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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함께 쉼을 얻으라 (창 2:1~4, 골 3:15~17,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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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쉼을 얻으라 (창 2:1~4, 골 3:15~17, 마 11:25~30)

오늘 저희들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쉬러 왔습니다. 말씀대로 하면 여섯날동안 창조하신 하나님이 일곱 째날 쉬신 것처럼 우리도 쉽시다. 그래서 오늘 왔습니다. 오늘 우리 편히 쉽시다. 쉬는데 어떻게 쉬느냐, 하는 말씀을 오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사실 최근에 와서 여러 책들이 출판되어 가지고 성경말씀에 쓰여 있는 창조의 이야기에 관한 질문들 많이 풀어 내놓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말씀에 보면 6일동안 하나님이 빛부터 시작해서 사람까지 창조하신 다음에 일곱째날은 안식하며 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학적으로 지질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엿새동안에 사람까지 다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오늘 상당한 시일이 흐른 지금, 하루를 우리가 지금 정하고 있는 24시간으로 보고, 24시간마다 빛과 바다와 하늘과 창공과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루에 창조했다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고 순차적으로 엿새 때까지 창조하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는 말씀을 강조되게 쓰이는 말을 썼는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 과학적인 사실이나 또는 수학적인 계산 가지고 책을 읽으면 오류가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과학서적이 아닙니다. 신앙 고백의 산물입니다. 참고로 구약성경을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읽게 되는데 구약성경을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받아서 처음 기록했을 때가 지금부터 따져보면 최초로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약 2500년~2800년 전에 쓰여진 기록입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 BC 500~800년 사이에 성경말씀 구약을 다 영감 받아서 기록하였습니다. 

노아 홍수가 생겼는데 노아 홍수가 언제쯤 생겼을 것 같습니까, 하고 연구해봤더니 노아 홍수는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를 성경이 말하는 빅뱅으로 보고 그 때부터 모든 창조 이야기가 노아 홍수보다 먼저 있었던 에덴 동산은 언제 생겼습니까? 그랬더니 한 10000년 정도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저희 창조과학이라는 학회에서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논란이 지켜져 왔는데, 연구를 해 보니까 이 세상에 화강암, 화석 등 모든 것을 연구해 보니까 6000년 또는 10000년이 아니고 어떤 경우는 130억년 됐다고도 하고 엄청 시간이 길게 창조가 되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는 첫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있었던 데서 뭐가 하나 생긴 겁니까? 질문이 여러 가지가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에 노아 홍수는 지금부터 BC 6000년에 생겼다, 4000년 전에 생겼다, 이런 기록도 없고요, 에덴동산이 10000년 전에 생겼다, 이런 기록도 하나도 없습니다. 과학서적이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만들어놓고 우리가 법칙으로 정해놓은 과학적 진실, 사실가지고 책을 읽어 놓으면 2500년~2800년 전에 썼던 사람들의 과학적 지식이나 문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그 당시 틀 속에 재단하는 결과를 빚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습니다. 일곱 중에 6/7은 일하셨고, 1/7은 쉬셨습니다, 하는 하나님의 근본 의미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24시간으로만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더군다나 오늘 우리가 일주일 중에서 하루를 이렇게 삽니다만 6일이라는 시간이 24시간짜리를 합해서 6일을 주셔도 좋고 상징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6년이어도 좋고, 60년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까,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분명히 구원시켜 주시려는 구원의 목적가지고 우리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시기와 연수는 저희들이 잘 모릅니다. 

성경말씀을 기록할 때 구약성경은 어떻게 기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우리 백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민족 전체를 언제 구원해 주셨다고 확신하게 되었느냐 하면, 모세를 통해서 애급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서 가나안으로 이끌어 주셨을 때,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몸에 경험하고 나서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은 철학적 또는 사변적 신 개념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만난 것은 출애굽 사건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는 집단적 개인적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영감을 받아서 그 하나님은, 지금 경험하는 하나님은, 구원주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창조하실 때도 구원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연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기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 전체를 읽을 때, 사실은 창세기부터 읽는 것이 아니고요, 출애굽 사건이라는 안경을 끼고, 창세기도 말라기도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일목요연하게 신앙의 하나님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 않고 과학적 지식부터 따지면서 읽기 시작하면 온갖 모순 투성이에 질문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고 신앙고백서입니다. 

여러분에게 구약성경을 읽으시면서 한 가지 참고 말씀을 드리면, 이것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가나안 땅으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해방의 주요, 구원의 주요, 우리의 주인이십니다라는 확고부동한 믿음 위에서 창세기도 읽으시고 이스라엘 역사도 읽으시고 말라기도 읽으십시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구원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고 그런 안경을 끼시고 그 눈으로 읽으시면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장로님도 기도하셨습니다만, 우리 이소연 씨가 우주까지 왕복하는 판에 창세기를 기록할 때 우주왕복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 과학적인 발견이나 지식가지고 성경을 쓴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의 발전이나, 진화나 창조나 무엇이든지간에, 모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전체로,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지막 때에 구원을 베푸시려고 하나님은 창조하셨고 창조역사를 지금도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창조는, 엿새동안에 만들어진 창조는, 그걸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쉼을 통해서 완성되느니라. 일곱 째날 쉼은 그냥 아무것도 손 놓고 쉼이 아니라 6일 동안 창조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엿새동안 일하는 것은 그걸로 완결된 모양이 아니고, 안식일을 기념하여 하나님과 함께 찬양할 수 있을 때, 6일 동안의 일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루 쉰다는 말은 일과 안식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활동의 성숙이요, 완성입니다. 그렇게 믿고 안식일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창조활동이 거룩하므로 안식일도 거룩해야 됩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너무 고마워서 그 분을 찾고 기도하고 올라갔더니 에덴동산까지 올라갔습니다. 

사실은 요즘에 나온 책 중에서 신의 이야기를 비판한 책들을 많이 여러분은 접하게 됩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이야기, 허친슨의 <위대하지 않은 신> 이야기, 그런데 이런 신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까지 항상 나올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세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단순한 질문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역사적 발전과 환경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실 유럽에서 또는 미국 대륙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최근에 들어서 911테러를 동하여 미국이 경험한, 서양의 기독교 세계가 경험한, 엄청난 집단적인 공허 앞에서 사람의 잘못, 사회의 잘못, 역사의 잘못을 뒤져보되, 특히 기독교 신앙, 종교, 이런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역사의 질곡과 맥을 보면서, 예컨데 911테러는 우리한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질문이 나옵니다. 이 도킨스라는 사람이 한 얘기 한토막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신은 망상이다. 미친 짓이고, 착각에 빠진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신병리적 작품일 뿐이다.” 뭐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종교는 악이다. 종교가 지구상에서 추방될 그 때, 진실로 평화가 있을 것이다. 종교인들이 만들어 낸 신은 쫌 좀스러운 신, 불공평한 신, 용납할 줄도 모르면서 자기 홀로 지배하고 싶은 지배욕의 화신, 복수심에 불타는 신, 피에 굶주린 인종 청소의 신, 여성을 혐오하는 신, 동성애를 증오하는 신, 인종차별과 유아살해에 앞장서는 신, 대량학살을 저지르고도 꼼짝 않는 신, 자기 자식도 죽이고 꼼짝도 않는 신, 전염병을 퍼뜨리는 신, 과대망상의 화신, 변태 성욕자 같은 신,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폭자”, 이런 비판입니다. 이 양반이 내놓은 신의 얘기를 봤더니 엄청난 비판입디다. 

제가 이걸 읽으면서 ‘아하~ 우리가 만든 신이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허탈감이었읍니다. 보니까 사실은 그 이야기는 신 이야기가 아니고요, 신의 이름을 빌어서 우리가 저질렀던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우리인간사회의 과실을, 신의 이름으로 드러냈습디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런 신으로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는 것 아닙니까? 종교는 망상이고, 신은 망상이랍니다. 신이 망상이어서가 아니라 신을 만든 우리가 망상에 빠진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러면서 신은 없다고 이분은 자꾸 주장합디다. 이런 신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까? 저는 그래서 이런 신은 "죽었다" 가 아니라, 이런 신은 성경말씀에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신은 뭐만 있느냐 하면 그런 신 말고 또 다른 신이 있습디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데, 사실 우리가 믿는 신은 악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망상의 산물입니까? 그 신을 붙잡으려고 이렇게 노력하십니까? 

이 긴 이야기를 제가 짧게 답변드릴 수는 없는데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2차 대전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나고 나서, 2차대전 참상의 본 진지였던 유럽대륙이 집단적 공허와 회의에 빠졌습니다. 유럽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기독교 왕국의 본거지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의 대륙입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다고 믿었던 수많은 역사, 인간집단, 그런데 그 곳에서 전쟁이 나서 수백만 수천만이 죽습니다. 아우성입니다. 아비규환입니다. 모든 사람이 질문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아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도대체 이런 일을 어떻게 자행할 수 있습니까? 질문이 사방에서 나왔고, 인간에 관한 질책도 나왔지만 우리가 믿는 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도 우수수 쏟아져 나왔습니다. 

2차대전 이후에 전 세기가 겪었던 사상적 철학적 또는 신학적 신앙적 고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금의 무슨 만들어진 신, 이 정도가 아니고요. 신은 정말 계신 겁니까? 우리가 제대로 그 신을 믿는 겁니까? 하나님은 계십니까? 수많은 답변이 있지만 그 때 답변 중 제일 중요한 답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타자의 하나님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지만 하나님은 내가 물건 같이 가져다가 내 마음대로 요리하고 규정하고 개념화해서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 땅에 함께 하시지만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컨트롤을 넘어선 절대타자이시지 하나님을 내 멋대로 요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은 죽어가는 인간의 고난 속에 함께 계셨고, 함께 눈물을 흘렸고, 함께 고통을 당했고, 함께 죽어갔고, 함께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나서 함께 죽은 다음에 죽음이라는 폭력 까지도 다 극복하시고 부활의 선물을 우리한테 주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은혜로 주신 분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것이 신학의 답변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신학사상,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가운데 하늘에 계신 신의 역사로 이 땅에 전파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보고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모든 진실을 인간이 만든 제한된 틀 속에 가두지 마라. 하나님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악용하지 마라. 아프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자기 기도 때문에 안 낫는다고 하나님을 없다고 하지 마라. 아니면 하나님을 죽었다고 이야기 하지 마라. 하나님은 지금도 그대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살아계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고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시니 하나님을 내 인간의 테두리 속에 묶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한테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비로서 창조도, 하나님도 깨달았읍니다. 그러면 신약을 읽으실 때, 어떤 걸 읽어야 신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예수의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가 누굽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 저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분의 십자가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숫자 이야기나 모든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십자가의 눈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면, 역사적으로 만나고 실존적으로 만나고 내 경험이 만나면, 거기서 하나님이 답변을 주실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쓰여졌습니다. 

오늘 그 예수께서 저희들한테 하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여러분, 나한테 오세요. 그 짐을 내가 받아서 함께 받아주겠습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그것이 쉬자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행복을 찾고, 축복을 찾습니다만, 혹시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험 안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행복하고 싶은데 지은 죄과가 너무 커서, 이 죄과를 떨쳐버리지 않고는 제가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가 지은 죄는 하나님과 나만 알텐데 이 죄를 가진 채로 나는 행복하다고, 나는 아무 흠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지요. 이렇게 놔둘 수가 없지요. 뭔가 잘못은 떨어버려야죠. 

예수님 말씀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은 죄와 죄과, 동시에 집단적인 민족이, 가정이, 사회가 저지른 모든 죄까지 포함하여 이 죄를 지고 꿈틀거리고 힘들어하면서 살때는 절대로 안식 못합니다. 안식이 뭐냐 하니까, 죄악을 떨어버립시다. 죄를 없앱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한테 와서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한테 죄를 고백하고 죄악을 고백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다 그분 한테 고백하면 그분이 용서하는 방식으로 죄과를 떨어버리십니다. 주님한테 오면 무거운 짐이 다 벗겨진다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무슨 짐을 졌길래요? 내가 고민이 뭐길래요? 고민도 죄과도 모든 것을 다 예수께 와서 예수한테 고백하면 그분 말씀이 그 고백을 듣고 함께 아픔을 걸머지고 용서해주고 그리고 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쉼은 그냥 일하다가 중단한다고 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떨치는 것이 쉼입니다. 엿새동안 일하시던 하나님의 손은 칠일 째 되는 날 그냥 놀리지 않는 손이 된 것이 아니라, 만드신 피조물을 다 끌어안고 너무 기뻐서 춤추며 노래하는 방식으로 안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진실로 평안과 평화와 쉼을 얻고 싶으시면 저한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의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우리의 짐을 받아 줄, 죄악을 받아 줄, 고민을 끌어안아 줄 십자가란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면 여러분을 내가 기다리면서 함께 짐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설령 죽는 일이 있더라도 같이 죽읍시다. 진짜 살고 싶습니까? 죽으세요. 살기 위해서 죽으십시오. 여기까지 내가 고통을 다 당해 드리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새로운 삷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여러 가지 역사가 있지만 예수께서 날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살아나셨고, 부활의 희망을 주었다는 이 사실 없이 예수 믿을 힘이 안 납니다. 내 역사가, 내 가정이, 모든 인류 역사가 잘못했지만, 십자가에 와서 털어놓고 용서함 받으면, 함께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주시는 주님께서 구원을 주심니바. 그러기에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오늘 우리가 쉴 수 있습니다. 쉼은 십자가에 오셔서 부활의 능력을 받아야 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말씀은 "구원"이다, 그렇게 만 말하지 말고 그 사실을 ‘재창조’라 하라고 하십니다. . 

저희들이 아프면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치유를 기원합니다. 하나님도 함께 아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병이 나서 죽게 되면 슬픈 노래를 부르십시다. 하나님도 같이 부르십니다. 결혼식 때는 기쁜 노래로 화답합시다. 애기가 태어나면 기쁘게 춤춥시다. 그리고 사람 목숨이 다하게 되면 슬퍼서 웁시다. 하나님도 함께 하십니다. 쉬자는 말은 아픈 것만 쉬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쁜 것도 가지고 오세요. 나하고 같이 즐깁시다. 슬픔도 가지고 오세요. 나하고 함께 웁시다. 죽음까지 가져 오세요. 나하고 함께 죽읍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랍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죽음, 슬픔 그 자체가 아니고 모든 것을 이긴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 주신 답니다. 그것을 여러분, 부활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부활이 죽고 살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인간 삶의 고비고비마다 이런 죽음과 창조의 역사가 계속 됩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집단적인 하나님 만나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첫 번 창조는 아담의 이야기로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사실이 너무 감사하면, 부활의 희망이 저한테 확신이 되면, 이 눈을 가지고 우리가 살았던 지난 일,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일을 함께 기획하고 믿고 나아갑시다. 이것이 예수께서 ‘그것이 진실로 쉬는 방법'이라고 하십니다다. 좀 쉽시다. 털어놓고 쉽시다. 감추고 쉬지 말고요, 다 털어놓고 쉬고 나면 우리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함께 재창조에 나서 줄 사람이 있답니다. 

그 분이 오늘 말씀하신 분,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짐을 다 받을 용의가 있다. 그러니 오라. 그럼 내가 재창조의 역사를 만들어 주겠노라.” 아멘.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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