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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선생의 길 (히 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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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길 (히 5:12~14)

어느 시골의 총각 선생님이, 출근길에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징검다리를 잘못 밟아, 그 선생의 신발과 바지가 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집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서울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가 집에 와 계셨습니다.  아들이 바지가 젖은 채로 들어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여차여차해서 그랬다.  설명을 하니까, 어머니가 정색을 하며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네가 잘못 밟았던 그 돌은 바로 놓고 왔느냐?” “아니요, 그냥 왔는데요.” “아니, 어찌 그 돌을 바로 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느냐?” “예, 어머니, 그 생각은 미처 하질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그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나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아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백 번 생각을 해봐도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얼른 가서, 그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후로 그 젊은 선생은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의 자세로 임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참 크지 않습니까?  
남을 배려하고, 남이 넘어지지 않도록 바르게 이끌고 세워줄 줄 아는 인생의 모습, 젊은 아들 선생을 위해,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바르게 교훈하며 가르쳤던,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우리 모두는 진정으로 새겨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가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어린 생명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주일학교 교사들, 또는 신앙의 부모님들은, 이런 가르침을 꼭 새겨야 할 줄로 압니다.  왜입니까?  가르치는 자로서, 이런 마음의 자세가 없다면, 결코 바른 신앙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가르치는 자가 되지 못하면, 결코 존경받는 선생이, 또는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이 사실 공식적인 스승의 날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스승의 날을, 우리는 참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조그만 선물이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도에 지나친 선물, 과도한 선물, 이러한 것을 어떤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학생들이나 부모들에게 요구하다보니까,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생들에게 드리는 감사의 선물이, 지나치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다 보니, 그만 스승의 날에 학교 문을 닫고 쉬는 학교가 많아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물의를 일으키는 선생님들이, 몇몇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전체 선생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부 몇몇  물의를 일으키는 교사들 때문에, 전체 교사들을 그렇게 매도한다는 것은, 썩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학교가 요즘과 같이 이런 휴교 결정을 많이 하게 된, 드러나지 않은 다른 배경을 살펴보게 되면, 교사들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스승의 날에 휴교를 결정하게 된 것이,  꼭 이런 선물 부작용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러면 또 무슨 이유가 있는가?  교사들 스스로가 휴교를 더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승의 날의 부작용을 핑계로, 하루를 더 쉬겠다는 이유가, 교사들 사이에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전전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끼리는 서로 통한다는 거지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아니해도, 내 속 사람인 마음의 모습은, 나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 마음이 결국에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들의 그런 마음의 자세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알게  모르게 다 전달이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런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무슨 존경을 받겠습니까?   또 선생님인들, 학생들에게 무슨 권위가  세워지겠습니까?   존경과 권위가 없는 학교 현장에, 무슨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학생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냐고 물었더니, 학생들 가운데, 단 15%만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이렇게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선생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는가?  

교사들을 경시여기는 사회적인 풍조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학생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가, 결국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평가를 듣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현직 교사들의 비애가, 단순히 교사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떨어뜨리려고 하는 사회적 현상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스승과 같은 선생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시대인데, 이런 대우와 평가를, 교사들 스스로가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 형편없지 않습니까?  학교에서의 선생님의 권위보다, 교회 주일학교에서의 교사들의 권위는 더 떨어집니다.   주일학교 교사들에 대한 존경심도, 거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주일학교 교사들의 형편이, 이렇게 형편없게 되었을까?  
그 책임 역시도, 사회적인 풍조나, 배우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책임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교사들,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 스승의 주일인데, 어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은 안 해 주시고, 이런 가슴 아픈 말씀, 찔리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교사들 사기를 더 떨어뜨리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분명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주일 한번 위로받고 격려 받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일회성 아닙니까?   저는 우리 교사 분들이 오늘 하루만 아니라, 일년 내내 학생들에게, 또는 학생들을 맡긴 부모님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교사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사로서의 보람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랄프 M. 스미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신앙 인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를   했습니다.  “아홉 살 때에 나는 핫스프링 제2침례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은, 우리 반 교사를 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장난꾸러기들이었고, 다루기가 힘들어서, 교사가 임명되었다가도 우리들에게 질려 곧 그만두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우리 반을 맡으실 선생님 한 분을 소개했다. 
그분은 별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였고, 글도 간신히 읽는 정도였다. 공과공부를 지도할 때면 학생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여 성경구절을 읽게 하고는, 그 본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렇지만 그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정말 사랑했고, 우리도 또한 선생님을 무척 사랑했다. 
언제나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건전한 활동이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순서를 준비해 오셨다.  그 분은 우리들의 거친 행동 속에서, 오히려 장차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훌륭한 봉사자로의 감추어진 자질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3년간이나 그 선생님께 배웠다.  우리와 우리 반을 향한 그 분의 믿음과 성실성은, 실로 놀라운 복으로 보답되었다.  그 반 학생들 가운데서 변호사와 판사가 각 각 한 명씩 나왔고, 목사님이 세 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심전심이란 말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일화이지 않습니까?   마음은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일컬어 사랑이 메마른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이기에 더욱 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 사랑을 누가 전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교사들, 주일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해 나간다면, 그들의 영혼이,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생각이, 그들의 장래의 모습들이, 왜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교회 주일학교에, 이런 사랑이 많고, 진정으로 헌신된 교사들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우려고 하고, 그저 학생들에게 인정받기만을 바라고 있는 교사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주변에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다 떠나가 버립니다.  먼저는 아이들의 마음이 떠나가고, 나중에는  아이들의 몸도 떠나갑니다.   그래서 그런 선생님들 주변에 아이들이 없어요.  

새롭게 반을 맡아 한해를 시작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그 교사를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아이들과 달리, 얼마나 귀한 영혼들  입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이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수고한 분들이 또한 얼마이겠습니까?   그런데 교사들의 노력이나, 사랑부족으로 이런 귀한 영혼들을 다 놓쳐버린다면,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주님이 묻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사들이, 이 선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꼭 유념해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 앞에서는,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을 받는 자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약 3 : 1절에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무나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그 결과를 심판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도함을 받는 자나, 인도하는 자나 똑같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인도한 소경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결코 소경에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앞 가름을 못하면서,   누구의 앞 가름을 해 주겠습니까?   자신도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서, 누구에게 비전을 심어줄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교사가 되지 말라는 소리냐?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겠지요.  이 말은, 교사의 직분을 감당할 때, 아주 조심 있게, 아주 각별한 주의를 기우려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라는 말인 것입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그들에게 상처가 되거나, 실족케 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이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려가 없이, 일반 학교 교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중학생이,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로 뛰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선생님이, 그 아이를 따라가서 혼을 내고 귀를  땡기며 예배실로 끌고 온 것입니다.   

이 아이가 예배 시간에 도망가는 줄 오해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이가 핑계를 대는 것처럼 일을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그 아이는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아이는 그 이후로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사의 배려심 없는 한 행동이, 결국 한 영혼을 실족케 하고, 교회를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 18 : 6절에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왜 주님을 믿는 한 소자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목을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나으냐?  주님이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시고, 그에 대한 심판을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이 맡겨주신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소중히 여기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런 책임감이나,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무책임하게, 불성실하게 교사의 직분을 감당한다면, 그래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실족케 하고,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면, 그런 교사들은 분명 심판의 날에,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그러나 선생 된 교사들이 가르치는 자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안다는,   이 말씀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만큼 선생 된 자의 상급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왜 선생 된 교사들의 상급이 큽니까?  그들이 행한 놀라운 업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선생이라는 직업이 무엇입니까?   사람 만드는 직업 아닙니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데려다가, 사람다운 사람 만드는 것이 선생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인고의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하겠습니까?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네에,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동네에서 평판이 아주 안 좋게 나 있는 아이  였습니다.  얼마나 행실이 좋지 못한 지, 학교에서도 골치를 썩고 있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고, 포기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해 온 한 교사가, 이 윌리암이라는 아이에 대한 말을 듣고서는, 그 아이를 한 번 지도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가 말렸습니다. 괜히 헛수고 하지 말고, 나중에 봉변이나 당할 테니, 그냥 내 버려두라고,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사는, 이 윌리암이라는 아이를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윌리암이란 아이를,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잘 지도해 나갔습니다. 
그 교사는 못된 성격을 가진 그 아이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말로서가 아닌, 몸으로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참된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포부를 심어주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일에 말처럼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수없이 반항하고, 수도 없이 가르침을 거부하는 그 아이를 놓고, 이 교사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 하나를 놓고, 매일 같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으로 그 아이를 훈계하며   양육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이 아이는 그 교사의 정성과 사랑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고, 자신에게 심어준 미래의 포부를 위해, 밤잠을 안자며 공부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법률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또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우등생이라는 명예를 안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이는, 나중에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또 나중에는 뉴욕 주의 주지사로, 또 나중에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몹쓸 인간으로 낙인 찍혀 버림을 받았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있는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노력과 수고가 있는 것이, 선생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세월의 인내가 필요하고, 또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고, 또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를, 주님이 결코 모른 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위로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 가지고, 교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위로와 격려뿐만 아니라, 더 큰 축복이 준비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그 귀한 영혼을 바로 잡아 일으켜 세우고, 또 주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만들었을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라도, 그런 교사들에게 주시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쏟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그 인생에 주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이 충만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른 사람들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했으니, 주님이 그 교사의 자녀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한 영혼, 한 영혼 사랑하며, 정성을 쏟았기에, 주님이 내 자녀들을 이와 같이 사랑하며 정성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교사의 이러한 수고로 한 영혼이 돌아올 때마다, 주님은 내 인생에 잃어버린  귀한 것들이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물질이 돌아오게 만들고, 건강이 돌아오게 만들고, 자녀들이 돌아오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놀라운 주님의 은혜입니까?  이런 귀한 은혜, 축복, 누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까?   정말 헌신된 교사들에게, 정말 선생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교사들에게 주시는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주일학교 교사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천교회에 속한 모든 주일학교 교사들이, 이런 귀한 은혜와 축복, 다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 교사들이, 이 선생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꼭 유념해야 할 사실이 무엇입니까?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신앙적으로, 지식적으로, 줄 것이 풍성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세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때가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격 없는 선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뭘 알아야 가르칠 것인데, 교사로 일하는 사람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가르칠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교사들이 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가만히 보세요.  무슨 소리 합니까?  맨 날 세상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지식이 없는데, 어찌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데, 어찌 아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맨 날 딴 소리 하는 것이지요.   그 아이들의 영혼이 말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치는데, 일주일 동안 한번도 교제를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러다 언제 공과를 살펴봅니까?   토요일 저녁이라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주일날 아침에 공과 내용을 잠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해한 내용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떠든다고, 말 안 듣는다고,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한 마디로, 교사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날 교사들이, 이렇게 실력 없는 교사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는가?  그 이유를, 우리는 오늘 본문 앞 절에 있는, 11절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너희는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다시 말해, 교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안 듣는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를 잘 안 드린다는 겁니다.  교사들이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교사들이 예배를 등한시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은혜의 사모함이 없습니다.  

그냥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같이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내 버린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심전심이란 말, 제가 설교 서두에 했지요?  
마찬가집니다.  아이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압니다.  누가 압니까?  
그들의 영이 다 안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가르칠 때, 세상 이야기하며, 아이들과 재밌게 지내면, 육신적으로는 아이들과 친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점점 더 여러분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을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영혼 없는 아이로, 알곡이 아닌,   가라지 같은 아이로 자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결국에는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또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교회에서 바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천교회 안에는, 이런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교사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교사들이 다 완벽하고,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다 재능 있고, 능력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은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항상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애살이 있을 때, 성령님이 그런 교사들을 도우셔서,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정말 그 아이들의 영혼에 좋은 선생님으로  각인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교사들은, 또한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교사들이 있습니까?   먼저 배우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장년들이 교사의 직분을 맡고 계십니까?   교회 안에 정착되어진, 제자훈련   과정에 들어가 배우시길 바랍니다.  또 청년들이 교사의 직분을 맡고 있습니까? 청년부 예배에 잘 참석하시고, 여러분을 지도하는 교역자들을 통해 성경공부를 잘 하시길 바랍니다.   배우는 것이, 곧 여러분의 자산에 되는 것입니다. 

그 자산을 통해, 여러분이 맡고 있는 아이들을, 더 풍성한 지식으로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보다 더 분명하게,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가르치는 그 아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강건하게 잘 자라나겠습니까?  
그런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비로소 교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의 모든 교사들은, 배우는 일에 힘쓰면서, 마땅히 가르칠 수 있는, 능력 있는 선생이 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꼭 알아야 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훌륭한 선생으로서의 교사들은, 결코 자기 혼자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관심과 기도, 교사들을 향한 따스한 말 한 마디의 위로와 격려, 이러한 것이 한 데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훌륭한 선생으로서의 교사가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족해도 자꾸만 관심을 가져  주시고, 격려해 주실 때에, 더 용기가 나서 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이 많은 힘을 잃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회 성도들의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같이 존경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열악한 교회의 교육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교사의 직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부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도움이나, 지원은 없고, 그저 부흥의 열매만을 다그치며 몰아 부칠 때, 교사들은 힘이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있던 열의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날이 지난 주 목요일이었지요?  
학교가 휴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어김없이 선물을 그들에게 안겨 줍니다.   그러나 스승의 날이 이미 지나도, 또 교회에서 스승의 주일이라고 광고를 해도, 별로 교사들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꼭 무엇인가를 대접받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무관심이 교사들을 슬프게 하고, 힘을 잃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갈 6 : 6절에 보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이,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한, 마땅한 예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라고 하는 이 말씀은, 또 다른 의미로는, “마땅히 제자가 될 터인데” 라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은 마땅히 주는 자입니다.  그러나 제자라고 해서 무조건 받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제자들도, 선생을 향해 마땅히 주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향해 마음을 주고, 감사를 주고, 사랑을 주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아직 어려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 부모가 이를 가르치고,   그 아이를 통해 대신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에 대한 예의요,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선생의 길은 참으로 어렵고도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자주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 동반자가 있다면,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또한 힘겹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이 길을 갈 수 있고, 더 용기를 내서 달려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주일학교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은, 자신의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시금 각오하는 가운데, 좋은 선생으로서의 교사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모든 성도님들은, 이렇게 힘들고, 외롭게 선생의 길을 가는 교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후원하면서, 더 훌륭한 선생으로서의 교사들로 세워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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