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나 속의 하나님 (욘 4:9~11)

  • 잡초 잡초
  • 350
  • 0

첨부 1


요나 속의 하나님 (욘 4:9~11)

우리 나라 주변에는 여러 가지 난리의 소식들이 많습니다.
미얀마와 중국의 사태가 그렇고 북한의 굶주림의 소식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때 저는 요나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요나서의 가장 큰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외의 다른 나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니느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나누고, 선지자 ‘요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나누겠습니다.


1, 니느웨(앗수르)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니느웨’는 ‘앗수르’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북쪽 위에는 ‘아람’이라는 나라가 있고 ‘아람’ 옆에 ‘앗수르’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우리 위에 ‘북한’이 있고 그 위에 ‘중국’이 있죠?
‘남한’이 ‘이스라엘’이라면 ‘북한’은 ‘아람’이고 ‘중국’이 바로 ‘앗수르’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앗수르는 별로 반갑지 않은 그저 그런 나라입니다.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나라입니다.

대영 박물관에 있는 ‘앗수르’관에 가면 그들은 전쟁을 할 때 화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전쟁의 주요 장면들을 그림으로 기록에 남기고 ‘부조’로 남겼다고 합니다. 거기 의하면 앗수르는 전쟁할 때 적군을 살아있는 체로 껍질을 벗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창에 달아 성벽에 메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앗수르’는 굉장히 무섭고 잔인한 나라입니다.

니느웨라는 성은 나훔에 3:1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니느웨를 ‘피의 성’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요나1:2에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앗수르의 니느웨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가 요나서에 나옵니다.
니느웨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는 사람이 선지자 ‘요나’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을 때 불순종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조직의 쓴 맛을 보고 죽을 뻔하여 결국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성은 사흘 동안 다녀야 될 만큼 큰 성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큰 성읍에서 요나는 사십일 후에 이 성이 무너진다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심판의 메시지도 대충 대충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듣고 반응합니다. 3:5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요나의 메시지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베 옷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애통의 표시’이며 ‘회개하겠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니느웨의 왕도 3:6에 의하면, 그 소식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왕과 대신들은 조서를 내려서 니느웨에 금식과 회계를 선포합니다. 

3:8입니다.
“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모든 나라의 짐승들까지도 다 금식하며 회개하고 생활을 바로 잡습니다.
이러한 회개가 우리 나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독한 그들의 금식과 회개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3:10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너무 악독해서 심판할 수 밖에 없는 니느웨가 요나의 “40일 후에 성이 무너지리라.”는 말에 회개하고 금식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셨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나라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자신의 뜻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자랑스러운 하나님이십니까?

세상 어느 신이 인간에 따라 돌이키십니까?
다른 종교들은 신을 돌이키게 하려면 ‘달래야’합니다.
돈을 듬뿍 바친다든지, 정성을 바친다든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면 당신의 뜻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니느웨의 하나님은 사람의 결정에 따라 당신의 작정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중 어떤 분들은 선택교리로 고민하는 분들 계시죠?
“이미 다 정해졌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냐?”고 포기하시는 분들 계시죠?
이방나라인 니느웨의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멸망당할 놀라운 짓을 하고 죄를 저질러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우리의 불쌍한 요나선지자는 또 조직의 쓴 맛을 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40일 후에 무너진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나서 그것을 지켜봅니다.

4:5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언제 무너지나 기대를 가지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굉장히 덥고 뜨거운 사막지역입니다.
거기서 초막을 대충 짓고 있으니 낮에는 무지 덥고 밤에는 추웠을 것입니다.
밤의 추위야 불을 피던 담요를 덥든지 하면 좀 낫습니다.

그러나 낮의 더위는 그때 ‘에어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선풍기가 있던 것도 아닙니다.  
대충 초막의 지붕은 얇은 나무나 대충 하루 이틀 만에 만든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하면 40일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40일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는 것입니다.

41일이 되고 42일이 되고 43일이 되어도 아무 일도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에서는 대신 찬송소리 기도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로서 자기의 체면이 구겨지고 꼭 망했으면 좋겠는 나라인 앗수르가 망하지 않아서 속이 상하고 부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삿대질 하면서 대듭니다.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난리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이 자라게 하셔서 그 초막을 덮고 파라솔처럼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막에 가면 그늘만 있어도 정말 좋습니다. 살 만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박넝쿨이 자란 날부터 박 넝쿨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40일이 지나 망해야 할 니느웨는 멀쩡하지, 자기는 힘들지, 거기서 아무 낙도 위로도 없는데 오로지 박넝쿨만이 자기의 위로고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박넝쿨과 사랑에 빠진 다음 날 하나님께서는 이가 튼튼한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신 튼튼한 이로 박넝쿨을 사정없이 물어뜯어 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날 아침에 해가 뜰 때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서 요나에게 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날따라 햇빛도 강렬하게 자외선을 듬뿍 내리십니다.

이 상황은 더운 사막 나라에 가서 뙤악볕에 에어콘 야외 실외기 앞에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요나는 하나님께 또 삿대질이 나옵니다.
아주 난리를 칩니다. 성질을 냅니다.
하나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난리 난리를 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시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4:9에 보시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그랬더니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합니다.
요나가 공손하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갖은 성질을 다 부리면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4:10, 11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악독한 니느웨를 향한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이 큰 성읍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십이만 여명이라고 하십니다.
가축도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신다고 합니다.

너는 니가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은 하루 나았다가 시들어 버린 박넝쿨도 아꼈는데 내가  수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을 아끼는 것은 왜 모르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 기쁘게 당신의 뜻과 심판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독한 니느웨도 사랑하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 주변 국가들의 어려움과 위기를 보아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나라나 기독교를 믿는 국가 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나라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나라들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선 미얀마와 중국을 향해 어떤 마음이실까요?
니느웨를 향한 같은 마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나라와 민족들을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그 니느웨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오늘 우리는 미안마와 중국의 어려움을 보고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정성을 다하시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요나서에 나타난 요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요나의 하나님

요나서 속에 나타난 요나의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요나를 택하시고 요나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지난 주 4부 예배에는 그 요나의 모습을 설교하였습니다.
요나의 모습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정 반대의 곳으로 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모습은 심한 어려움과 폭풍 속에서 깊이 잠이 든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요나의 모습은 스스로를 속이고 불순종 가운데서도 자기는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자라고 자만하는 모습입니다. 그러한 모습의 요나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첫 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를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평소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나의 성품과 기질을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요나 1:1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을 통해서 하시기로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원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튀고, 자고, 자만하는 요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요나 같은 나를 쓰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요나를 쓰셨다면 우리도 능히 쓰실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온 열방을 향해서 누군가를 쓰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 누군가가 여기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저 같으면 요나처럼 그렇게 하면 천사 애들 풀어서 즉시 암살할 것입니다.
아니면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던졌을 때 아예 물을 많이 먹여서 처리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큰 물고기에게 요나를 토하라고 하지 않고 ‘소화시켜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거두십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정 반대로 가는 배를 탔을 때 하나님은 그 배를 같이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가 요나 때문에 이런 폭풍을 만난 것을 알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배에서 던지라고 선장에게 이야기했고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을 지나면서 그가 회개하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회개한 것이 바로 요나서 2장입니다.

그리고 요나서 3:1에 가면 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시지 않고 끝까지 붙잡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로 요나의 하나님은 ‘요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처음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서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큰 물고기    뱃 속에서 요나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2:9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면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3장으로 가면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요나에게 임해서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 명령은 바로 40일 후에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분명 사흘 동안 걸어 다녀야 할 만큼 큰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성에서 얼만큼을 다닙니까? 

3:4입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삼일을 가야 하는 성읍에서 하루 동안만 대강 대충 전했습니다.
그렇게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는 요나를 하나님은 용납하고 쓰십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참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의 하나님은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말대로 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그 일에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내었다고 4:1에 나와 있습니다.
바락 바락 우기고 성질내는 요나를 하나님은 차근 차근 가르치십니다.
자기 조국 이스라엘만 생각하는 요나에게 적국이 되는 앗수르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십니다.
온갖 자연학습 즉 박넝쿨을 사용하셔서 가르치십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차근 차근 가르치십니다.
요나의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뜻을 차근 차근 때에 맞추어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런 요나의 하나님이 참 좋고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에 나 같은 사람을 쓰시고, 내가 부족하고 완악하여도 포기하지 않으시며,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정말 좋습니다.

저는 요즘 우리 나라와 주변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의 소식들을 접할 때 자꾸 ‘요나’가  생각납니다. 이 때에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요나서를 통하여 이웃 나라의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가르치십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정말 멋진 것은 요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다 복을 받습니다. 요나와 같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탓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나가 말씀을 전한 니느웨의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또한, 요나가 속한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어떤 복을 받을까요?

말씀을 마치면서 요나를 통해서 그의 조국 이스라엘이 어떤 덕을 보았는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시대라면 누가 뭐래도 ‘다윗 솔로몬 시대’입니다. 최고의 영화와 최고의 영토를 누린 황금시대가 그 시대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나라가 둘로 나뉘웁니다.
12지파 중 북쪽의 10지파 정도가 모여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남쪽에 두 지파가 모여서 ‘유다’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시대가 시작되면서 주변국가들 특히 ‘아람’이라는 강대국의 학대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과 이스라엘이 많이 위축되고 있었는데, 남유다의 요아스왕,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그 영화가 솔로몬 때만큼이나 회복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회복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로보암왕 2세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열왕기서나 역대서를 읽어보면, 여로보암이나 요아스 왕을 훌륭한 왕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과 유다는 아람이라는 나라에 괴롭힘을 많이 당하고 위축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 2세때 아람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침공하거나 괴롭히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가 속한 ‘앗수르’라는 나라 때문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앗수르는 굉장히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그 앗수르가 아람을 위협하고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잔인하고 용맹한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아람은 이스라엘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왕 2세와 요아스 왕이 아람을 역 공격해서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았을까요?
아람이라는 나라보다 이스라엘이 더 쓸모 있고 전략적인 요충지인데도요?
그것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왕부터 다 이스라엘을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일까요?
바로 ‘요나’때문입니다.

대충 대강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요나 때문에 자기들이 멸망당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이스라엘에 호감을 갖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요나가 고생은 했어도 그 덕은 그의 조국이 본 것입니다.
솔로몬 왕 이후로 솔로몬 왕의 영화를 다시 회복하는데 요나가 쓰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나의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삼고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들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국이 그 덕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여러 어려움들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그 일에 앞장서는 교회들 중 하나가 바로 우리 교회입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아니 조금만 더 애쓰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고, 우리가 섬긴 새터민들과 가난한 자들과 인재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국도 우리 덕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희년운동을 벌이고 있고 오늘 재난 당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너희 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희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