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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갈 1:11 ~ 갈 2:10) -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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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갈 1:11 ~ 갈 2:10) 
 
다른 복음은 없으며 자신이 전한 복음과 다른 어떤 것을 전파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전파했던 복음의 기원을 밝힙니다. 그의 사도권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전한 복음 역시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려고 여러 사상들을 조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통해 전수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았습니다. 복음은 자신의 깨달음이나 내적 확신에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만일 복음이 하나의 사상에서 출발했다면 사람들의 뜻을 따라 수정 보완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전수 받거나 배우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과 관련된 어떤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그분이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심하기 전 유대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행 26:5)를 좇아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물이었고, 그런 인물을 받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13)하였을 뿐만 아니라 멸절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14)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심전의 바울은 전심으로 기독교인과 기독교회를 혐오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바울의 회심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회심의 순간을 떠올리면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15-16a)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그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택정하심의 결과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회의를 느껴 심리적으로 갈등하다가 견해를 바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유대교에 집착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물로 여겼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영접했습니다. 그것은 바울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기독교적 회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발생합니다. 회심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해 두셨다가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분의 은혜가 역사하면 사람이 기적처럼 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경을 신화로 여기던 사람이 진리의 말씀으로 여깁니다. 예수를 욕하던 사람이 그분을 소리 높여 찬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아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정녀 탄생에 대한 증언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배척하던 자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이 사람의 뜻에 따른 자신의 결심이 아니었고, 사람의 가르침에 설득 당한 것도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울은 회심 후에도 오직 하나님께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16b). 그 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17a). 회심 후 그는 먼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고(17b), 3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게바와 야고보를 만나긴 했으나 보름 동안뿐이었습니다(18-19).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사도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배울 만한 여건도 되지 않았음을 “하나님 앞에서”(20) 거짓 없이 고백합니다. 

그 후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갔고(21), 14년 후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기까지(2:1), 바울은 독자적으로 이방인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에 있는 교회들은 바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그토록 열심히 없애려고 했던 “그 믿음” 곧 복음을 전파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었습니다(22-24). 바울은 회심 후 자신의 사도로서의 활동이 조금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 의존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언합니다. 그의 사도직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부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복음도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수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인준해주기 이전부터 이미 사도로서 사역하고 있었으며, 그가 전파한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계시해주셨다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과 전혀 의논한 적이 없이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만일 그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과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과 일치했습니다. 둘 다 동일하게 신적 기원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복음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비방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전파해왔던 복음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2장 전반부에 걸쳐 증언합니다. 

2장 1절의 “십사 년 후”가 회심 후인지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후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또 이때의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인지 그 회의보다 앞서 있었던 방문인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적어도 14년 동안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과는 무관하게 복음을 전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계시”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은 그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 곧,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제출하고 “유명한 자들” 곧,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9)에게는 개인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비방이 거짓됨을 밝혀서 그 동안 바울이 적어도 14년 동안 달음질해온 것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2).

이 때 바울은 헬라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디도를 함께 데리고 올라갔었는데, 디도는 할례를 받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3). 당시 교회에 침투한 거짓 형제들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빼앗아 율법에 속박된 노예로 삼고자 했습니다(4). 하지만 바울은 한 때의 편의를 위해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여 참 신자들이 언제나 그 진리와 함께 있게 하려함이었습니다(5). 결국 예루살렘 사도들은 아무리 높임을 받는 유명한 자들이든 어떻든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습니다(6). 바울의 권위를 보충해 준 것도 없었고 바울이 전파한 복음에 덧붙인 것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전파해온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 앞에서도 그대로 고수되었습니다. 빼거나 수정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그 자체로서 완전했으며 충분했습니다.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채 참 성도로 받아들여졌고 바울이 전파한 복음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이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신 분이 바울에게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사도직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바울 일행은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람에게로 가기로 했습니다(7-9, 표준새번역).

9절에 있는 “교제의 악수”라는 표현을 헬라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그들이 교제의 오른손들을 주었다”가 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교환하는 것이 보통 대등한 두 당사자 간에 ‘협정’이나 ‘조약’을 맺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즉, 그들이 나눈 악수의 의미는 바울의 사도권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사도권이 동등하다는 의미였으며, 바울이 전파한 복음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이 동등하다는 의미였습니다. 

흔히 설명을 위해서 ‘바울의 복음’ 혹은 ‘베드로의 복음’ 혹은 ‘요한의 복음’이라고 쓰긴 합니다만, 저마다 다른 복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을 사용하실 때 그들의 개성과 능력을 그대로 활용하시기 때문에 각 사람이 전파하는 복음은 문체나 전파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을 수 있고 강조점의 차이 또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복음은 하나입니다. 바울이 전파해왔던 복음이나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파해왔던 복음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 동일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원칙은 모든 사도들이 완전히 동의한 사항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원칙이 그대로 보존되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설득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되게 할 수는 있을 지라도 참 성도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훈련으로도 거짓 형제를 참 형제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로 만들기 위해 심리학적인 기법들과 기업의 마케이팅 전략들이 필요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성도가 되기 위해 할례도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현대판입니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복음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왜곡하는 거짓 가르침들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이 이구동성으로 전해준 신적 기원을 가진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며 오직 은혜만으로 충분하다고 확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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