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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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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왕상 19:1~8)
  
  우리 각 사람에게는 벽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벽장이 무엇입니까? 집의 지저분한 것, 창피한 것들을 보관하는 데가 아닙니까. 숨기는 곳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에도 벽장이 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털어놓지 않을 일들, 배우자에게도 자식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감추고 싶은 벽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벽장이 있습니다. 가족사의 비밀을 감춰놓는 곳입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의 사연들, 그것이 꼭 도덕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들을 말합니다. 아마 그 집에 시집오는 며느리에게도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삼촌들 중에 정신 병력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을 알리고 싶어 하겠습니까? 이모들 중에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을 알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손자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저희 집에는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에 대해서 제가 잘 모르는 사연이 있습니다. 들은 것 같기도 하고 확실치가 않아요. 왜냐하면 아무도 그것을 제게 말해주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그것을 알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나간 일이고 제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인데.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지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고 있는 매력은 과거를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이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가난이든 압제든 불행이든 심지어 과거에 쓰던 이름까지도 벗어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다섯 명의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친구의 이름이 콘드렐이었습니다. 상당히 미국적인 이름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생긴 것도 미국사람처럼 생겼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고백하기를 원래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콘드렐이 아니고 쿠드레리스라는 그리스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에서 이민 온 가정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온 다음에 이름을 영국식 콘드렐로 바꾸고 자기 가정이 그리스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고 새로 시작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이민국 수속을 할 때 서류에 쓰는 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외모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벽장 속에 숨겨놓은 것들이 있어서 그것이 때때로 고개를 들고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같은 기숙사에 어느 목사의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미국 성공회의 대주교였습니다. 상당히 명성이 있는 가문, 상당히 명성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명성이 있는 가문의 출신이니까 저와 같은 무명의 한국 유학생과는 말도 섞지 않더라고요. 대화 한 번 못해봤고 다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아는 정도였는데 지난 주 뉴스위크 잡지의 북 섹션을 보니까 그 대주교였던 아버지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저와 같은 기숙사에 살던 학생의 언니가 책을 썼습니다. 그 집의 딸이 모두 넷이었다고 하는데 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딸이 아버지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 아버지는 성공회의 대주교요 명망 있는 가문이었지만 그 아버지에게는 비밀의 삶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것이 드러났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성적인 성향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사람들이 벽장 안에 숨겨두고 싶은 가문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딸은 아버지의 비밀을 벽장 속에 계속 숨겨두지 왜 책을 써서 세상에 공개하려고 했느냐?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비밀이 아버지의 비밀로만 남을 수가 없고 그것은 딸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방황이 자식의 방황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갈등과 방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든, 어떤 문제가 있었던 간에 그럼에도 자기 아버지에요.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했고 자식은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비밀을 숨기고 부인하는 것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길이라는 이러한 취지에서 그 책을 썼습니다. 

  그게 뉴스위크의 북 리뷰의 한 페이지의 기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제목이 'Honor your father - 네 아버지를 공경하라' 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의 문화는 수치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런 규모의 비밀을 결코 세상에 공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공연히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가문에 숨겨놓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듣고 있고 짐작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과 나는 그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것이 때때로 고개를 들어서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내 조상의 문제가, 조상이 갖고 있었던 문제가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형태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미래지향적으로 삽니다. 과거의 실수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실수일 뿐 그것을 되풀이해야 되는 법은 없고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우리는 과거에 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못되면 조상 탓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고 과거보다 나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어요. 그러나 약해지는 순간에 두려움이 고개를 듭니다. 엘리야가 심리적으로 약해지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소연이 오늘 본문 4절에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여기서 열조라는 말은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내 조상보다 낫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가족사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말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든가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엘리야만큼은 그가 디셉 출신이라는 것만 말하지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엘리야의 배경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말하지 않고 그의 현재적인 면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현재적인 면이 무엇입니까? 불의 종, 능력의 종, 능력의 선지자에요. 전무후무한 능력의 인물이에요. 그는 한 세대를 구원한 인물이고 이스라엘을 죄에서 건진 사람입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엘리야와 같은 능력의 선지자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보이는 엘리야의 모습이고 엘리야의 마음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지요. 

성경이 엘리야의 배경에 대하여 침묵하는 이유는 그의 배경을 봐서는 현재적인 면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배경 속에 엘리야가 불의 종, 불의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가 무슨 부모가 믿음이 좋았다든가 부모가 엘리야를 서원해서 바쳤다든가 그 조상 중에도 선지자가 있었다든가 이런 식으로 그의 배경, 과거, 가문을 봐서는 엘리야의 현재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사무엘이 그의 은사를 어머니에게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스승 엘리에게서 이어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였던 것처럼 엘리야도 그의 가문이 믿음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공로를 세웠던 것도 아니고 이것은 이어받은 것이 아니고 흉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당대에 엘리야에게 주신 은혜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엘리야의 과거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더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러나 엘리야가 외적으로 봤을 때는 전무후무한 불의 종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어떤 고민을 갖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라고 그의 평소에 갖고 있었던 의구심, 두려움, 염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엘리야만이 알고 있는 사연이에요. 왜 그가 과거의 열조에 대해서 언급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왜 그가 나는 내 조상보다 낫지 못하다고 말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엘리야의 마음속에 그가 그렇게 분발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그렇게 애를 쓴 동기 중에는 뭔가 과거를 지우고 싶고 자기의 부모의 실수를 덮어주고 싶고 뭔가 과거로부터 도피하려고 했던 그런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엘리야로 하여금 분발하게 만들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더 헌신의 삶을 살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가 없고 오직 그의 기도 중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엘리야의 평소의 의구심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가 평소에 갖고 있었던 의구심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일뿐, 내가 결코 내 자신을 바꿀 수 없다.’ 이런 의구심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너는 너일 뿐이다, 너는 바꿔지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착각하지 말아라. 과거의 죄인이었을 때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지 않느냐, 봐라, 예수 믿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닙니까. 마귀가 우리의 귀에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가 ‘참소하는 자라 - accuser’고 했습니다. 사람을 잘못했다고 송사하고 정죄한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실족시키는 방법이에요. 특별히 우리가 심리적으로 약해졌을 때 마귀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우리가 성취를 많이 해서 높이 올라갈수록 그 괴리 현상이 더 크게 보입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의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도 이런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요. 

  그러나 엘리야의 가문과 조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엘리야가 자기의 열조보다 낫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의 열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더라도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나님에게 기도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엘리야처럼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엘리야가 조상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염려,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과 겸손과 정직함이 있는 인물이었고 이것이 엘리야를 엘리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험 걱정 근심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엘리야든 사무엘이든 모세든 다윗이든 시험 걱정 근심 괴롬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간절히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믿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과거의 열조의 실패의 길을 반복하지 않고 운명이 바뀌고 가문이 바뀌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벽장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밑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보혈이 그것을 덮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이전 일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요 가문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는 외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사회적인 지위, 업적, 재능, 심지어 그의 어떤 종교적인 공로,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변화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의 척도는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진정한 변화의 척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고민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정직하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개인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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