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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위에 은혜더라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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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위에 은혜더라 (요 1:14~18)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2008년이 시작 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해와는 달리 우리 국민들 전체가 전반적인 염려를 가지고 새 해를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다른 해 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들 짐작하고, 정치적으로는 혼란하다고 하고 실업자는 많아지고, 집 값은 올라 갈 것이라고들 하고 사회는 혼란해 질 것이라고들 합니다. 
  
1. 이미 받은 은혜를 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죄와 멸망의 자리에서 의와 생명의 자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자녀이면 누구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처럼 우리도 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고 또한 지금도 받고 사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새가 바람을 타고 창공을 높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거기에 두 아들이 나옵니다. 두 아들이 다 같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똑같이 받고 있지만 작은아들은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부모의 재산을 떼다라고 해서 가지고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성도이면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똑같이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받은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아들처럼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바라기는 언제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른땅을 적시어 주는 소낙비와 같으며, 그리고 나무와 모든 지면을 촉촉하게 해서 시들지 않게 하며, 생기를 주어서 열매 맺고 자라게 하는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고 또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인도의 한 가난한 여인이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한 초신 자였는데, 중병에 걸려 있는 외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선교사님, 부탁합니다. 제 아들의 병이 낫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해서 시간을 정하고 당신 아들의 병이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 응답이 있어서 제 아들의 병이 낫는다면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석반지를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어쨌던 선교사는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다시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소중히 여기는 보석반지를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나았군요"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아니에요. 제 아들은 죽었습니다.’ 선교사는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 반지를 가지고 온 것입니까?" 
"선교사님, 그것은 여기에 큰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제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외아들로 자라면서 말도 듣지 않고, 방탕하고, 많은 죄를 범하여 제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었지요.
저는 그저 아들의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했지요. 그런데 이 아이가 병들면서 예수를 믿었고, 착하고 좋은 아들이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영생한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간 아들에 대하여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보석반지를 바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남이 깨닫는 수 없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인과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은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 만사의 되어지는 모든 것이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은혜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감사도 없고 감격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법대로만 취급받는다면 모두가 다 죄인들입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과보응의 원리대로만 산다면 일찍이 죽어 다 지옥 불에 던짐을 당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이해합니다. 율법도 은혜요.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다.---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삽니다. 이 은혜를 까닭은 사람은 행복한 것이고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행불행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어떤 어린아이가 어머니 심부름을 하는데, 전에는 무엇을 하라고 하면 여기에 대꾸도 하고, 안하겠다고도 했어요. 그런데 요새 와서는 심부름을 잘하는 것이었어요.
시장에도 갔다 와라, 어디에서 뭘 사 와라, 무엇을 해라, 할 때에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 녀석이 철이 났나? 심부름을 참 잘하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들이 편지를 써서 어머니 책상 위에 놓고 나갔습니다. 어머니가 편지를 펴 보니, 어느 날 몇 시에 어떤 심부름, 어느 날 몇 시에 무슨 심부름....이렇게 다섯 가지를 적어 놓고는 그 밑에 ‘합계 5천원’이라고 썼습니다. 심부름 한번에 천 원씩인 셈이지요. 어머니는 기가 막혔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바로 답장을 썼습니다. ‘내가 너를 낳느라고 고생한 것도 공짜다. 열 달 동안 네가 힘들이지 않고 다닌 것도 공짜고, 네가 젖 먹은 것도 공짜고, 학비도 거저고.....’아이는 이것을 읽어보고 가만히 있다가 어머니 앞에 오더니 마침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하고 뉘우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모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어떻게 율법적 관계가 통합니까? 여기에 어떻게 보상이 통합니까? 전부가, 하나에서 백까지 다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몰라요. 내가 뭘 좀 해서 칭찬을 받는다고 정말 내가 잘해서 칭찬 받는 것입니까? 내가 뭘 좀 잘못해서 꾸중을 듣는다고 내가 지금 심판을 받는 것입니까? 은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고전15:10절에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범사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시119: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인생을 많이 살고 보니 고난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서로 이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나 책임져야 할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킨다거나 해 묻은 사건들에 대한 풀어지지 않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주제 넘는 꿈이 많다는 이유로 형들에게 미음을 받았고, 결국은 우물에 던짐을 받아 죽을 번하였지만 형 유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대상에게 노예로 팔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장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일하다가 정직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가 되어서 좀 살만 하니까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인하여 누명을 쓰고 옥중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말 구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거기서 왕의 인정을 받아 그 나라 총리 대신의 자리에게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요셉으로 인해서 온 가족이 가뭄과 기근에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먹은 형들은 요셉 앞에서 무슨 벌을 받을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형들이 떨면서 말하기를 창50:17-18절에 보면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고 벌벌 떠는 형들을 보고 요셉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요셉이 눈물을 감추고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창50:20-21절에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자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초월하여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팔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종살이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셉이었기 때문에 그가 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때에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고, 뜨거운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또한 아름다운 형제 우애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진정한 효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때를 위해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게 된 것이라고 기뻐하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인들은 죄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이 좀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해서 나는 은혜를 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구원 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새 생명을 얻었는데 무엇이 부족하다고 은혜 못 받은 사람처럼 살겠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충성하며,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이 높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았을 때에 그는 말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은혜로 이해하고,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로 받아 드리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드리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것이나 불행한 것이나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 앞에 은혜로 받게 될 때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씀하시기를 롬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 드리고 감사하는 자에게 모든 일이, 좋은 일이든 언짢은 일이든 결국은 합력 해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3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주님을 바라 본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증거하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윽고 그는 생을 마감할 때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은혜를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산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며 산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안에 깊이 존재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산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충만’이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다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위에 더 큰 은혜가 채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보니 고렇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집에 태여 나셨습니다. 그는 태여 날 때부터 오해와 박해를 받았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없었던 어린 아이 때부터 죄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세주로서의 중압감을 가지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는 사랑 대신에 미움을, 환영과 영접 대신에 배신과 멸시를 많이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와 박해와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렇게 죄인이 되어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 사명과 그런 고통과 몰이해와 오해와 핍박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순순히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순종과 충성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우리들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신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셨으므로 영광을 받게 하셨고, 인간으로 태여 나시고 사신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셨음으로 그를 살리 사 우리들의 영원한 ‘메시아 곧 신’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은혜가 되고 모든 피조물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감사합시다. 그러면 금년에 그 은혜에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가지고 못 가지고, 건강하고 병들고 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절대적 은혜를 알고 그것을 소유한 자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부러워해도 나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더 바랄 소원이 없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봅니다. 그래야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축복의 원리입니다.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병에 걸린 사람은 나으면 아무 소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한번만 교회에 나와 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나은 다음에는 소원이 더 많아져요.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한 번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모든 것이 은혜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새소리도 아름답고, 꽃도 아름답고, 세상도 아름다워요. ‘은혜 위에 은혜’-----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도여 그리스도와 같이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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