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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굳건하게 지키라 (살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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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건하게 지키라 (살후 2:13~17)


인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귀국하여 선교보고를 합니다. 선교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그때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인도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제가 인도에서 사업을 수년간 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대답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혹시 선생님은 인도에서 호랑이를 보셨습니까?” 
“그럼요. 제가 호랑이 사냥을 좋아하여 저의 집에도 호랑이 가죽이 있습니다.” 

이 말은 들은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호랑이를 보기도 하고 잡기도 하셨다고 하지만 저는 인도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호랑이를 한 마리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것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보는 것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보며 살아갑니까? 불평하는 눈으로 보면 불평으로 가득 찬 세상만 보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눈으로 보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행복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도 먼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싱글벙글하면서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항상 찡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합니다. 이래서 짜증스럽고 저래서 짜증스럽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마치 피곤하다고 해서 늘어지기 시작하면 더 힘을 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모두가 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염려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세상 어느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왜 이 모양으로 살아가야 하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지금 나의 삶은 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기만 하다고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살길이 보이지를 않는다고 하면서 탄식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를 권면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가 뭐라고 권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맨 처음부터 여러분이 구원 받도록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과 진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여러분은 구원 받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여러분이 구원 받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 맨 처음부터 구원받도록 선택해 놓으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택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가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런 죽음의 자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 받도록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선택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과 진리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비록 지금 안티 기독교가 기승을 부린다고 해도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죽을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는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비록 우리 몸이 아프다고 해도 여전히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잘 난 것도 하나도 없는데 무엇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영광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아침 안개와 같은 영광이 아니라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던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추하고 더러웠던 여인이 가장 존귀한 여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던 여인입니다. 아니 이 여인만 보면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면 모두가 존경하는 그런 여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죽하면 악한 마귀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라고까지 말을 만들어내겠습니까? 가장 기가 막힌 일이 요셉이라는 청소년에게 벌어졌습니다.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그가 인신 매매 범에 의해 노예로 팔린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인신 매매 범이 다름 아닌 자기의 배다른 형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던 그가 외국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어떻게 그 삶을 바꾸셨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처음에는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잠시는 노예로 팔려갔던 집에서 그래도 청지기가 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마님에 의해 다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대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감옥의 죄수가 하루아침에 국무총리로 발탁이 되더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요셉은 슬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소망과 영원한 위로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도록 복의 통로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많은 사람이 복을 받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뿐입니다. 그래서 선한 소망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소망이 믿음 안에서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감사하는 가운데 선한 소망을 품어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굳게 서서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해야 합니다. 
수만 번 들어도 기분 좋은 말들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를 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걱정이 줄어들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용기를 잃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조건 없이 ‘용서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감격하거든요. 그러면 당신도 용서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또렷하게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름다워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환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소곤거리세요. 그러면 당신도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랑해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하셔야 해요. 그러면 당신도 사랑을 받게 될 테니까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런 사랑과 위로의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하는 말에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말이 우리 입을 통해서 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은혜로운 말이 우리 입을 통해서 들려져야 하고 믿음의 말이 우리 입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들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겠다 힘들다 하면 죽을 일이 힘든 일밖에 우리에게 없지만 신난다 좋다고 하면 신나고 좋은 일만이 가득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이 벅찰 정도로 많다고 하면 나를 이렇게 능력 있는 자로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일이 너무 없다 싶으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잠시 쉬게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 몸도 마음도 다 편해지고 더 건강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에 따라 아름답게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말만 하고 그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선한 일에 힘이 되어 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즐겁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조금 힘들어도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조금 더 편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위해서 내 목숨까지 주기 위해서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역시 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하고 베푸는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는 자가 복되다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잠언 19장 17절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주는 자가 될 때 누가복음 6장 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아 주시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100배 60배 30배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따라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하게 사십시오. 

특별히 나만 잘 되면 된다고 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내가 아닌 우리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데 그 하나 됨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 그 중심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함께 섬기며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셔서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4절에서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용서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하나 됨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선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또한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백성들 다 되심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때 우리는 능히 베풀며 섬기는 자요 이를 우리의 입술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친히 갚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풍족히 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는 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것 곧 내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 어느 것보다도 선한 일이란 곧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하는 것도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도 역시 단지 그 사람에게 육신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을 넘어 그 사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주위에 있는 죽어가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기도하며 그들에게 가서 필요한 것으로 돕고 섬기며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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