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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새워 고민할 일 (마 6:25~34) - 근심,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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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워 고민할 일 (마 6:25~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어느 회사에서 10년 근속한 사원에게 보너스로 2개월간 유급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그 사원은 한편 좋았지만 또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원이 깊이 생각한 후에 유급휴가를 포기하고 회사에 반납했습니다. 상사가 “왜 휴가가지 않고 반납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원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포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내가 없는 동안 회사 운영이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이고 
또 하나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회사가 제대로 잘 운영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산장사 소금장사 두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심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고 날이 좋으면 우산장사하는 아들이 걱정되는 어머니는 일 년 내내 걱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화 같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오든은 현대는 “불안해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리스터는 오늘을 “각종 염려로 목말라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래서 많이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불안해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은 말씀 중 말씀이고 교훈중의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가서 주옥같은 교훈을 주셨다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했고 너무 값진 교훈이라 해서 산상보훈이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5장 첫머리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그 복은 진정한 복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삶의 자세를 말씀하고 그 삶의 내용과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중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말씀하시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삶에 열중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물질과 함께 섬길 수가 없습니다. 물질에 열중하다 보면 하나님은 섬길 수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와 더 궁극적인 문제들이 많은데 그런 중요한 문제들은 생략하고 불필요한 일로 근심과 걱정한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사람들은 겉은 멀쩡한데 모두 속마음에는 별의 별 근심과 걱정들로 가득 쌓여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은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기인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다고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못하고 모든 짐을 내가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만드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 

본문은 “너희 염려로 키가 한자나 크나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 의복보다 마실 것 보다 입을 것 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즉 목숨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비유로 말씀 하시기를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다 하나님이 입하시고 먹이시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왜 걱정을 하느냐, 너희는 그들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냐, 들풀도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너희야 말하면 무엇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근심하고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심하고 염려해 보았자 별로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놓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질없는 근심과 염려들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히고 지장을 초래하고 우리의 신앙 내용이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손해가 많음 

사실 이 같은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은 참 무서운 생활입니다. 사람이 염려와 걱정이 깊으면 그 자체로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광우병만 뼈를 송송 구멍 내는 것이 아니고 염려와 근심도 뼈를 송송 구멍 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근심이 많을 때 밤을 순식간에 지새우게 합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골수와 진액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손해되는 일이 많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연구조사에 의하면 우리들이 하는 걱정내용은 80%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고 8% 만은 걱정할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8%까지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세상에는 이 염려와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하루 밤에 1억 명 이상이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을 잔다고 합니다. 종근당의 펜잘은 보통 한 달에 58만 통이 팔리는데 연말이 되면 60만 통이 팔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면 오늘 사람들이 약으로 살고 불면증에 시달리겠습니까. 그렇게 밤을 새워보아도 별로 되는 일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키를 한자나 크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과 염려는 이렇게 손해가 많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잠도 빼앗고 입맛도 빼앗고 재미도 즐거움도 삶의 윤기도 다 빼앗아 갑니다. 거기다 건강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심 과 걱정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아프게 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합니다. 육체의 병중 80%는 신경성에서 비롯된다고 (Dr W. C. Alvarez)합니다. 이 신경성 병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건강을 해칩니다. 몸에서 진액을 마르게 하고 얼굴에 생기를 잃게 하고 고사되게 만듭니다. 손해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많은 사람의 얼굴이 표가 납니다. 기미가 나타납니다. 삶에 생기가 없습니다. 참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근심과 걱정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병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인공심장기를 달고 다니는 분은 걱정과 불화한 마음을 며칠 동안 가졌는데 배터리가 급히 방전되어 위험을 당할 뻔 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이 근심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해 주는 사례입니다. 

 어느 장님이 산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굴러 떨어지다 구덩이로 뻗어가던 나무뿌리에 걸려 나무뿌리를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덩이가 얼마나 깊은지 발이 땅에 닿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어 매달린 채 고민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힘이 빠져 죽으면 죽자 하고 손을 놓으니까 땅 바닥이 10cm였습니다. 그 모습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며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우습고 한심한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이 지금 지켜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이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모두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이 소경의 신세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왜 걱정하느냐”고 한탄하십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밤새워 걱정하는 사안들은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별로 중요치 않은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더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걱정들은 순식간에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걱정꺼리들이 별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가정들 마다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통지표 받아오는 날은 온 집안이 곡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을 반 죽여 놓습니다. 죄인 심문하듯 하고 밤잠을 설치고 집안 망하는 것처럼 온 집안이 난리를 떨며 온 가족이 아이의 시험에 울고 웃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집에 더 큰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덜컥 병에 걸려 병원에 실려 갑니다. 이이가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면 순식간에 그동안의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뀝니다. 공부문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공부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기만 하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이렇게 너그러워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집안 망하는 것처럼 걱정 속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아이 시험 치는 날 아침에 식사하면서 아들에게 “오늘 시험 5등안에 들지 못하면 부자지간 인연을 끊자”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시험치고 들어오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오늘 시험 어떻게 되었냐? 5등 안에 들었냐” 그러자 아들이 “아저씨는 누구세요“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시험이 문제입니다. 이 시험 성적으로 석차가 오르내림에 따라 웃고 울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야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네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인생을 살만큼 살고 난 후에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공부가 삶에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때가옵니다. 그 때는 그냥 혼자 씨익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공부가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안달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제를 우리 다음 세대인 우리의 아들 딸 들이 대물림해서 또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생이 모두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면 이런 문제들로 인해서 불필요하게 근심하고 걱정할 겨를도 없어집니다. 사람이 바빠서 정신없이 살아갈 때는 자잘한 생각들은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걱정이나 근심이 많은 사람에게 여행을 가보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몸을 움직여 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앉아있으면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은 바쁘게 살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잘한 걱정들은 없습니다. 그런 걱정들이 자리 잡을 틈도 여유도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노동을 주셨습니다. 땀 흘리며 일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고 무료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면 불필요한 생각에 무섭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들보다 우울증과 불면증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젊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분주히 살아가고 정신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아이가 다 크고 생활이 안정되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지는 때가 위험한 때입니다. 그때 어딘가 숨겨져 있던 허무감과 온갖 잡념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래서 별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식 

 여기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먼저 할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일단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면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창조의 섭리를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의 삶은 물론이고 내일의 문제와 나의 인생 전체도 심지어는 나의 생과 사도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홍해를 가르시는 능력을 믿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고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밀려오는 걱정과 근심들 때문에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갖 밀려오는 잡념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의 기도도 묵상도 그 앞에 나아감도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점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음부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은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신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미리 믿었더라면 아들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이 사건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았을 것이고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은 요셉을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사람으로 만드셔서 나와 만나게 하실까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도 그 하나님의 섭리를 여러 번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무작정 집을 떠나던 날밤 환상 중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네 자손을 이 땅의 모래처럼 이루게 하리라”고 아브람에게 약속한 것을 다시 일깨워주셨고 20년 만에 대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야곱입니다. 그날 밤에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재삼 다짐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짐승에게 그렇게 찢겨 죽게 하실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셉에게 얼마나 많은 꿈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 꿈들이 모두 범상치 않은 꿈들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꿈들이 모두 의미 없는 꿈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너무 일찍 포기하고 이 사건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오죽 했으면 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점을 설명한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모두 그 섭리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 40년 생활, 가나안 진입한 사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 등을 생각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들입니다. 이 사건들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섭리를 설명하면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왜 걱정하느냐, 하나님은 들의 잡초나 공중의 새들보다 너희를 더 사랑하신다.” 

오늘 우리들이 근심할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함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고 근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밤새워 고민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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