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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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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갈 1:1~5)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회람용 서신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A.D. 46-48)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지역들은 갈라디아 왕국이 있었던 북쪽 지역은 아니었고, 로마 행정 구역 분류상 갈라디아로 불린 남갈라디아 지역에 속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A.D. 49)가 열리기 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2차 전도여행 중이나 3차 전도여행 중에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루터가 그의 아내 캐더린 폰 보라(Catherine von Bora)의 이름을 별칭으로 붙이고 이 서신과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이라는 중심사상에 있어서 로마서를 요약해 둔 듯하여 ‘작은 로마서’라 불리기도 하고, 반율법주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음으로 해서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of Christian Liberty)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서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독특하게도 전개될 본문의 내용을 서두에서 이미 특징적으로 요약하고 시작합니다. 오늘은 이 서신의 서문 중에서 문안 인사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절을 봅시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이 쓴 다른 서신서 들에서도 사도권이 언급 됩니다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도권의 신적 기원에 대해서 거창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온 형제들이 교인들에게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도록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수고한 모든 노력들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도권만 부인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권이 부인되면 그가 전한 말도 예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가 있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도 바울 개인의 생각과 의견에 불과하게 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의 말에 불과하게 되지요. 하지만 사도권이 인정되면 그가 전한 복음은 무오류한 신적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수호를 위해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하게 변호하며 싸웠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오늘날 교회에 있는 직분들과는 독특하게 구별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에는 사도를 ‘교회 창설직원’으로 따로 분류했습니다. 오순절 이후 교회가 막 창설될 단계에 필요했던 직분이며 지금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유대인들은 보냄 받은 자의 말은 보낸 분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가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열 두 사도를 세우셨고,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말을 예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의 말이 성경으로 기록되었으므로 교회는 성경을 예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자랄 수 있는 기록된 터전이 마련된 후에는 사도의 직분도 사라졌습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도권이 교황의 직분을 통해 계속 전수되었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교황이 공식석상에서 말한 것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졌다고 봅니다. 이는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상입니다. 교황은 이 땅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임명하신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사람으로 말미암았고 사람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사도로서의 신적인 권위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가 사도권을 계승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신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오직 신적 권위로 말했던 사도의 가르침인 성경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경’입니다. 그래서 바른 목회를 위해서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성경 말씀에 잘 수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 내용의 탁월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게 되면, 결국 성경이 담고 있는 복음도 부인하게 됩니다. 복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의 말에 불과하게 되지요.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수호하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자들의 가르침인 성경의 신적 권위를 고수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판단과 결정의 최종 권위로 회복 되어야, 온갖 거짓 사상들에 의한 노략질로부터 교회가 보호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문안 인사를 합니다(2).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3).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며 신속하게 복음에서 이탈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금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평강은 은혜가 베풀어진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교회든 개인이든 복음에서 멀어지면 은혜와 평강에서도 멀어집니다. 갈라디아 교회처럼 싸움과 분열이 있는 공동체라면 은혜와 평강이 더욱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은혜와 평강은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프로그램으로 말미암아 생기지도 않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 관심을 돌립니다. 바울은 그것이 심각한 상황에 처한 교회를 위한 최선의 치유책이며 최고의 치유책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그분들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불안한 마음으로 다른 무엇을 찾지 않고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는 것이 언제나 성도 개인에게 있어서도 발생한 각종 문제와 오류들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치료책입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지셨습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그분의 죽음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는데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스스로 “자기 몸을 드리셨”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리 속죄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사라지게 하고 평강이 깨어지게 하는 가장 주된 원인은 죄입니다. 죄는 광우병보다 심각한 영혼의 질병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잠복하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슬며시 침투하는 죄의 세력은 인간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습니다. 사진판에 나타나는 광우병조차 치료하지 못하는 인간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적인 질병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죄로 인해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죄는 에덴에 있을 지라도 지옥을 맛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은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에 대해 분명히 언급합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입니다. ‘건진다’는 단어는 어떤 세력으로부터의 건짐을 의미합니다. 속세를 떠나 세상과 단절한 생활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악한 세대의 세력으로부터 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악한 세대’와 그 세대로부터 건짐 받은 사람들을 구별해 놓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한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세상의 세력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다면 은혜와 평강이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에 속했다면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어떤 선한 행위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구원할 마음을 일으키도록 자극을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아버지의 뜻”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인간의 뜻이나 공로에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서두부터 바울이 복음의 핵심을 밝히고 있는 이유는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핵심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 때문에 바울은 감사의 말이나 칭찬도 생략하고 곧바로 복음의 핵심부터 말합니다.  

만일 구원이 약간이라도 인간의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 구원은 심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수시로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일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필요하다면, 구원은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호의라 할 수 없습니다. ‘거의 은혜’이지 ‘오직 은혜’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구원은 심지어 인간들이 ‘믿는 행위’에 조차도 의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인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이 5절의 현상입니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에 최고의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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