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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리다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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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굼 (막 5:35~43)
 
가버나움 근처에 권세가 있는 회당장 야이로가 살았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생활 중심은 회당입니다. 한 회당의 책임자는 사회에서 굉장한 세력가에 속합니다. 회당장이라는 말 자체가 통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후진국 사회에서는 권세와 부가 항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이로는 그 사회에서 권세를 가졌으면서 부도 가진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어느 날 굉장히 어려운 일이 닥쳤습니다. 12살 된 딸이 별안간 죽었습니다. 소문난 권세가의 병든 딸이 죽었다고 하니까 온 동네에 그 소문이 삽시간에 다 펴져서 화젯거리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그가 얼마나 부유한 권세가 있었는지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열두 살 소녀가 죽었는데 훤화하는 사람들이 그 집에 많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훤화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유대 나라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문화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상갓집에서 곡성,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된다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옛날부터 훤화하는 문화가 있었고 유대나라는 아예 돈을 받고 울어주는 사람들이 직업으로 있었습니다. 돈을 받고 그 집에 가서 울어주는 겁니다.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울어주는 것을 훤화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유교장례식 문화에서는 이 훤화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상을 당해서 상주들이 쭉 서 있습니다. 조문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와서 같이 있으면 이 사람이 하는 훤화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소리를 냅니다. 어떻게 소리를 내느냐 하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훤화입니다. 일곱 마디로 이렇게 울어줍니다. 그러고 나서 절을 하는 문화가 있는데 울고 돈을 받는 직업적 울음꾼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회당장 집에는 권세도 있고 돈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와서 돈을 받고 교대로 24시간 훤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야이로는 자기 집에 닥친 큰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예수님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소문을 들으니까 예수님이 이런 문제까지도 해결하여 준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예수님을 좀 만나보자.’ 그래서 회당장이 예수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는 기록으로 오늘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짤막한 개인적인 이야기 가운데는 복음서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특징 네 가지가 관심의 초점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기 힘든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 세 번의 기록 중의 하나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세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밤중에 찾아왔다고 그랬습니다. 왜 밤중에 찾아왔는가?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밤중에 찾아온 겁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과 예수님은 지금 피차 배타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만약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소문나면 관직에서 물러날지도 모르고 어떠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못 보게 몰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의 요청을 다 들으시고 그의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찾아오기 힘든 신분이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이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잡아야 되는 사람이지 예수님께 어떤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을 붙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다 로마 군병들 아닙니까? 그 책임을 맡고 있는 백부장이 절대 세력의 감시를 받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찾아와서 사정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오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 나라의 모든 권세가들은 예수님과 대치 상태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고 있는데 그 책임의 중심에 서있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요청을 한다는 것은 큰일 날 일입니다. 그래서 세 사람 모두 다 예수님을 찾아오면 안 되는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세 가지 사건 중에 하나로 조명이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1~24절에 보면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만약 그 사회 대제사장들이 회당장의 이 일을 보았다면 그는 당장 파면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집에까지 찾아오셔서 소녀를 구원해 주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구하고 예수님에게 요청한다는 것은 이런 자세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나 백부장, 야이로와 같이 신분상 하기 어려운 일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여기 보니까 길바닥에 엎드리는 자세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런 믿음이어야만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우리의 요청을 해결 받는 것이지, 마치 예수님을 무슨 하인 부리듯 하는 그런 자세로 한다든지 불평, 불만에 기초해서 예수님께 요청한다든지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복음서 가운데 세 번 아무도 못 오게 하시고 제자 세 사람만 데리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열두 제자가 있는데 다른 제자는 오지 말라고 하시며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 신비의 광경을 그들에게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다른 제자들은 조금은 불만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차별대우를 하시는가? 왜 세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시는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 26장에 겟세마네 철야기도를 하실 때 예수님은 다른 제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그 밤에 외로운 기도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요청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 사건도 역시 그 방에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세 제자만 목격할 수 있도록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꼭 세 번 있었는데, 오늘 사건도 그 중의 하나로 취급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모든 것을 목격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앞으로 있을 그들의 사역이 크게 빛나게 예수님이 계획하신 것인데 그로 인해서 베드로는 기독교 역사에 초대 교회 최초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야고보는 기독교 역사에 최초 순교자의 피를 흘렸고, 요한은 계시록을 이 땅에 남김으로 말미암아 장차 되어질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우리에게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기록이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것을 살려주셨고, 누가복음 7장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장례식장에서 살려주셨으며, 오늘 말씀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크게 평가하셨기 때문에 세 번 밖에 하지 아니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이 말씀의 네 번째 특징은 성경의 기록되어 예수님이 직접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이 세 번 있는데 오늘 말씀은 그 중에 하나가 됩니다. 마태복음 27장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때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그 다음에 마가복음 7장에 갈릴리에서 귀가 어두운 사람의 귀를 열어주실 때도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렸다고 그 때도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 5장에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켜 주실 때 “달리다굼” 하심으로 아람어를 세 번 사용하셔서 그때마다 필요한 부분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장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셨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의 “달리다굼” 속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들어있는가? 그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부분이 되겠습니다. 달리다굼은 어둠을 물리치고 새로운 빛을 주시는 의미입니다. 야이로의 집안은 지금 꽤나 행복했던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하고 있었던 일이 그 집의 12살 된 귀여운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이 딸의 죽음은 그 가정을 어두움의 골짜기로 변하게 하셨고 어떤 조건도 위로가 되지 않는 괴로움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문제가 그토록 심각했기 때문에 지금 야이로는 자신의 모든 체면과 지위를 다 무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를 찾아가서 뭐라고 요청했다가는 자기의 위치는 다 없어지고 마는데 그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가버나움 주변의 그 많은 동네 사람들에게 받아오던 권세자의 모든 행동을 다 무시해버리고 길바닥에 엎드려서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최고의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지금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야이로의 눈앞에는 온통 세상의 어두움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한줄기의 빛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빛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얻지 못하면 다른 길은 전혀 없다.’ 그렇게 지금 믿고 있기 때문에 큰 권세가 있는 회당장이 길바닥에 엎드려서 예수님에게 간구하여 가로되 정신없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선물은 “달리다굼! 어둠은 물러가고 새로운 빛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 음악 좋아하신 분들은 흑인 음악가 로랜드 헤이스의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실 것입니다. 1900년대 초 유럽에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을 때 독일 음악계에서 그를 독일로 초청을 해서 베토벤 홀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이 독일 신문에 알려지자 온통 나라가 들끓었습니다. “아니, 베토벤 홀에 흑인을 세우다니? 이건 독일의 자존심이요 베토벤에 대한 모독이다!” 자존심과 우월감이 강하기로 소문난 독일 사람들이 데모를 하면서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되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서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우리가 먼저 표를 사버리자!” 방해자들이 먼저 가서 표를 다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극장 안은 반대자들이 가득 찼습니다. 헤이스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다 들어가서 훼방해서 공연을 못하게 하자!” 그래서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찼는데 마침내 약속한 시간에 헤이스가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자마자 온갖 야유를 다 퍼붓는 겁니다.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서려고 왔느냐? 당장 내려가라!” 모두 일어나서 야유를 퍼붓는데 정말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모욕적 언사를 다 쓰면서 “네가 노예의 자식으로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우리들 앞에 서느냐?” 별 소리를 다 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본 헤이스는 무대 중앙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때 극장 안에 모든 불은 다 꺼지고 오직 하나의 조명이 헤이스의 몸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10분 동안 계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내가 고요해 졌습니다. 10분 후에 그는 조용히 눈을 들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를 비추는 조명의 불빛이 두 뺨에 흐르는 눈물로 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의 피부를 어둡게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여! 내 마음과 영혼은 이 시간 어둡지 않게 하소서. 

오늘 저녁 검은 피부의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흰 피부의 어두운 마음을 가진 자들을 감동케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면서 그의 유명한 노래 “당신은 평화시요”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조용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스며드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노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베토벤 홀에 모인 모든 사람의 뺨에는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전에는 모두다 고개를 들고 헤이스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모두다 고개를 숙이고 헤이스만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24년에 있었던 이 일 때문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베토벤 홀에 흑인은 안 된다는 어둠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달리다굼! 어둠은 물러가고 새로움의 빛의 역사”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쓰러진 자여 일어나라! 꿈 많은 12살 소녀여,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누워 있느냐? 달리다굼 하라! 일어나서 저 푸른 세상으로 나가라! 저 푸른 하늘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꿈의 세계를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이제부터 세상은 네 것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나가라.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운명을 헤치고 나가라.”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베토벤의 음악 한 가지는 누구든지 다 잘 압니다. ‘교향곡 9번 합창’입니다. 그는 46살 때 고통받아오던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건강은 황달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했고 그 때 사회 환경은 나폴레옹의 몰락이 가지고 온 반작용 향락 무드가 고조에 달해서 베토벤의 음악은 다 식었습니다. 로시니의 희가극에 열광하고 있던 때입니다. 

어느 날 빛을 잃은 베토벤의 음악을 생각하며 로시니가 베토벤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이시여! 어찌하여 이 사회에 당신의 음악은 사라지고 나 같은 사람의 음악에 국민들이 열광하게 되었습니까?” 그때 바라본 베토벤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가난했으며 병고에 시달리는 처참한 모습에 로시니마저도 베토벤의 손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53세가 되던 바로 그때 그는 그 고난 중에서도 교향곡 9번을 완성했고 그 제목을 “환희의 송가”로 지었습니다. 그는 듣지 못하면서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5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08년 미국 뉴포트 연합회중교회의 담임목사인 헨리 반 다이크(Henry Van Dyke)가 바로 그 곡에다가 하나님 백성의 삶의 철학을 가사화함으로 우리가 찬송가로 부르고 있는 겁니다. 

“♬노래하며 행진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승전가를 높이 불러 주께 영광 돌리세♪”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환희의 송가를 불러달라고 해서 정명훈 지휘로 연주했습니다. 시각장애인 한국인으로 미국의 백악관 정책 보좌관이 된 강영우 박사의 신앙 고백을 여러분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한테 말하기를 당신은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떻게 그런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그러한 자리에 가게 되셨습니까?” 
“아닙니다. 역경과 고난을 딛고 일어선 게 아닙니다. 내가 시각장애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네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 나는 너를 도와줄 것이다.” 오늘은 장애인주일입니다. “

♬어둠 속에 잠자던 영혼 일어나라 일어나 걸으라 달리다굼 일어나라♪”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달리다굼의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왜 “달리다굼!”이라고 발언하셨는가? 그 뜻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몸은 건강하지만 믿음과 영혼이 누워있는 자들은 일어나라. 또 믿음은 있는데 내 주변에 모든 환경이 넘어져 있는 모든 자여, 일어나라! 모두다 달리다굼 하라! 달리다굼의 은혜가 아버지의 약속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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