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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들아, 화목하자 (잠 17:1~2, 살전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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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들아, 화목하자 (잠 17:1~2, 살전 5:4)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하늘나라를 닮은 작은 천국은 세 곳이 있습니다. 마음과 가정과 교회입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하늘나라를 닮았습니다. 가정도 하늘나라를 닮았습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훼손되기 전에 모습은 하늘나라를 닮은 것들이었는데 사람들이 타락하면서 하늘나라의 모습을 상실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창조의 마지막에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를 통하여 여자를 만드셔서 남자와 여자가 가정이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최후의 피조물입니다.

  가정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좋은 가정입니다. 성경적 원리대로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가정의 성경적 원리는 첫째, 하나님이 주인인 가정입니다. 가부장적 제도에서는 남편이 주인이라고 합니다. 모계 사회에서는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둘째, 가정의 모든 이치가 성경적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의 모습을 가정은 갖추어 나갈 때 좋은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성경적 인간관계를 이루는 가정이 성경적 가정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이하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인간관계를 이루어야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넷째, 성경적 가정은 서로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지키고 본분을 지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가정의 원리입니다. 좋은 가정은 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정원과 가정은 가꿀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은 정원을 가꾸듯이 해야 합니다. 가꾸면 가꾸는 만큼 아름다워집니다. 가꾸지 않으면 지저분하고 빨리 시들고 벌래도 생깁니다. 중국 격언에는 “평화로운 가정은 행복이 제 발로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을 평화롭게 가꾸면 행복은 절로 찾아오는 법입니다.

  가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학교랍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인간관계를 배우고, 삶의 도리를 배우고, 생활의 지혜를 배웁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정을 통해 습득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좋은 가정은 좋은 인격과 지혜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가정은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가정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9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4:15에는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 1:2에는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교회들이 가정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이 작은 연동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보면 “자식이 효도하면 양친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파괴되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또 옛말에는 조상이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따른다는 뜻의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有餘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혹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역사와 인륜의 근본은 가정입니다.

  이 시대는 가정들이 병들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가정에 상처가 많고, 결손가정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나 사회의 온갖 병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정의 파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총의 선물인 가정이 병들고 있습니다. 가정을 잘 보존하고 치유해야 할 사명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지엄하신 분부이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가정을 대치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편 128:1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3-4절에는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합니다. 가정의 풍성함과 윤택함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화목한 가정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화목은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은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이 참 가정입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가정에 어울리는 말입니다. ‘화목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입니다.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입니다.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가정들이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회복되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을 통하여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화목한 가정은 물질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잠언 17:1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가정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15:17에는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요즘에는 말을 좀 바꿔야 합니다. 광우병이니 조류독감이니 해서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나 닭을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채소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바꿔야 할 판입니다.

  화목한 가정은 물질을 초월하게 해야 합니다. 물질을 초월한다는 말은 가정은 물질 보다 정신과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질이 사랑의 근거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신문에 보면 혼수 문제로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혼수하고 삽니까, 사람하고 삽니까? 혼수가 행복의 척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질 분배를 잘 해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유산을 잘 분배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세상 떠나고 유산문제로 자녀들이 쪼개지고 싸우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이 아니라 더 좋은 유산을 많이 물려줘야 합니다. 신앙과 정신적 유산을 물려줘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의 재산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54조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일년 예산의 삼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아들에게 1,000만 달러만을 준다고 합니다. 54조원의 재산 가운데 아들에게는 100억 원만 준다는 말입니다. 100억 원도 우리 입장에서는 적은 돈은 아니지만 54조원에 비해보면 돈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유산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 듯합니다. 더 좋은 유산을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는 “부모가 나의 마음에 남겨 주었던 것을 나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좋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물려받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을 좀 물려받은 사람은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신앙, 좋은 인격, 좋은 정신, 좋은 성품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의 기록 가운데 약 6분의 1이 돈과 그 위험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재물이 항상 인간의 올무가 되고, 인간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 곁의 무리 중의 한 사람에 와서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14절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이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형제들의 유산 다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의 ‘형제투금’(兄弟投金)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형제가 금덩어리 둘을 주워 하나씩을 나누었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갑자기 동생이 그 금을 강물에 던집니다. 깜짝 놀란 형이 왜 금을 물에 던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동생은 금을 가지고보니 형만 없었으면 금 두덩어리가 다 내 것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던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도 자기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서 금을 강물에 던졌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잘 아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자녀가 많았고 동생은 가난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형은 가난한 동생의 창고에 곡식 단을 몰래 옮겨줍니다. 동생은 자녀가 많은 형의 창고에 옮겨줍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옮겨줬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가 서로 곡식 단을 어깨에 메고 가다 달빛 아래서 서로 만납니다. 서로의 창고가 똑같이 채워져 있는 것을 안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통곡의 벽’은 바로 형제가 만나서 울었던 그 자리라고 합니다. 이 두 이야기들은 모두 실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이야기지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어떤 이는 해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남편이 현지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아직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아들과 함께 현지에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서 한국에 와서 장례를 치렀답니다. 그런데 시동생이 둘이 있는데 동생들은 혼자 된 형수를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재산과 보상금을 조금이라도 뜯어가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있답니다. 이것이 부인에게는 남편 세상 떠난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부의 사랑보다 돈이 앞서고, 형제 우애보다 돈이 앞서는 사회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화목이란 기대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이 되어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한 앉은뱅이 걸인을 만납니다. 걸인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좀 얻기 위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돈을 기대하지 말라. 더 큰 것을 기대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돈을 주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일어납니다. 그들이 승리합니다. 형제간에 화목합니다. 요즘에는 은과 금은 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시작됩니다.
  
칼 메닝거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환자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재산으로 무엇을 할 생각입니까?” “걱정할 일 밖에 안 남았지요.” “재산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오, 재산을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두려워요”. 편하게 죽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재산이 적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산을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돌고래 이야기를 보면 아주 감동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돌고래의 집단사망 원인은 궁지에 빠진 몇 마리의 동료들을 저버리지 못해 무리 전체가 죽음을 택한 결과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돌고래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질보다 사랑으로 뭉친 화목한 가정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화목한 가정은 다스림을 받을 줄 압니다.

  잠언 17:2입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 이 말씀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종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대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된 집안에서는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종이 다스리고 꾸짖는다는 말입니다. 꾸짖을 수 있고 꾸지람을 듣는 집안은 정말 잘 된 집안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성장하고, 인격이 된 사람이며, 큰 인물은 아래 사람의 말도 경청하고 마음에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한 다음에 선지자 나단이 와서 자신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나단은 “당신이 한 마리 양을 가진 주인의 양을 빼앗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그 말에 “내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위대성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아마 그렇지 못한 왕이었으면 나단을 단칼에 목을 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으뜸인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자기의 까마득한 후배와 같은 바울이 책망했을 때 그 책망을 달게 듣습니다. 갈라디아서 2:11에 보면 바울이 이방인과 함께 외식하는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합니다. 이 때 베드로는 얼마든지 바울에게 대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 때 바울과 베드로가 다투었다면 초대교회는 크게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아래 사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수용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들을 줄 알고 다스림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녀 서로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가 자녀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의 말을 수용하고, 자녀의 요구를 응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고 화목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갈비뼈를 뽑아 만드셨습니까? 다리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하와가 아담을 밟는 습성이 생길 것입니다. 팔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매일 삿대질하며 살 것입니다. 머리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하와가 아담의 훈장 노릇을 할 것입니다. 턱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말이 많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어깨뼈를 가지고 거들먹거릴 것입니다. 목뼈를 가지고 만드셨다면 교만할 것입니다. 갈비뼈는 팔 밑에 있으니 보호의 뜻입니다. 심장에서 가까우니 사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잘 보호하고 사랑하라고 갈비뼈를 가지고 만드셨답니다. 부부는 서로 보호하고, 서로 감독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사랑하라고 지어주신 짝입니다. 모든 가족 관계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탈무드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방심과 태만은 일순간에 불행을 몰고 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 조언과 충고가 화목한 가정을 만듭니다. 가족은 서로가 사랑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 간에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면 비난의 화살을 쏩니다. 이 화살은 백발백중 상대방의 가슴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흔히 부부간에도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힘겨루기를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다스림 받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서로가 존경하므로 상대방의 충고를 수용하는 자세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아래에 서는 자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하고 군림하면 이미 사랑도 아니고 가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세우신 제도는 교회와 가정뿐입니다. 가정은 이 땅에서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정은 소우주이며 작은 왕국입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왕이며 아내는 왕비입니다. 자녀는 왕자이며 공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왕이 많습니다. 남편은 공(公)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최근에는 왕국이 깨지고 분쟁이 심합니다. 차라리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으로 하자고 할지 모릅니다. 가족 모두가 평등만 주장합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가정에 심방을 하여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가정에 가보니 시어머니와 며느리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가정은 간절하게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며느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보다 자기의 일이 중요합니다. 특히 커리어 우먼들은 아기보다 일이 훨씬 더 중합니다. 목사님께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데 며느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물론 ‘아멘’도 안 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목사님의 기도 한 마디 한 마디에 큰 소리도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며느리는 아기를 못 낳았는데 시어머니가 또 아들을 낳았대요.

  결혼하거든 아기도 낳으세요. 아기를 낳는 것은 가정의 특권입니다. 가정의 축복입니다. 가정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일입니다. 아기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입니다.

  화목한 가정은 서로가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적 다스림은 지배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일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조심하고 배려하고 절제하는 것도 중요한 가족의 의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쌍방의 충고를 감사히 받고, 부모는 자녀의 충고를 기꺼이 받는 것이 화목한 가정이 되는 비결입니다.

결론 

  영국 왕 에드워드는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의 규례는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하려면 18살이 되어야 했습니다. 승정원은 에드워드 왕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자를 지배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폐하!” 여자를 다스리는 것은 정말 어려워요. 탈무드에는 여자를 울리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은 만일에 남자가 장가를 들었으면 군대도 보내지 말고 일 년 동안은 그 아내를 즐겁게 해주라고 합니다(신 24:5). 결혼과 가정의 중요성을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27:1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참된 행복은 우리의 가정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이 세워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셔야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들이 성경적 가정관을 가지고 화목하고 좋은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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