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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 (수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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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아야 할 영혼들 (수 2:1~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할 때에도 그랬고, 
광야생활 40년 동안에도 끊임없는 위험과 고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수없는 죽음의 위기를 넘겼고,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지내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그들 곁을 떠났을지라도 
이 소망은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땅에 들어가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흥분하고 있습니다. 오직 진군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즉시 요단강을 건너지 아니하고 삼일 간을 기다리게 합니다. 
지금 백성들의 마음은 단 하루도 더 늦추고 싶지 않습니다. 
당장이라도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을 쳐 들어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40년이나 기다렸는데 며칠 늦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겠는가?’라고 
여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표를 눈앞에 두고 며칠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날짜가 지연될 때
조급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냥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여유를 두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3일을 기다려야 요단을 건널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한 일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본문 1절에 보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으로 들여보내는 일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방어용 성벽을 든든하게 쌓아서 
좀처럼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인류가 쌓은 토성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강력한 성이라고 합니다. 
이 성이 그렇게 무너진 것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성은 이렇게 든든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문제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은 하늘에까지 치솟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컴퓨터에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눈에 보이는 기계적인 장치를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가리켜서 소프트웨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여리고는 하드웨어는 든든했지만 소프트웨어가 엉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를 의지합니다. 성벽을 자랑합니다. 
자기 쌓아놓은 돈을 의지하고 자기의 학식과 경험과 명성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살펴보십니다. 
그 사람의 관심과 의도와 인격과 중심을 보십니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좋아도 소프트웨어가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컴퓨터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세계가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리고성은 견고한 성이었지만, 그 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겉모양을 치장하는 것보다도 
내면의 세계를 주님 앞에서 건강하고 정결하게 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호수아는 그 성을 정탐하도록 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호수아2장을 잘 읽어보면, 이들은 제대로 정탐도 하지 못하고 
금방 정체가 들통이 나서, 붙잡힐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흘간을 낭비하면서까지 
이런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성에 믿음의 사람 라합이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결코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라합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을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믿음은 
믿음의 영웅들이 기록되어 있는 히브리서11장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이것이 들통 나는 날에는 라합은 살지 못할 반역적이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라합은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겨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9-11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의 믿음은 소문을 듣고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벌써 40년 전에 있었던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아모리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어찌 보면, 이 일을 직접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소문에 들은 이 여인의 믿음이 더 좋습니다. 

그들은 이 소문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라합은 이제 이 땅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줄 것을 믿고 있습니다.
비록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여인의 믿음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보고 듣고 경험했으면서도 의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한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을 듣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8:10)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만져보고 믿으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20: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라합과 같이 주님 앞에서 칭찬받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보고, 경험해야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듣기만 해도, 경험한 자들보다 더 큰 믿음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라합이 이런 목숨을 건 모험을 걸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라합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다 죽게 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에서 건져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만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살려주리라’
그들은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다는 것으로 표를 삼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여인이었기에 라합은 여리고성이 파멸되는 위기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굳이 사흘간을 더 기다리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성에 구원받아야할 믿음의 여인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여인의 구원을 위하여 가나안 점령을 사흘씩 미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들을 대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이 있는 한 
기꺼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뒤로 미루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롯과 그의 두 딸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결국 불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롯과 두 딸을 구원하시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기억하시죠? 
그 여인의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 옷에 손을 댑니다. 
그 여인은 즉시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기에 바쁘게 가던 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내었느냐? 내게서 능력이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굳이 그 여인을 찾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한 영혼의 구원이 예수님께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막5:21-43)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한 시각 장애인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는 그의 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8:35-43)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위하여 걸음을 멈추시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집에 머무셨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눅19:1-10)

우리는 여기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바빠도 그 걸음을 멈추십니다. 
  

여기서 “타이타닉”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동영상으로 감상하길 원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심판을 받지 않을 만큼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죄악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받을 한 영혼을 위하여 지체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의 날은 지금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아야 할 한 영혼이 있다면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생명의 밧줄을 던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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