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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신앙 (계 1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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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신앙 (계 14:13 )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1993년도부터 6월 둘째주일을 '순교자기념주일'로 지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 그 배후에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뿌려져 거름 역할을 했음을 기억하고 그 위대한 순교신앙을 기념하고 발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은 세계기독교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기적적인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유례없는 부흥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부흥과 발전에는 순교자의, 피가 흘러 넘쳤기 때문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순교의 피는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순교신앙과 순교영성의 터 위에 세워지고 부흥발전해 온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순교신앙, 순교영성이란 말들이 어색하고 낮설게 느껴지는 시대 가운데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평안과 편리와 안락과 온갖 복지와 혜택으로 가득한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도 참을 수가 없는 정신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위기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국기독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개독교'라고 폄하하는 사람들까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터넷 포탈싸이트의 검색어 중에 이 용어가 검색금지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는다고 막아지는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것이 이런 위기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빠지고, 주님의 마음이 빠지고 아무리 성장이 되면 무엇 합니까? 그것은 결국 위기를 자초할 뿐인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더 위험한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근본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이 더 이상 주류복음으로 교회 안에서 활개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정조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100년전 이 민족의 극한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순교 신앙만이 바알과 아세라의 혼합인 기복 신앙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신앙만이 세상 정치와 물질과 짝한 오늘의 한국교회의 병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개교회주의와 이기주의 신앙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고칠 수 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목사님께서는 복음 때문에 감방에서 끌려가서 감방속에서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독방에 갖혀서 그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고적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 하니 내 식구가 되었구나 
  괴로움 중에 내 주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이로다.
죄악으로 얼룩진 육체의 껍질을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단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번 돌아오지 못한 세상의 고난의 맛을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영화 뒤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의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서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라고 썼습니다. 
  이런 순교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순교자'라는 말은 '증인'(martus)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자'란 의미는 법정 증인석에 앉아서 어떤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이란 뜻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교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교자가 죽음으로써 증거하고자 한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소문이나 확신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교리도 의식도 전통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조금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증거한 것은 역사적 예수, 실재하신 예수를 증언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고백은 개인의 내적 신념에 그치지만 기독교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눅24:48)란 말의 '증인'이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교 행위를 뜻합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것에 대한 "기록"(눅24:46-47)과 신앙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수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5:3; 8: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의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체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신앙인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일에 순교신앙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들면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죽은 순교자'와 '살아있는 순교자'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박해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과  수난을 당하고 죽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을 잃은 자와 생명을 잃지 않은 자를 동등하게 대합니다. '순교'는 죽음을 절대조건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자답게 항거하면서 신앙을 지킨 사람도 '순교자'로 간주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에서 12장 1절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째로, 오늘날 순교신앙은 어떤 형태로 표현, 실천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안에서는 우상숭배를 강요는 권력도, 십자가의 도리나 신조를 수호하기 위한 순교를 요구하는 물리적인 세력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어쩌면 더 강하고 무서운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악한 마귀사단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믿는 자의 신앙을 무너지게 하려고 힘쓰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상과 우상숭배의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우상숭배란 한 분 하나님을 거슬려 또 다른 예배의 대상을 모시고 그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우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자신을 경배하는 일이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를 우리 스스로에게 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자랑은 우상이다"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자기자랑, 학벌자랑, 영력자랑, 지식자랑, 돈자랑, 자식자랑은 현대판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력합니다. 로마제국이나 일제의 강압 보다 더 무서운 우상들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상들은 사회나 역사에서 가면을 쓰거나 변장하고서 아주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라면 순교신앙으로 투쟁해야 할 원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갖가지 우상의 베일을 벗기고 그것을 대항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대교회의 순교자들과 일제말기의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이 같은 우상들에 항거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신앙의 포현입니다. 

   오늘의 순교자 개념은 능동적입니다. 수동적인 개념에서 능동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전적인 순교자는 수동적 저항의 특징을 지닌 반면에 현대 개념의 순교자는 능동적 참여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전에 순교자는 누가 죽여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이며, 누가 고난을 던져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누가 죽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가 날마다 사는 것이 순교신앙입니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4:11)하셨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벼루 열 개가 구멍이 뚫어지고 붓 천 자루가 몽당 붓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경전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추사의 글과 그림이 귀한 것이 된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1년에 두 번 약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홀로 치열하게 수도'하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절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수행을 하는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수련해 가는 과정이 옆에서 보는 이를 숙연케 합니다. 

  어찌 기독교 신앙을 이런 것과 견줄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들이 얻는 것의 가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저들보다 더 주님을 위하여 용맹정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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