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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문지방에서 흐른 생명수 (요 7:37~39; 겔 47:1~12) - 보혈,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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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문지방에서 흐른 생명수 (요 7:37~39; 겔 47:1~12) 
 
우리는 치열한 경쟁 사회 안에 삽니다. 학생들은 밤 11시, 12시까지 성적을 올리려고 학원으로 갑니다. 경쟁에서 쳐지면 상실감과 패배감과 열등감에 휩싸입니다. 그렇다고 터놓고 고민을 나눌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으니,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물가 인상으로 서민의 생활은 더 어려워집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집단들로 인해 국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울해 하며 상실감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잔칫집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쁨과 흥겨움과 설레임과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요지: "나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성령의 생수를 맛보며 에덴에 사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바벨론제국에 포로에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예언합니다. 겔 41장에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재건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성전이 우뚝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무언가 생동감 있는 운동력과 역동성이 느껴집니다. 성전 제단 아래로부터 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가나안에 임하는 복의 근원입니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봅니다 (1절). 왜 성전에서 물이 흘러내립니까? 출 30:17절 이하에 의하면, 성막의 제사장의 뜰에는 '물두멍'이 있어 제사장이 씻을 수 있었습니다. 왕상 7:23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 성전에는 성소의 대야보다 훨씬 큰 '놋 바다'가 있었습니다. 놋 바다라는 이름 자체가 암시하듯이, 풍성한 물이 생명을 새롭게 할 것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막의 물두멍이, 성전의 놋 바다로, 이제 에스겔서에서는 생수의 강으로 확대-발전됩니다. 

성전의 놋 바다가 제단 남쪽에 있었듯이, 에스겔서의 생명의 강도 제단 남쪽에서 흐릅니다. 구약에서 물이 흐르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풍성히 임하는 것을 뜻합니다. 

"강이 있어 그 줄기들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기쁘게 하는구나" (시 46:4). "

그 날에는 산들이 포도주를 흘리고, 언덕들은 젖을 흘릴 것이다. 유다의 모든 계곡에 물리 흐를 것이며, 여호와의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와 싯딤골짜기에 물을 공급할 것이다" (욜 3:18). 

"그 날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서, 절반은 동쪽 바다로, 절반은 서쪽 바다로 흐를 것이니 여름과 겨울에도 그렇게 흐를 것이다" (슥 14:8). 

에스겔서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은 창세기의 에덴동산을 비옥하게 만든 4개의 강을 연상시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이 성전에서 흘러내린 생수의 강으로 치료되어, 에덴동산이 회복됩니다. 사해 근처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것이 역전됩니다. 

바벨론포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회복의 메시지를 듣고는 큰 감격에 잠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저주 받아 황무한 땅을 에덴동산으로 회복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출바벨론한 사람입니다. 요 4:10-14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수의 근원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생수의 강 즉 성령님이 우리 배에서 끊이지 않고 솟아나리라고 약속하셨다 (요 7).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풍성하도록 오늘도 성령님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치료받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천사가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1000규빗 (500m)을 척량하고 에스겔로 하여금 건너가게 하니 발목까지 찹니다 (3절). 다시 1000규빗을 척량하니 무릎에, 그 다음 일천 척을 척량하니 허리에까지 찹니다 (4절). 다시 1000규빗을 척량하니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헤엄칠 정도가 됩니다 (5절). 문지방의 물이 거대한 강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 회복의 역사가 확장됩니다. 대대 물이 흐르면 지류에서는 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이 본 거대한 신상을 깨뜨린 뜨인 돌이 결국은 태산을 이루고 온 땅에 가득했던 것처럼 생명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단 2:35). 

에스겔이 강둑으로 돌아가 보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7절).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소성하고, 낙원의 동산으로 변모됩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사해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습니다 (8절). 지형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부터의 강수는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사해로 흐르게 됩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사해가 소성하고 이 강이 이르는 모든 곳이 살게 됩니다 (9절). 사해는 일반 바다보다 염분이 5배나 높아서 생물이 살지 못하지만 이제 생명의 보고가 됩니다.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 (사해 서쪽 해안 근처)에서 에네글라임 (사해의 북서쪽 구석)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아집니다 (10절).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됩니다 (12절). 

여호와께서 광야에 백향목과 아카시아나무와 화석류와 올리브 나무를 심을 것이며, 사막에 잣나무와 소나무와 화양목을 함께 두실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사 41:19). 

계 22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 성인 우리 안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매 달 12과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생수의 강이신 성령님을 만남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상한 감정, 상처, 질병, 술과 세상에 중독된 것, 죄악된 생활과 거짓과 교만과 탐욕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치료 받아야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치료를 경험해야 세상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작은 섬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실 줄 믿고,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야 합니다. 

이 환상에 보면, 생명수 강이 작게 시작해서 기적적으로 커집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성장하게 됩니다. 마침내 마실 수 없는 염해-사해를 생명의 바다로 바꿉니다. 에덴동산 수준의 풍성함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시 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입니다 (11절). 소금이 개펄에 있는 것은 언약이 변하지 않는다는 보증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넣아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생수를 마신 자들로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 생명을 자유 가운데 누려야 합니다. 목마른 세상의 갈증을 해결할 곳은 오직 교회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수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찾아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섬김과 사역이 미비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더라도 낙심치 말고 큰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소망합시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하루에 3000명이 돌아온 것만 생각하지 맙시다. 그러나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게 될 날을 기대합시다 (눅 13:29). 우리의 임무는 삶의 중심을 우리의 성전 되시는 예수님에게 두면서 신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꾸준하게 섬깁시다. 

요 7:37-39절의 배경은 초막절입니다. 레 23장에 초막절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살던 집을 떠나 버드나무나 야자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7일 동안 살아야 합니다. 초막절 동안 7일 동안 초막에 사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초막에서 살면서 나그네 생활을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초막절이 되면 예루살렘과 성전 주위에는 수많은 초막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초막절기의 핵심은 매일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금 주전자를 든 제사장이 행진을 인도하는데, 사 12:3절을 노래하며 예루살렘성을 가로 질러 실로암 연못으로 갔습니다: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라."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은 후 무리들은 성전으로 돌아오는데, 제사장은 성전 번제단 위에 물을 붓고, 무리는 야자나무 가지를 흔들고 외칩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는 두 가지 예외적인 절차를 행합니다. 하나는, 무리가 실로암 연못에서 돌아올 때 제사장들은 번제단 주위를 7번 도는데, 이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킨 것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이 금 주전자를 높이 드는데, 마지막 날의 경우 주전자 안에는 물이 비어 있습니다. 이것은 광양에서 불순종하여 죽었던 이스라엘 세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야자나무 가지를 흔들고 외치지 않고 침묵 가운데 서 있습니다. 바로 이 침묵의 순간, 비어 있는 순간에 예수님이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를 것이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 무언가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 힘이 없어 무력한 순간,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 삶을 새롭게 하며 진정한 의미로 가득 채우시는 생수의 강이신 성령의 충만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으로 성령님을 잘 대접하시고 모셔 들입시오. 성령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십시오.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도 무의미와 무감동과 텅 빈 무엇을 여전히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내 빈 잔을 높이 드니 채우소서 라고 간구하기 바랍니다. 이 은혜와 복을 만끽하시고 전파합시다. 

에스겔 당시,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은 풍성한 회복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신약 성도는 더 큰 복을 받았는데, 신천지를 이미 맛보고, 그 속에서 열매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로 소성함을 얻어서, 흡족한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가서 치료시키고 생명력을 불어 넣읍시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에 초청된 우리는 세상에 나가 사람 낚는 어부로 삽시다. 더불어 본문은 영적인 면 뿐 아니라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지금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데, 자연 보호와 생태계 보호에 성도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법칙에 따라서 자연이 회복되는데, 에너지 소비를 절약하여 지구 온난화를 막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봅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이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 안에는 생수의 강, 성령이 흐릅니다. 이 강은 역동적으로 흘러 죽은 자를 살립니다. 비록 시작은 미비하나, 결국 강력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고 맙니다. 우리 인생에 진정한 의미로 채우시는 성령님을 깊이 알아갑시다. 성령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치료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삶에 열매를 주십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시고, 무시로 깨어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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