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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행 19: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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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행 19:21~29)


1. 시작하면서

바울의 에베소 선교는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년 이상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 훈련을 시켰는데, 그 제자들이 아시아 인근으로 퍼져나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떠나려하는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팔아서 살던 사람들이 그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몇 가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2. 바울의 두 사역

지금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마음을 가지면서 다음 사역지를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 사역이고 또 하나는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역은 구제사역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성도들은 거의가 유대인으로써 박해를 무릎쓰고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예루살렘의 동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여 기초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 여러 곳에서 디아스포라 기독교 유대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헌금을 모금했고 그것을 가져다주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란 것은 당시 로마에 이미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고 당시 땅 끝이라고 여겼던 스페인까지 복음 선교를 하려는 그의 비젼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계획을 편지로 써서 보내었는데 그것이 곧 로마서입니다. 그 편지에 보면 구체적인 언급이 나옵니다(롬 15:22 이하).

구제와 전도 이 두 가지는 교회 사역의 양 날개입니다. 새가 날려면 한 쪽 날개만으론 불가능하듯이 교회의 복음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와 함께 구제 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때때로 구제는 부수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전도의 한 방편정도로 생각해왔는데,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나누어지지 않은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이 지금 있는 곳 에베소는 예루살렘과 로마의 가운데쯤 됩니다. 만일 전도가 우선이고 더 급하다면 그는 곧장 로마로 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 방향인 예루살렘부터 먼저 가려고 합니다. 물론 이 구제는 성도인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교회 밖의 낯선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복음 전도의 대상이 이방인이듯이 구제 대상도 이방인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 교회에서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사회봉사위원회의 자원 봉사자들의 사역들도 전도와 마찬가지의 가치와 사명감을 갖고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꼭 당부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진심에서 감당해주시길 부탁합니다. 마치 전도자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수고와 섬김이 나중 그들의 영혼을 움직이게 될 것이고 주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구원의 사역이 될 것입니다. 


3. 데메드리오의 박해 선동

바울 사도가 떠날 채비를 하던 중에 데메드리오란 사람이 일어나 바울 일행의 복음에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는데, 복음전파의 효과로 에베소에서 우상을 사는 자들이 적어지니 그들의 생업에 타격이 온 때문입니다. 생업에만 타격이 온 것이 아니라 복음과 함께 우상 타파를 외친 그 말 -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 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데메드리오가 한 말입니다.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27절)

이전에는 그들의 업이 존경을 받았었고 그들 역시 존귀한 자들이었는데 이젠 먹고 살길도 막혔을 뿐 아니라 그들의 하는 일이 천하고 거짓된 일로 드러난 것이 그들을 분노케 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위하여 살면 우리는 어떤 불이익이라도 감수하면서 그것을 버리고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이해관계에 얽혀 주를 대적하게 됩니다. 그것이 대적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당연시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초기 선교시대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참 많습니다.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살던 양반이 복음을 믿으면서 가정을 정리하는 사건들, 깡패가 믿고 회개하고 개과천선한 이야기들, 술주정뱅이가 믿고 술을 끊은 이야기들, 노름으로 살던 사람들이 노름에서 손을 씻은 이야기들 등등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개인적 도덕적 변화만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을 하던 사람들이 업을 접은 이야기들, 술 제조공장을 하던 사장이 공장 문을 닫은 이야기들, 구멍가게에서 술과 담배를 팔던 집사님이 그 품목 진열장을 없앤 이야기들 등등 사회적 윤리적 변화도 엄청 많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교회 강단에서 복음 진리가 무기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에서 사회 윤리 문제 제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개인의 윤리를 지적하는 일이 드물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신앙생활과 개인 생업 혹은 사생활 문제가 별개의 것으로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언급하거나 지적하는 목사를 싫어하면서 흔히 하는 말이 “목사님 그냥 말씀만 순전히 전해주세요~”라고 드러나지 않는 압박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목사님이 그러면 우리 가족 먹여 살리실거에요?~‘라고 협박하는 일까지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생업 문제 뿐 아니라 낙태, 이혼 등의 많은 문제들 앞에서 목사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4.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사도들의 선포를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는 말의 의미 말입니다. 이 말은 어렵지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손으로 만든 많은 것들 중 하나님을 대신 하게 만든 것은 없을까를 살피는 것은 어렵고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이 아닙니다”란 말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경배와 존귀를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대복종할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다 변하며, 온전치 못하며 특히 우리를 위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근래 영화 중에 "Taken"이란 헐리우드 영화가 있습니다. 참 흥미롭고 의미  있는 영화였습니다. 자기 딸이 파리에서 마약 인신 매매단에게 납치 되자 모  든 것을 걸고 자기 딸을 구출해내는 영화입니다. 정말 미국 특유의 영웅 만들기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신은 아닙니다. 일본의 천황이 태평양 전쟁의 패전을 짊어지고 “나는 신이 아닙니다”고 선언했듯이 말입니다.

우리 역시 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만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고 고백하는 자는 곧 “모든 것을 만드시고 있게 하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삽니다. 그리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 오직 주 밖에 없네 
그 무엇도 나를 채울 수 없네
주님의 평안 내 안에 있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5. 가이오와 데메드리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이름들을 요한 사도가 쓴 서신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한 삼서에 보면 요한 사도가 “사랑하는 가이오 장로에게”라며 편지를 쓰는데 그 안에 데메드리오란 인물도 언급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이오는 바울 대신하여 붙잡혀 군중 극장으로 끌려간 사람이기에 그는 나중 까지 그 신앙을 잘 지켜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불림 받는 것 같습니다. 

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요삼 1:1-6)

이렇게 변함없이 신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박해와 환란을 겪으면서 도망치거나 배교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에 대한 모함으로 선동을 일으켰던 데메드리오는 그 후 엄청나게 바뀐 것 같습니다. 가이오에 이어 나오는 말씀중이 그에 대한 언급이 이렇습니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요삼 1:11-12)

데메드리오는 그 앞의 인물 디오드레베가 나그네 접대하기를 꺼리고 대접하는 자들 마저 교회에서 내어 쫓는 사람인데 그와 비교하면서 그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인정을 받은 모범 신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람이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자기 생업에 해를 끼치자 선동을 자행했던 사람이 아마도 회개하고 교회에 들어와 충성스러운 인물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변화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박해자와 훼방자가 변하여 교회의 일군이 될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복음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곧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복음만이 드러나며 하나님만이 역사하시는 일들이 많이 많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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