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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벧전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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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벧전 5:8~9)
 
1. 군사훈련 중에는 이런 것도 ‧‧‧

지난 주간에 노회 군 선교 위원들과 전방부대 위문을 갔었습니다. 가서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대대원 전체가 훈련 중인 부대였는데요. 그런데 그 훈련이라는 것이 뭐냐면, ‘진지공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먼 거리를 이동하여 다른 사단으로 와서 그 부대의 진지공사를 대신 해주는 것이 저희가 방문한 부대의 이번 작전이었습니다. 

진지공사란 뭔가 하면, 각 부대마다 책임져야 할 방어선이 있는데, 이 방어선이라는 것은 그 부대가 책임진 지역에서의 전투를 담당하는 경계선으로서, 거기에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전투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벙커나 참호시설을 해 놓은 것입니다. 호의 경우, 깊이 120cm, 폭 60~80cm 정도로 병사들이 자세를 약간 낮추고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진지공사란 이러한 벙커나 호를 수리 보수하는 것으로 일종의 막노동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진지공사가 왜 필요하냐? 진지는 대부분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또 땅을 파서 만든 것이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기도 하고 풀이나 나무가 나기도 하여 참호나 벙커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만약 그대로 버려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굉장히 불리해 지는 것이죠. 그래서 각 부대는 진지공사를 하나의 작전으로 보고 매년 두 차례씩 주로 여름과 겨울에 실시합니다. 이때 병사들은 진지가 있는 야산으로 가서 텐트를 쳐놓고 일주일에서 길게는 약 한 달까지 작업을 합니다. 아침 08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5시까지, 오로지 엄청난 삽질과 곡괭이질로 땅 파고 매우는 일만 합니다. 아마 군에서 진지공사 작업을 해 보신 분들은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이 진지공사가 훈련도 아니고 작전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병사들만 죽자고 고생하는 막노동과 같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진지공사는 아주 중요한 군사작전입니다. 군대의 훈련과 작전은 적과 맞부딪히는 상황이나, 가상의 적을 대항하여 이동하고 전술을 펼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을 대비하여 진지를 보수하고 공사하는 것도 하나의 훈련이고 작전인 것이죠. 마치 평상시 훈련이 잘 된 부대가 적을 만나면 이기는 것처럼, 평상시 자신이 전투할 진지를 잘 관리한 부대가 전투 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진지공사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군인들이 진지를 공사하는 것이 하나의 작전이고 훈련이듯이, 전시(戰時)와 비전시(非戰時)가 구분이 없고 전방과 후방의 구분이 없듯이, 성도의 삶도 이러한 군사작전의 연속이라는 것, 즉 성도들도 병사들처럼 지금 영적인 전투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1950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을 맞이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반드시 들려져야 할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2. 성도의 삶도 전투다

여러분, 성경을 한 번 보십시오! 성경에는 성도의 삶을 전쟁, 혹 전투에다가 비유한 것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기록도 성경만큼 많은 책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전쟁에 관한 말씀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인생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은 공부를 통하여 경쟁자나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취업준비생은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하여 경쟁자들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직장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승진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다들 남보다 더 잘하고,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열심히 싸우는 것이죠. 

어디 그것 뿐 입니까?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도 전쟁이지요. 어떤 이는 사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어떤 이는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어떤 이는 엉뚱한 사랑을 찾아 헛된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인생은 자신의 과거와 싸우고 미래와도 싸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싸움이요, 미래를 차지하려는 싸움이라는 것이죠. 또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an, 1601~1658)이라는 한 경건한 수도자는 “인생이란 타인의 악의와의 전쟁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누군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것, 설사 악의가 없는 것이라도 본의 아니게 여러분을 자신이 가려는 길의 징검다리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러한 의도적이거나 의도적이지 않은 모든 악의에 대하여 싸우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육적인 싸움”이라고 부른다면, 성도의 삶에는 또 하나의 싸움, 즉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성경이 전쟁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참된 이유는 바로 여러분의 삶 전체가 끊임없는 영적 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성도의 삶이 영적 전투의 현장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욥기라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고 정직한 의인이었지만, 사단은 끊임없이 그를 해하려고 했습니다. 욥의 삶 그 자체가 끊임없는 전쟁터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욥의 삶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유혹하고 넘어뜨려서 실족케 하려고 온갖 꾀를 다 동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을 유혹하고 공격했던 사단이 저와 여러분을 그냥 버려둘 것 같습니까?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사실은 그 훨씬 이전부터 여러분의 삶은 영적 전투의 현장이었고, 하나님은 그 전투에서 여러분이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적(主敵)을 바로 알자

무엇보다 먼저 적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대적 마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전쟁의 대상은 마귀라는 것이죠. 

그러면 마귀가 누구입니까? 히브리어로는 ‘사탄’이고, 헬라어 이름은 한자를 빌어 ‘마귀’로 불리지만 같은 대상입니다. 마귀란 말의 원어인 “디아볼로스”는 ‘방해자, 반대자, 대적자’란 뜻인데요. 원래 천사 중에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하나님만큼 높아지겠다고 많은 천사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떨어져 사탄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욥기 1,2장에 욥을 시험하는 자로, 스가랴 3장 1,2절에는 여호수아가 대제사장 직분을 맡은데 대하여 도전하는 영적 존재로, 역대상 2장 1절에는 다윗을 충동하여 죄를 범케 만드는 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마귀에 대한 언급이 32번 나오는데요. 시험하는 자(마4:3,살전3:5,고전7:5), 악한 자(마13:19,요일5:18), 참소하는 자(계12:10), 원수(마13:39,눅10:19), 대적(벧전5:8), 귀신의 왕(마9:34,12:24,막3:22,눅11:15), 이 세상의 임금(요12:31,16:11), 공중 권세 잡은 자(엡2:2), 타락한 천사,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유6),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유혹하는 자(고후11:14), 어두움의 주관자, 거짓말쟁이와 살인자(요8:44)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러한 사탄은 때로 물리적인 현상을 좌우하기도 하고(욥1:2,살후2:9), 마음에 나쁜 생각을 주입하기도 하며(마4:3), 질병을 유발하기도 하며(눅13:16), 죽음까지도 주관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히2:14). 

이 사탄, 마귀가 하는 모든 짓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려서 죄를 범케 만들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이죠. 사탄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것 뿐 아니라 불신자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인 듯 속이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도 합니다. 그는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한 가정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방해합니다. 사탄은 자신이 최종적으로 패망하기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의 지옥길의 동반자로 삼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이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속지 않도록, 무엇보다 이 세상 사람들을 그의 지옥길 동반자로 내어주지 않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2) 마귀의 공격법

그러면 이 마귀가 성도들을 공격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적을 알고 그의 공격법을 알면 우리는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❶ 오늘 본문은 사탄의 공격 방법에 대해 아주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여기서 “우는”이라는 말은 먹잇감을 찾아 으르렁대는 굶주린 사자의 모습을, 그리고 “두루 다닌다”는 것은 사자가 자신이 공격하기로 점찍은 먹잇감 주위를 맴돌면서 위협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굶주린 사자가 자신보다 약한 먹잇감을 앞에 두고서 으르렁거리며 포효를 함으로서 그 기를 빼놓거나 아님 기절이라도 시키려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죠. 

베드로가 이 표현을 쓴 것은 당시 상황이 마귀가 드러내 놓고 신자들을 박해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로서 기독교를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 "매우 위험한 미신"이라고 하면서 핍박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몇 년 뒤의 기록입니다만, 당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게 찢기게 했고, 십자가에 못 박기도 했다. 혹은 화형을 시켰는데 특히 해진 후 밤을 밝히는 것으로 이용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들을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서는 쇼가 공연되었다(타기투스의 연대기 중에서)." 이렇게 교회는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박해와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하지 않기를 권면했는데, 바로 이것이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목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가시적인 사탄의 공격과 신앙에 대한 핍박이 여러분의 삶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 어려움, 실패, 질병, 이별 등이 사탄의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눌림이나, 부부 사이의 갈등이나, 자녀들의 문제, 돈 문제, 직장문제 등 수많은 일들과 사건들을 통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다 아는 주님께서 오늘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도 여러분들이 상당히 힘들고 어려운줄 압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기도 어려운 형편에 마귀와 싸우라는 것이 더욱 더 여러분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만 마귀가 여러분을 공격하는 이상 여러분의 삶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 이기십시오(9).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은 패배자로 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성도는 그것에 매여서 그것만 보면 안 됩니다. 그것만 바라보면, 자신의 삶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하는 사단에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자녀와 가정, 교회와 이 땅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❷ 두 번째로 사탄의 공격 방법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에는 “마귀의 궤계”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때 궤계라는 말은 ‘간교한 술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14절에 보면 사단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천사처럼 가장 좋은 모습으로 성도들 앞에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탄은 이렇게 여러 가지 다양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을 공격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직접적인 박해와 고난보다는 은근하고 교묘하게 여러분 곁에 다가가 여러분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서히 여러분을 넘어뜨리려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단이 성도를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성도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약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천하장사 아킬레스는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발뒤꿈치에 있는 아킬레스건이 그것이었는데요. 트로이 전쟁에서 그는 이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은 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도 약점이 있을 것인데요. 바로 그 약점을 마귀가 이용하여 여러분을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이용하여 넘어뜨립니다. 삼손이나 다윗은 미인을 좋아했고,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삼손에게는 ‘들릴라’라는 이방 여인을, 다윗에게는 ‘밧세바’를 붙여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는 돈을 좋아하니까 마귀는 돈주머니를 가지고 그를 유혹했습니다. 오늘도 성도가 지나치게 좋아하고 빠져 있는 바로 그것을 이용하여 여러분은 넘어뜨리려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활과 너무나 밀접한 대중문화, 취미생활이나 운동, 심지어 의식주에까지 침투해서 “에이, 그것이 무슨!”하고 무시하도록 만들면서 여러분의 영혼과 삶을 망가뜨리려 합니다. 특히 마귀의 주된 공격 대상은 믿음에 굳게 서있지 못하거나 현재 영적으로 침체된 사람, 마귀를 인정하지 않거나 영적으로 방심한 사람을 자신의 유혹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간접적인 공격에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성도의 전투자세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마귀가 걸어오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지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마귀에 대하여 우리가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첫째로 근신하십시오! 
“근신한다”는 말은 '술 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고 있다, 침착하다'를 의미합니다. 원래 이 말은 술 취함의 반대인 ‘맑은 정신, 제 정신’이란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은 맑은 정신 상태“, 또는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올바른 판단'이었습니다. 이 말은 꼭 술은 아니더라도 성도가 다른 것에 빠져 살아가는 것, 다른 것에 취해 살아감으로서 영적인 분별력과 영적인 싸움의 당사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양성경에서 “근신하라”, 즉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씀과 언제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신하는 삶은 세상 다른 것에 빠져 취하지 않는 삶이요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이것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가장 우선적인 태도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깨어 있으십시오! 
“깨어라”는 말은 `잠자지 않고 깨어있다, 지켜보다, 주의하다, 경계하다, 망보다'라는 의미입니다. 경계병이 전방과 주위를 철저하게 살피기 위하여 어두운 밤에 눈을 부릅뜬 상태를 말합니다. 군에서 하는 말 중에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신과 가족들과 교회와 이 땅과 그 주변을 살펴 사단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가 얼마나 똑똑한 지 아십니까? IQ가 200, 300,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 아주 교묘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이용하고, 가족을 이용하고, 사람을 이용하고, 직장과 일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조국산하와 가족들을 지키는 초병의 부릅뜬 눈처럼, 여러분도 눈에 힘을 주시고 사단의 모든 공격을 사전에 알고 차단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대적하십시오!
“대적하라”는 말은 '저항하다, 반대하다'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공격에 대하여 맞서 싸우라는 말입니다. 뱁콕(Maltbie D. Babcock)이란 사람이 쓴 "젊은이에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강해져라!

우리는 놀고 꿈꾸며 표류하고자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힘든 일과 들어 올려야 할 짐이 있다.
투쟁을 피하지 말고 맞서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니 강해져라!
삶이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누구를 원망하랴.
팔짱을 끼고 마지못해 하다니 부끄럽구나.
일어나라, 외쳐라, 담대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해져라!
잘못된 것이 얼마나 깊게 박혀 있는지 싸움이 얼마나 힘든지 해가 얼마나 긴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틀거리지 말고 싸우라!
내일은 노래하리니.


3. 전투 중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월남에서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울창한 숲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게 작전을 펴면서 항전하는 월맹군과의 전투를 쉽게 하려고 넓은 숲을 짧은 시간에 휩쓸어버리는 강력한 제초제를 뿌렸습니다. 그것이 고엽제입니다.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고엽제를 숲에 뿌리면 울창하던 숲은 순식간에 말라 버렸습니다. 그랬던 미국은 월남을 포기하고 베트남에서 물러남으로서 월남전은 끝나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60년대 말, 70년대 초반 월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입니다. 왜 그들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고엽제 때문입니다. 울창한 숲을 순식간에 없애던 고엽제의 독성이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군인들에게 남아서 그 독의 영향으로 몸이 시들시들 말라 들어갔으며, 손과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심지어 그들의 자녀들까지 그 영향으로 아버지와 같은 병을 앓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베트남 고엽제 피해자 전우회>라는 단체의 예비역 군인들입니다. 현재 그들은 작전수행 중인 아군들 위에다 이 고엽제를 뿌려댄 미국을 상대로 또 다른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차”하면 목숨을 잃을 전투 현장에서 싸웠던 그들은, 오늘도 질긴 목숨을 부여잡고 너무나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전쟁 후 지금까지 계속 되어온, 아니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준 고통의 배상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현재 계속되는 전쟁의 당사자라는 것을 아십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전쟁에는 “끝”이라는 말이 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끝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고엽제 피해자들은 그들의 글에서 “우리의 전쟁은 우리가 죽어야만 끝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영적인 싸움도 우리가 천국 가는 날, 주님께서 오시는 날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터인 이 삶에서 여러분은 살아남아야 할 뿐 아니라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전쟁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근신함으로! 깨어있음으로! 그리고 마귀에게 대적함으로! 그리하여 이 영적인 전쟁 만이 아니라, 인생 싸움에서도 늘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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