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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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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마 4:1~11)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던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의 귀한 말씀이 오늘 저를 이렇게 성장하게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 기억남는 예화를 함께 나누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래 전에 갓 결혼한 부부들은 넉넉지 못하여서 지하방에서 첫 신혼살림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화장실을 공동으로 쓰게 되는 그런 곳에서 살았습니다. 저와 함께 신대원에서 공부한 동기들 중 결혼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런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 신혼부부의 소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이 집에 있는 그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 우리 화장실을 가지고 싶다.’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입고 안 먹고 열심히 벌어서 정말 그런 집을 얻게 되었습니다. 너무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파트에 살면 아주 편하고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이제 우리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자 마음을 먹고 또 안 먹고 안 입고 열심히 일하고 벌어서 아파트를 한 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아파트가 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있는데, 또 어느날 그 아파트 이웃 사람들과 이야기 하던 중에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아파트가 정말 편하고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얼마나 편할까 생각하면서 두 부부가 우리도 화장실 두 개 있는 곳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또 안 입고 안쓰고 안 먹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정말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아파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신혼을 지하 방에서 보내던 그들은 이제 화장실이 두 개 나 있는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얻게 되는 것 만큼 시간도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얼마쯤에 나이가 되었을까요? 

결과적으로 그 두 부부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산 것이 되었을까요? 그들이 살아온 것은 화장실 두 개가 있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온 것입니다. 변소 두 개 있는 집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저들의 젊음과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인생과 삶이 이렇다면 그저 화장실이 두 개 인 집을 얻는 것이 우리의 목표와 인생의 전부고 나의 삶에 모든 것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과 삶이 참 가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냥 흙이 아니라 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언제나 늘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기 하기보다는 가치없고 무의미한 일에 시간과 수고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 별것 아니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사단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세력과 우리는 날마다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처럼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아니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시험과 유혹은 차이가 분명합니다. 시험(Test)는 우리를 강하게 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유혹(Temptation)은 우리를 멸망하게 하고 망가지게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로 하여금 망가지고 망하게 합니다. 언제나 사단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망하는 것을 즐거워 합니다. 그리고 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에게처럼 성령이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광야라는 히브리말은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합성어입니다. 다바르 라는 말과 전치사 미드라는 말이 붙어서 생긴 말입니다. “다바르라”는 말은 “말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미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 말을 합쳐서 해석하면 광야는 말씀과 함께 있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광야의 삶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광야는 기회의 땅입니다. 

주님도 이 광야에 서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40년을 헤매며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그 광야에 예수님도 서셨습니다. 우리도 그곳에 서야 되고 그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광야의 시간은 때로는 아주 혹독하고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40일 밤낮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팠습니다. 40일 굶으면 배가 고픕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에게 사단은 돌로 떡을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몇 번의 금식을 한 경험이 근자에 있는데요, 배 많이 고픕니다. 정말 힘듭니다. 하루 이틀 한끼 두끼도 어느때는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40일이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돌로 떡 만들어 먹고 싶을 수 있습니다. 사단이 그렇게 말 안해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그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작 40일 금식하고 난 후 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려고 금식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만약에 그것을 한다면 무엇을 하러 40일 금식합니까? 먹으면서 지내지요? 금식 끝이 고작 돌로 떡이나 만들어서 먹는 것입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광야로 이끌림 받고 40일 굶었겠습니까? 이것이 사단이 우리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알아야 합니다. 값지고 고귀하고 거룩한 일을 세속적이고 값싸고 가치없는 일을 폄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신 것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육체를 먹이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먹는 것을 거부하고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을 거부합니다. 떡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짐승도 떡을 찾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짐승은 40일 금식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짐승은 그런 것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40일을 금식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체질이아니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금식이 체질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기도한다고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체질이 아닌 그 짓을 해야만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먹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금식체질이 아니라는 말은 먹는 것은 죽어도 포기 하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때로는 금식하면서 영을 살리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금식의 체질은 없습니다. 금식 하고 싶은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의 삶이요, 구별의 삶을 사는 것이요, 교회가 배워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짐승은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거나 자기를 낮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대의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느끼는대로 몸이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고 행하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제할 줄도 알고 대의를 위하여 때로는 작은 일을 버리기도 하고 생명아닌 것을 포기하고 생명인 것을 찾아갑니다. 나를 낮출 줄 압니다. 그리고 그 삶이 고귀하다는 것도 압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짐승들이 가지는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절대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생명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가게 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짐승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단의 상징적인 모습을 짐승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짐승의 삶, 동물의 삶 그리고 그것에 경배하고 절하게 하여 그런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 사단과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그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런 곳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지혜롭게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인가를 알고 때로는 중요한 것을 위하여 나는 부인하고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전 저는 후배 교역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개척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당황한 후배가 저를 쳐다보고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부정적이지 그것해서 못하나 십지 맞습니다. 교회 많은데 교회하나 또 만들어서 무엇을 어떻하겠다는 것입니까? 온 동네에 십자가로 다 덮여있지만 좋은 이야기 보다는 안 좋은 이야기만 들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교회의 능력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후배는 개척교회 하는 것이 싫습니다. 아니 그 후배말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지만,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을 바뀔 수 없다는 것과 땅을 바꾸는 영적인 싸움없이는 변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핏 값주고 사신 이세대의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주님은 나라와 민족을 살리시고 지역을 바꾸시고 땅을 고치십니다. 

우리는 이 능력을 쉽게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땅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잊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이 세대를 바꾸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아니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을 사랑하게 되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역대하 7장14절에 이런말씀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사람들의 악함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의 부조리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소망이 없어보이는 시대를 살아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교회 서는 것은 그 지역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고, 복이 흘러가게 하고 그 지역의 어둠의 영들을 쫓아내고 생명의 강이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막힌 것을 허물고 예수님의 생명이 은혜가 평화가 복이 흘러가게 하고 살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을 흘러보내 살리는 것입니다.

이틀전 이 설교를 쓰기전날에 저는 잠을 청하다 깨어서 주님 하지 않으면 안될까요? 그냥 아프리카로 가면 안될까요?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아프리카가 더 좋습니다. 제게 편한 곳입니다. 힘든 일을 다 거쳤습니다. 그래서 힘든 일보다는 고생할 일보다는 더 좋은 것이 많은 가능성이 있는 곳이 아프리카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족이 그러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대로 순종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지 못해서 이제는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개척이라는 말이 제귀에 들려졌을 때 하나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하거라” “내 핏 값으로 산 교회를 하거라” 그것으로 인하여 왜 교회가 이땅에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산다는 것은 때로는 40일을 금식하고도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것이라” 때로는 밥을 굶으면서 까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사단을 이기는 시작일 뿐이고 그 다음에는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저는 여러분을 이 삶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천사가 수종드는 삶을 사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사단의말을 거부하고 싫다고 말한다면 이제 더 이상 사단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고 천사가 우리를 수종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 생령의 삶, 이땅에 주님의 복을 흘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놀라운 계획안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동참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에 반응해야 할 때입니다. 
(이상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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