 기쁨이자 소망이 되신다. 
그 주님을 우리가 입술을 열어 증거하기를 예수님께서는 바라신다. 의인 99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 

6월 29일은, 우리의 구원자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멸망의 길을 향하여 분주히 걸어가고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초청의 날이다. 나는 이 날의 행사를 ‘왕의 위대한 초청’이라 부르고 싶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의 형제들, 가족들, 친구들에게 먼저 달려 갔다. 억지로 하지도 않았다. 달려가서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보라!

1) 대상자를 작정하고 성경책에 기록하라.
2) 남은 기간 동안 하루에 한 번식 기도해보라
3) 전도책자와 주보와 도움이 될 경건서적을 전달하라.
4)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친절을 베풀라.
5) 초청장을 보내고, 당일은 찾아가서 함께 가자고 권해보라. 그리고 데리고 오라. 그들 생애 최고의 만남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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