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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믿는 것의 본질 (엡 1:15~19; 행 2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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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것의 본질 (엡 1:15~19; 행 26:1~32)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본질' (essence)입니다. 촛불 시위의 경우, 몇 명이 모여서 몇 시간 동안 집회를 했다고 하더라는 사건보도나 현상보다는 그들이 왜 모였으며, 왜 저렇게 행동하는가라는 '본질'과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중고등학생들이 학교 수업 마치고 학원으로 가서 밤 11시까지 공부한다는 사실보다, 왜 그들이 공부해야하는가? 라는 공부의 본질과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교회당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왜 우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 중요합니다. 예배 시간 마다 광고를 하지만, 휴대푠을 끄지 않는 것의 본질은 불순종하려는 죄악 때문입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는 것의 본질은 피곤이 아니라,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장품에도 '에센스'가 있지 않습니까? 이 본질을 놓쳐버리면, 신앙생활 중에 마주치는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고 주님을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이유는 신앙의 본질을 모른 체 그저 왔다갔다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을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이 주님을 믿고 섬길 것을 서약합니까? 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끝까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한 답을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받는 바울의 모습에서 찾아봅시다. 

요지: "나는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신앙 본질은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이 하반부를 향해서 치닫고 있습니다. 선교사 바울이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이자 총독의 관저가 있던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고소당해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벨릭스 총독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바뀌니, 취임 잔치가 열립니다. 유대인의 왕인 아그립바 2세가 축하하러 가이사랴에 옵니다. 바울은 여전히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베스도총독은 가이사에게 상소하기 전에 바울의 구체적인 죄목을 밝혀야 했기에, 재판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아그립바에게 이 골치 아픈 재판을 맡아보라고 권합니다 (행 25:24). 

아그립바 2세가 바울에게 변호 (apologeomai) 할 기회를 줍니다 (1절). 바울은 유대인의 송사에 대해 유대인의 풍속과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2-3절). 유대인들도 바울이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성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4-5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이유 때문에 신문을 받고 있습니다 (6절). 그 소망이란 이스라엘 12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7절). 그것은 고난당하는 메시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 12:2절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육신으로는 죽어 자는 자들이지만 언젠가 깨어나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부활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재판정에 와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왜 믿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합니다 (8절). ‘부활’이 여전히 바울의 변증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울은 9-23절까지, 이전에 기독교의 박해자로 살았던 자신의 행적과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한 것을 설명합니다 (보라. 행 9, 22).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고생스런 일이었습니다 (14절). 가시채는 가축을 몰 때 사용하던 뾰족한 막대기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헬라 격언인데, 바울의 박해는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바울을 바른 길로 가도록 막대기로 찌르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박해자 바울에서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 바울로 변화된 것을 봅니다. 그의 인생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인생이 변합니다. 

엡 1:17절에 보면,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이 임하셔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계시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십니까? 창조자, 구원자, 섭리자, 통치자,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십니다. 여러분은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체험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믿고 감사합시다. 

특별히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깨닫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믿되 특별히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진 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18절에서 전도자 바울이 해야 할 일은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한 것인데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22절). 구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둠과 사망과 사단의 속박에서 고생하던 자에게 죄 용서를 주시고 구원하실 내용이 많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다 알리실 선지자라고 모세가 예언합니다 (신 18:15). 예수님은 처녀에게 나셔서 (사 7:14), 죄인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화목제물이 되셔서 (사 53), 더러움과 죄악을 씻는 샘이 되십니다 (슥 13:1). 바울은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자기 당시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힘 주어 말합니다. 이것은 신화도 공상소설도 허구도 아닙니다. 이것은 '참 되고 온전한 정신 차린 말'입니다 (25절).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 태어나셔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참되고 합리적인 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믿음 위에 가지고 있으면, 기적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창조와 부활과 승천이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고 신화와 거짓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 믿는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구약 예언이 예수님의 출생과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믿는 신앙의 본질을 확신해야 성경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성경과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매우 합리적이고 참되다고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눅 4:17-19절에 나타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포로들에게 자유를,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선포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바울의 다른 고백을 들어봅시다: 골 1:13절: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엡 1:19절은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바울이 기도합니다. 사단의 능력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살고 있음에 감사합시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에서 세상의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골 1:12절: "너희가 빛 가운데서 성도의 유업의 몫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되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 빛의 갑옷을 입고 계십니까? 

시골 의사 박경철씨가 쓴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거기 보면 의사의 징크스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드물지만 치료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밤에 창문에 귀신모양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귀신이 소복을 입고 피 흘리며 나타나는 경우를 한 번도 본적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로 패배당한 사단은 계속해서 성도를 두렵게 만들고, 범죄하도록 합니다. 교묘하게 신앙의 열기를 빼앗아 버립니다. 하지만 계 20장의 천년왕국의 특징은 사단이 결박당한 것입니다. 더 이상 사단이 온 세상의 주인 행세 할 수 없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이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예수님의 교회 즉 여러분을 이기지 못합니다. 

총독 베스도는 하나님이 바울의 과거와 현재에 역사하신 것을 듣고도 별 감동을 받지 못하고 "바울아, 네가 미쳤느냐?"라고 말합니다 (24절). 아그립바 왕은 "몇 마디 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 어림없다고 말합니다 (28절). 이 둘은 스스로 생명 얻을 기회를 박차고 맙니다. 전도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은 생명을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에게 복음의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혹시 여기에 있는 분 가운데,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은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를 사단에서 구출하고, 빛의 자녀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 의롭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본질은 죄 사함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 가운데서 유업을 얻는 것입니다. 

엡 1:18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신 소망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마음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 속박당하며 속고 살다가 하나님에게로 옮겨진 것이 구원인데, 구원을 받았다는 데서 머물지 않고 유산을 받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기에 유산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는 기업, 상속으로 받아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죽어야 유산을 물려받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상속을 이미 우리에게 주십니다. 영생의 유산을 받은 것 감사합시다.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합시다.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에 감사합시다. 

피고 신분으로 소환된 바울이지만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천부장들 앞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과 천국의 유업을 그들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한 바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유산을 받은 자는 이 유산을 같이 받을 자를 찾아야 합니다. 

바울의 사역은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하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18절; 고후 4:4; 엡 4:18; 골 1:12-13).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열방이 같이 하나님의 영생과 복과 은혜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약속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유업과 은혜와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의 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 권세는 우리 권세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도 우리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사모하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엡 3:20). 단지 정욕대로 잘못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큰 복은 뭐니뭐니 해도 우리가 받은 가장 큰 복은 영생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입니다. 가정입니다. 직장입니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쉽게 보는 것도 은혜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 그리고 직분을 받은 것도 은혜입니다. 감사 제목을 찾아보십시오.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감사합시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일에 무엇보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본질을 깨달으니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할 뿐입니다. 순종해야겠다는 각오가 일어납니다.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이 누구신지 더 알아갑시다. 우리 평생의 소원이 하나님과 대속해 주신 사랑을 더 알아가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유산의 풍성함을 깨닫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체험하도록 노력합시다. 세상에 나가서 아직도 어둠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 사단에게 눌린 자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합시다.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역사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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