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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창 12:1~4, 고전 1:18~25, 마 10: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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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창 12:1~4, 고전 1:18~25, 마 10:38~39)


저는 여러 계기를 맞을 때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 계기란 뭐냐하면 혹시 어려운 분들 심방할 때, 또는 혹시 사람을 잃고 장례식을 할 때나 추모식을 할 때, 사람이 위기에 빠져서 서로 눈물을 흘릴 때, 
그 때 저는 생각나는 것이 지금 제가 하나님 앞에 서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고백이긴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 가면 목사가 제일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제일 좋은 사람은 지금 성가대처럼 하나님 앞에 가서 열심히 찬양 부르면 하나님도 아멘 할 것 아닙니까? 
좋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전시한다고 그림 갖다 드리면 하나님이 참 좋다고 아멘할 거 아닙니까? 
혹시 음식 잘 하시는 분들은 음식대접 하셔도 되고요, 발을 씻겨 주시면 더 좋으실 거고. 

그런데 저는 목사인데 하나님 앞에 가서 설교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동안만 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동안에도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좋을까, 
제가 그것이 고민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동안 제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분들은 하도 기억력이 좋으셔서 무슨 설교했는지 다 아시죠? 제발 좀 잊어버리시죠. 
다 오늘만 듣고 잊어버리시고 그래야 이 다음에 다시 하면, 아 그랬다더라, 하시고요, 
많이 잊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면서 제가 하나님한테 가면 
하나님, 그동안 제가 드렸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많이 잊으셨죠?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네가 있을 때 무슨 그것을 설교라고 했느냐? 지가 뭘 안다고, 조금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공부 조금 했다고, 명상 조금 했다고, 좋은 말 조금 골라서 썼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엔 뭐라고 평가할까? 제가 가끔 그런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두 달 쉬는 동안에 제가 고민 좀 많이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서 사도바울이 전한 고린도전서 이야기, 저한테 확 감동으로 들어왔습니다. 
내용은 뭐냐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해야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설교, 그런데 그 설교는 강단에 서 있는 사람의 설교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한 이야기, 어리석은 이야기.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었지만 죽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동네 방방곡곡을 다니고,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했던 이야기, 젊은 여성을 만나서 위로했던 이야기, 
나병 환자를 고쳐주고 천국 복음을 얘기했던 이 모든 이야기, 행실, 사건, 
이 모든 것이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결론 나는 걸 보면서 ‘어리석었다’. 예수는 어리석었다. 
십자가는 어리석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베푼다는 하나님은 진실로 능력이 없으시다.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면, 사도바울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 역사에 사상계, 정신계라고 하면 크게 서양에서는 두 쪽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히브리 문명, 구약성경 신약성경 유대인들 중심의 히브리 문명이 하나있고, 
또 하나는 이와 상관이 없는 약간 대립 경쟁 관계에 있는 헬라 문명권. 
사도바울은 양쪽 문명권을 섭렵한 사람입니다. 히브리 문화도 배웠고 헬라 문화도 배웠고, 공부도 많이 했고, 
자기가 보기에 사도바울의 당시 상황, 또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에서도, 
유대교를 중심한 히브리 문명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무능의 소치이다.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면 기적을 행해서 파워를 가지고 구원하면 되지, 악은 박멸하고 선은 살리고 그러면 되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죽냐?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에 찔리냐? 왜 하나님이 고소를 당하냐? 
바보같은 사람, 무능한 사람, 적어도 히브리 문명이 보는 십자가 사건은 무능입니다. 

인간의 무능! 
사도바울은요, 거기에 대해서 자기도 유대인의 한 사람, 유대교 문명을 공부한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무능력, 하나님의 무능력이 십자가를 보니까 무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힘, 
나는 그렇게 고백한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는 죽었으나 죽은 예수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부활, 
죽음을 눌러 일으킨 생명으로의 부활, 이것은 인간이 내놓을 없는 위대한 신의 능력, 
인간의 무능력은 신의 능력입니다. 

반론을 폅니다. 헬라 철학이나 헬라 문명이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바보같은 일이다. 어리석은 일이다. 죽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은 거지 왜 죽어야 하느냐? 
왜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헬라문명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반론을 폅니다. 
인간이 보기에 무식하고 무지하고 지혜가 없는 십자가 사건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가 담겨있다. 
인간의 지혜가 죽은 자를 못 살린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죽은 자를 살린다. 인간이 죽은 다음에 하늘이 산다. 하늘이 살 때 인간도 함께 하늘 속에 포함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 
사도바울이 말한 신앙고백적 선언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된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바로 이런 어리석고 무능한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진실이다. 우리 기독교는 이렇게 바보같은 종교입니다. 무능한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엉뚱한 이야기, 상상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 인생을 거꾸로 살아가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감동받고 구원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속에 담긴 인간의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저는 십자가를 보면서 저한테 십자가가 온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저 대신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너무도 사랑하니까. 왜 살려냈습니까?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십자가에 죽었다 살았다, 예수가 죽었다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너무 사랑해서 살려내셨다. 

사랑이 없는 십자가는 저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싶은 그 위대한 사랑이 
십자가에 달려있는데 그것을 객관화하고 객체화하는 사람 눈에는 바보같은 일, 어리석은 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요, 부모간에 애인간에 자식간에 한번 생각해 보시죠.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바보같이 삽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약게 살 수가 없습니다. 얌체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보면 바보같은데 왜 저렇게 살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서울에서 난리가 났죠. 촛불이 난립니다. 제가 촛불 이야기를 하기보다 촛불 속에 담긴 뜻이 뭘까? 
저는 설교말씀을 준비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촛불은 사랑을 원한다는 표시다. 정책 잘못 할 수 있고, 
잘못 결정할 수 있고, 그럴 수 있는데 지도자는 진실로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가식 말고요, 
진실로, 그리고 잘못했다고 해야 한다. 잘 한 건 칭찬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백성은 우리 사회는 진실로 사랑을 교통할 줄 알아야 한다. 
저는 뭘 느꼈느냐니까 이런 상황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 들어가 있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칠 수밖에 없다. 사랑을 회복합시다. 어느 시대가 되든지 간에 사랑합니다. 
거짓말하지 말고요, 사랑의 진실을 이야기합시다. 배고픈 사람에게 하나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배고픈 자의 심정이 되어 보는 것, 그것이 저는 진실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는 사랑이 필요하고요, 전혀 다른 상황 평양의 사랑이 어떤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곧 수백만이 굶어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촛불인데 지금 평양의 한 시장터에선 한 어머니가 작은 딸 하나를 데리고 너무 먹기 힘들고 풀칠하기 힘들어서 딸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판다고 하니까 딸이 난리가 났겠죠. 엄마 미쳤다, 병 걸렸다. 그래도 엄마는 딸을 팔아서 먹을 걸 줘야 합니다. 이 광경을 본 한 시인이 있는 그대로를 시로 엮었습니다. 
장본인은 장진성이라 이름하는 36살된 사람인데요, 
한 때 김정일 위원장한테 ‘나의 작가’라고 칭송도 받고 두 번이나 직접 알현도 했고, 잘 살다가 2004년 탈북해서 시집을 하나 냈는데, 그 시집 중에 한 구절이 이런 제목입니다. ‘내 딸을 100원에 팝니다’ 시장에서 본 그대로를 시로 썼습니다.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그는 초췌했다. 
내 딸을 100원에 팝니다 
그 종이를 목에 건 채 어린 딸을 옆에 세운 채, 
시장에 서 있던 그 여인, 
그는 벙어리였다. 팔리는 딸 애와 
팔고 있는 모성을 보며 
사람들이 던지는 저주에도 
땅바닥만 내려 보던 그 여인은 
그는 눈물도 없었다. 
제 엄마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고함치며 울음 터치며 
딸애가 치마폭에 안길 때도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던 그 여인은. 
그는 감사할 줄도 몰랐다. 
당신 딸이 아니라 
모성애를 산다며 
한 군인이 100원을 쥐어주자 
그 돈을 들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그 여인은. 
그는 어머니였다. 
딸을 판 100원으로 
밀가루 빵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와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용서해라”. 통곡하던 그 여인은 

어떻습니까? 물론 극적인 장면인데 지금 평양의 한 장면입니다. 
촛불 든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그래도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팔아서 한 점을 먹여주고 보내야 하는 어머니의 가슴은 누가 위로해줍니까? 
평양에 사랑은 어디 갔습니까? 지도자의 사랑은 어디 갔습니까? 백성들의 사랑은 어디 갔습니까? 
누가 도와줘야 합니까? 

무슨 명목으로도 그 아픈 가슴을 위로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오늘 예수께서 오신다면 인간의 능력, 체재의 능력, 군사력의 능력, 그것을 능력이라고 하느냐? 
나는 차라리 열린 가슴으로 이 딸을 끌어안고 내가 죽고 싶고, 내가 빵 한 조각 주고 싶다. 
인간의 무능, 인간의 무지함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무언가를 새롭게 살리려고 하는데,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쌓았던 예수님의 사랑은 그냥 신이 아니고요, 과시가 아니고요, 
철학이 아니고, 현자의 말이 아니고요, 
나는 굶는 사람 먹이고 싶다. 고통당한 사람 끌어 안고 싶다. 계산으로 하지 않는다. 나는 바보같이 하고 싶다. 

왜? 살려야 하니까요. 제가 팔려가야 할 딸이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죄된 인간이었다면 
제가 바랄게 뭡니까? 딸 좀 살려주십시오. 나한테 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감언이설 하지 말고, 
날 좀 붙들고 살려주세요. 생명의 말씀 하나 넣어 주십시오. 
십자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저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멀리 보고 산들 그것이 저한테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한테 뭐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설령 십자가 사건을 두고 부활 사건을 두고 뭐라고 규정하던 그런 하나님은 
저하고 상관없습니다. 
이제 공부 좀 해봐야죠. 유대교 역사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면, 
약속을 주시고 약속대로 일거수 일투족을 동행하는 분이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 그랬습니다. 

역사 한 번 보실래요?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성경에 보면 75세가 되었는데 
고향을 떠나라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보면 75세에 명령이 떨어졌고, 
99세가 되어서 아들 준다는 약속을 받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물론 낳기는 100세에 낳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이름을 바꾸게 했는데 그 이름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들을 주는데 그 아들을 낳을 때쯤 되면 네 이름은 한 가정의 아버지인 ‘아브람’이 아니라 
이삭을 낳거든 전 민족 모든 민족의 신앙의 아버지로 추앙받게끔 이름을 바꾸게 했는데 
그 이름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바꿔라. 

그런데 이 사람이 175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175세까지 산 사람이 75세면 중간쯤 되죠? 
우리 옛날 사람들은 오래 살았지만요, 지금 이게 우리 가슴에 다가오려면 아브라함의 나이를 딱 절반 줄입시다. 그럼 한 83세 사는 건데요, 그 정도 살지 않습니까? 
우리 나이로 줄여서 75세니까 38살쯤 된 우리보고 고향을 떠나라, 가족도 떠나라, 
내가 약속의 땅을 주마. 이민 간 사람 많잖아요. 새롭게 개척하려고. 이 정도 우리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게 아니고요, 하나님의 약속만 있으면 우리도 가능합니다.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50세에 아들 얻을 수 있지요. 
가능하지요? 175세에 죽었습니다. 84살에 죽으면 되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너무 100살 살았다, 이렇게 보시지 마시고 딱 잘라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더 중요합니다. 
떠나라, 비전을 가지고 떠나면 약속의 땅에서 내가 만복의 근원으로 만들어주마. 
그리고 이름 바꿔라. 아브람, 한 가정의 아버지에서 아브라함, 모든 백성의 아버지로. 
그리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 모든 백성의 하나님, 너희는 모든 백성은 나의 백성. 그 약속에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유대가 생겼고 이스라엘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라는 분이 등장하셔서 전혀 새로운 역사를 유대교에서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 없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유대교, 히브리에 엄청난 폭발입니다. 어떻게 작은 민족이 거대 민족의 구원자로 등장할 수 있습니까? 
아브람이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보면 유대땅에서 아브라함은 찾을 수가 없고, 
모든 것은 율법, 유대주의, 종족주의, 핏줄, 고향, 친척, 이것만 구원받는다고 아브라함을(조상을요) 아브람으로 다시 축소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민족 구원이 없죠.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새롭게 등장해야 한다. 
고향을 떠나라, 친척을 떠나라, 부모를 떠나라, 민족을 떠나라, 다 버리고 와야 나와 함께 십자가를 갖는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을 아브람으로 축소하지 마라. 고향을 사랑하라. 고향에 매이진 마라. 친척을 사랑해라. 친족주의에 빠지진 마라. 민족을 사랑해라. 민족주의의 함정 속엔 빠지지 마라. 교회를 사랑하라. 교권주의엔 빠지지 마라. 그렇게 빠지려면 작은 곳에서 교권주의자 되고, 민족주의자 되고, 친족주의자 되고, 이렇게 살면 되지, 온 백성을 구원하는 모든 백성의 지도자는 되지 않느니라. 사랑은요, 작은 데서 사랑이 있지만 주의, 체재를 벗어난 큰 사랑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에서 ‘함’자를 빼고 아브람으로 축소되면서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져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한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최근에 제가 글을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거대강국에 가장 힘 있는 종족이 누구냐, 유대사람들입디다. 인구는 5%밖에 안 되면서 정치 경제 금융 학문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는 달랐지만 50, 60, 70%까지 왔다갔다 합디다. 작은 민족이. 왜 그랬을까? 물론 유대백성이 잘 한 것도 있지만 아브람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하게 받아들였고, 감사함으로 받았고, 하나님은 동행해 주셨습니다. 시기 질투가 아니라 그것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없고 아브람으로 된 백성에게도 그만큼 축복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만 가지고 인간/인류구원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아브라‘함’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오셔서 이 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십자가를 진 적이 없지만 아브라함의 후예로 온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온 백성을 구원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향을 등지라는 말이 고향을 떠나라는 말이 아니라 고향이 중요하지만 고향에 매몰되지 말라. 같은 성씨가 중요하지만 씨족주의에 빠지지 마라. 그러면 졸개가 된다. 다시 아브람으로 축소하는 것이 된다. 오늘의 지도자는, 오늘의 우리 사고는 사랑 이래 넓은 깊은 훌륭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행복의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브람에게 준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고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 아직도 유대교가 다 얻지 못한 약속을 우리를 통해서 주시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유대주의에 빠지진 않지만 모자라는 부분, 더 큰 부분은 우리보고 맡아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하나님이 오늘 주시는 능력이요, 축복이라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면 진실로 우리는 십자가의 진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비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실로 사랑하고 내가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 비참한 게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헬라 신화 중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 인간의 죄값을 신이 대신 치렀다. 수많은 희랍 신중에 그런 신을 제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스스로 고통당하는 지혜가 아니고 지혜를 베푸는 지혜에 불과합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죽어서 생명을 준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지혜입니다. 이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줄 그렇게 믿습니다. 십자가의 진실 속에 우리는 모든 것을 묻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생명에 관한 원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위기를 이기고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함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는 희생적 사랑, 죽음을 이기고 부활에서 새 생명을 누리는 원대한 비전의 사랑, 이 두 사랑을 오늘 예수께서 나누자고 하십니다. 사랑합시다. 사랑을 품읍시다. 사랑하며 복되게 삽시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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