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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명령 (마 28:16~20) -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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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령 (마 28:16~20)


I. 갈릴리에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최후의 명령입니다. 흔히 지상명령 혹은 위대한 명령이라고 합니다.(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4복음 가운데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을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마태복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론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 말씀을 앞으로 가져와서 그 안경을 가지고 마태복음을 꾸준히 연구해 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의 결론입니다. 

16절 본문에 의하면 이 위대한 명령은 11제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열한제자” 이 말은 제자 마태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하는 말입니다. 열두제자 공동체의 가슴을 찌르는 고백적인 기록입니다. 언제나 지금까지 마태는 12제자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유독 12제자가 11제자로 바뀌어 집니다. 배신자 가롯 유다는 목매달아 죽고 제자 공동체를 떠나게 된 것이지요. 가롯 유다가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명령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위대한 명령이 주어진 장소를 “갈릴리”라고 마태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기독교 역사에서 예루살렘은 얼마나 중요한 장소입니까? 대부분 복음의 역사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 = 예루살렘 주변에서 있었습니다. 이곳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이곳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이 위대한 명령만큼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선포되어졌을까요? 이 장소를 구태여 밝혀야 했던 마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마태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이방 땅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4:15에 보면 “이방의 길릴리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로마로부터 착취당하고 억압받던 예수의 백성들이 사는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유대의 거짓 종교로부터 기만당하고 살던 그 민중이 있는 곳, 그곳이 갈릴리였습니다. 마태의 모든 관심은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민족은 모든 이방민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이 갈릴리에서 선포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자신의 교회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아가는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 마태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II. 위대한 명령

초대교회는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의 영광을 잃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을 교회로 문을 열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가정으로 초대하여 목장을 만들어 가는 것 바로 셀교회의 비전이 초대교회에는 있었습니다. 독수리가 두 날개로 비상하는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셀을 열고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중한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교회도 존재하고 성도들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평생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연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균형잡힌 교회, 예배와 친교와 선교와 전도와 봉사와 교제가 잘 균형이 잡혀 있을 때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그의 글에서 건강한 교회는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의 초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존재에 초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잃어버린 영혼을 건지려하는 열정, 전도에 대한 시스템, 비전이 살아 숨쉴 때에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은 세상의 종말의 때가 궁금하여 주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7-8)

엉뚱한데 호기심 갖지 말고 위대한 명령 - 복음전도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적인 컨설턴터 피터 드라커가 세계 교회를 향하여 충언의 말을 남겼습니다. “너무 많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려 하지 말고 올바른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해야 될 바른 일, 올바른 일이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우리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 그것은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50번에 걸쳐 마태복음을 공부해 왔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 이르러서 그 결론을 마태는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19절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그러므로”가 무슨 뜻일까요? 앞에 보면 먼저 소결론으로 이 본문을 본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가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을 큰 결론, 대결론으로 해석한다면 28장에 걸친 마태의 모든 기록을 다 묶고 묶어서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28:19-20)

이 말씀의 주동사는 “제자를 삼아라”는 말씀입니다. 보조동사 세 개가 나타나는데 가라, 세례를 베풀어라, 가르쳐 지켜 행하게 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복음이 내 영을 가르쳐서 제자로 삼는 것을 복음 전도 이것을 위대한 명령, 위대한 사명 - 지상 명령이라 부릅니다. 


III. 복음전도가 지상명령인 이유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게 복음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가족을 세워가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할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을 이 도시 구석구석 전세계 열방 모든 곳에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너희가 이 사역, 이 사명을 완성해 주길 바란다.”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마지막날 하나님과 천사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태어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우리의 가족으로 삼는 일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내 자녀들에게 맡길 것이다. 저들이 구원받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할 것이다.” 또 천사가 묻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다른 계획이 뭐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No, Plan! 다른 계획은 없다. 이 일은 가장 소중한 일이요, 가장 소중한 복이기에 오직 소중한 내 자녀들에게만 맡긴다!”

2.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만큼 신뢰하십니다.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들이 멸망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죽음에 대한 피 값을 네게 물을 것이다”(겔3:18)

만일 내 친구가 에이즈나 암으로 죽어갈 때 내가 그 치료법을 알고 있다면 마땅히 그 정보를 알려 주어야겠지요. 그 치료법을 숨기거나, 무관심하고 게을러 치료책을 알려주지 않아 내 친구가 죽었다면 그건 무서운 범죄가 될 것입니다.

보십시요. 우리는 이보다 더 엄청난 영원한 생명,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내 이웃, 내 친구, 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여기에 전도의 단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소식을 전할 때 우선 내 가족, 내 친구들에게 먼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이 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 마을, 도시에서 이 명령을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여기가 내 유대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땅끝까지 이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긴급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행복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소식이 나를 통해 죽은 영혼들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은 정말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기쁨입니다.

3.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세 번째 이유는,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여러 목적 가운데 천국에 가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긴급한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이 땅에서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일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만약 여기서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일입니까?

셀교회의 아버지 랄프 네이버가 들려주신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간호사였는데, 아내를 통해 한 의사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랄프는 이 사람을 어떻게 주님께 인도할까 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성경책을 사서 생일날 주면서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해야지.’ 그래서 성경책을 사서 책장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마침 아내가 임신을 했고, 해산할 때 그 의사와 랄프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의사와 야구경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께서 랄프의 마음에 영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 야구 이야기가 안 끝났기에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랄프는 빌리 그래함전도 집회를 위해 영국에 갔다 3주후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침대에서 그의 아내가 울고 있었고 많이 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여보 왜 우는 거야.” “그 의사가 죽었어요.” “아직 나이가 어린데. 어쩌다가?” 그가 수상스키를 타러 갔다가 떨어졌는데 다른 보트가 그 사람을 지나가서 몸이 잘라져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랄프의 책장에는 성경책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장례를 랄프가 집례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 집에 가서 가정부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랄프, 그 의사는 당신을 존경했어요.” 그가 말하기를 “그가 당신과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날밤 성령께서 내가 이미 저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았으니 말하라 했는데 그는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랄프는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 가운데 하나로 들려주며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4.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네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영원히 남게 됩니다. 때문에 내 이웃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명보다 서둘러 감당해야 할 어떤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나면 이 사명을 수행할 시간 하루가 줄어든 것입니다. 일년을 살고 나면 일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당신이 주께 돌아오도록 도왔다면 그와 더불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한 청년이 아침 산책으로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보니까 어떤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모래 위에 있는 불가사리(물고기)들을 주워서 바다에 던져 넣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청년은 걸음을 뛰듯이 하여 그 어르신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은 “조금 있다가 해가 뜨겁게 떠 비치게 되면 모래위에 남아있는 불가사리(물고기)들이 죽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다에 던져 넣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합니다. “할아버지, 이 넓은 바다에 던져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효과가 있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때 그 노인은 손에 들고 있는 불가사리를 바라보다가 바다로 던지면서 하는 말이 “그런데 바로 이 내 손에 들려있는 불가사리에게는 큰 차이가 되지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바닷가의 불가사리를 한 노인이 다 살려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의 손에 들려진 불가사리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영혼을 다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몇 가지 작은 선행을 하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렇게 큰 변화가 없을지 모릅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뭔가 살아있음을 증거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 손에 맡겨진 영혼,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메시지를 기억하십니까?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몸부림이 있다면 “한 영혼이라도 더”, “한 영혼이라도 더”가 아니겠습니까?


IV.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도 바울은 “괴로움을 기뻐한다” 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고난도 기쁨이요 손해도 기쁨이요 순교도 기쁨이요 죽음도 기쁨이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입니까?

이 짧은 구절의 말씀은 함축적이면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예수님께 무슨 남은 고난이 있는가? 이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다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은 고난이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이 고난의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전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위대한 기쁨은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감당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전도자들에게 있어서 전도는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전도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비유하여 남은 고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이 완전한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었듯이 남은 고난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되었듯이 남은 고난의 분량은 예수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고 이 세상에 주님의 제자된 길을 걸어가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버금가는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둥에 두 손목이 묶인 채 매를 맞으셨습니다. 이 채찍으로 한번씩 내려칠 때마다 예수님의 등에는 검푸른 채찍 자국과 함께 뼈 조각 끝에 찢겨 피가 쏟아져 나오고 흐물거리는 살점이 묻어 나왔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참아내야 될 때가 있는 것이지요. 내가 찟어지는 고통을 겪고 나를 짤라내는 아픔을 겪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60kg이나 되는 십자가 기둥을 어깨에 매고 600m의 험악한 골고다 언덕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넘어지며 올라갑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된 바람직한 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때로 그것이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짐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당한 그 영광은 하나님 나라 상급은 얼마나 엄청나길래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을 같이 대칭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발가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온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요 수치이지요. 여인들이 바라볼때 로마군인들이 침을 뱉고 수염을 뽑을 때에 나그네들이 조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될 부끄러움과 수치와 창피를 홀로 감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우리도 수치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발가벗기움을 당해 보셨나요? 침 뱉음을 당해 보셨나요? 내가 복음을 전하다 부끄러움을 당할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할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것임이라.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다가 죽어야 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던 어느날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길을 간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순교를 요청받아야 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오늘 예배 참석한 가운데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올 수 있다면 오늘 이 예배는 복되고 영광스런 예배일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주님을 배신하지 마시고 당당히 순교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영광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회가 있는대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내 주변에 맡겨진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십시오. 내가 가진 시간과 은사와 물질과 삶의 자원으로 그들을 섬기십시오. 예배에 초대하십시오. 목장에 그들을 초대하십시오. 알파코스에 그들을 초대하십시오. 한번 그들을 초청한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자리가 유언을 하는 자리라면 여러분은 어떤 유언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에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겨야 한다면 어떤 말씀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요청합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일이 남아 있다. 그것 하고 내게 오너라 말씀하신다면 무엇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서시고 싶으십니까? 

독일 어느 병원에서 설암으로 혀를 짤라야 되는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수술 준비를 마치고 집도하던 의사가 녹음기 한 대를 준비하고 그 환우 앞에서 얘기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우리가 혀를 짤라야 하는 순간입니다. 글로써 당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겠지만 말로 이 땅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남겨주세요.”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더니 단 두 마디를 남겼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여러분 모두 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가 말하지 못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죠지 스위팅 박사는 “한 사람이 이 땅에 1천년을 살면서 한 사람을 전도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그것 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영국 글래스고우의 유명한 설교가 존 하퍼 목사가 무디 기념교회 초청으로 타이타익호를 승선 미국을 향해 가던 중 배가 그만 빙산과 충돌해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바닷물에 떨어진 하퍼목사는 구명대 없이 헤엄치던 중 다른 쪽에서 널빤지 조각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지요. 하퍼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러자 그 젊은이는 “아뇨”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파도가 치는 바람에 하퍼는 힘에 겨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떠올랐습니다. 몇 분 후 다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하퍼는 그 청년을 향해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했습니까?” “아니오. 아직 안했습니다.” 이때 다시 큰 파도가 와서 하퍼를 삼겼고 젊은이는 구조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얼마 후 한 젊은이가 뉴욕에서 열린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해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존 하퍼에 의해 마지막으로 전도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외치던 그 말이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을 때, 우리 혀로 마지막 하고 죽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 아들아, 딸아, 참으로 장하구나. 생명이 꺼져 가는 그 마지막 순간에 너는 네 혀로 나를 원망하지도 않고, 왜 이렇게 죽어야 하냐고 묻지도 않더구나.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를 전하는 너의 그 행동이 나를 영화롭게 했구나!” 우리가 죽어 없어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중요한 것 -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퍼는 죽었지만 복음을 전해들은 청년은 살아남아 또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복음은 남아 생동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땅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해라. 오늘 이 순간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순간, 유언을 남겨야 되는 순간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말을 이 땅에 남기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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