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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있는 이것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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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게 있는 이것
본문 : 행3:1-10

어제와 그제 궂은 날씨 가운데서도 바자회를 진행하시느라고 너무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귀한 헌신과 땀방울들이 아름답고 귀한 열매들로 맺어지리라 믿습니다. 저희 2청년부에서도 이틀간 솜사탕을 팔아서 165,200원 이라는 순 수익금을 벌었습니다. 그 정도면 처음 하는 장사 치고는 제법 잘 한 것이죠?

예상 외로 대박이 나서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 보니깐 판매금액이 백만원이 넘어가더라구요. 그래서 우와 엄청 많이 남겠다... 생각했는데. 10%남는 장사라고 하더라구요. 저희는 총 판매금액이 고작 20만원입니다. 그런데 순수입은 16만5천원이에요. 재료값이 4만원인데 아직 반도 못썼습니다. 이제부터는 파는대로 다 남는건데... 바자회가 끝나버렸습니다. 이틀만 더하면 50만원 수입 올릴 수 있었는데 아깝습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행사들이 몇 개 있습니다. 5/6에 주민초청 효도잔치가 있구요. 5/12에는 한마음 전교인 체육대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40일 특별 기도회도 계속 진행중에 있고, 이제 성전건축을 향한 첫걸음도 떼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에 여러분들이 여전히 함께 협력해주셔서 초대교회와 같은 아름답고 귀한 역사들이 있는 우리 금곡교회가 되기를 소원니다.

어느 장로님의 전도 간증이 신앙 잡지에 게재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평소 늘 전도하는 분이신데,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기사분이 젊은 나이인데 얼굴이 너무 어둡고 말도 퉁명스럽게 하더랍니다. 이야기를 걸어 전도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데, 말하기 싫다는 투로 자기는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나 살살 달래면서 이야기를 걸었습니다. 마음이 서서히 열리며 자기 사연을 말하는데, 정말 자살할 생각을 가질 만했습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서 누워있는데 부인이 도망을 갔답니다. 그리고 누님은 중풍으로 누워있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되고, 여동생은 정신 이상으로 격리 수용되어 있어서 조금만 틈나면 면회 가서 돌봐줘야 하고 ... 당장 죽고 싶어도 자기가 죽고 나면 누님과 동생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면 차마 자살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 집 나간 부인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누님의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동생의 정신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셨는지 솔깃해져서 말씀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 못 가요! 먹고 살아야 되는데 시간이 있나요? 게다가 헌금할 돈도 없어요!”

그 말을 듣고 장로님은 교회 가고 헌금 하는 게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당장 교회 안 나가도 되고 헌금 안 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방송을 듣고 설교 테이프 들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주소를 묻고 설교 테이프를 보내준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어느 날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있는데, 멀리서 택시가 총알같이 달려와 끽~하고 서는 것입니다. 보니까 그 기사분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영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모든 게 그대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마음이 왠지 기쁘고 평안하니까 너무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요즘은 손님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여러분, 그렇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어도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고 문제가 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면 그 어떤 고난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삶의 가장 귀중한 보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찾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도 바로 이러한 보석, 이러한 생명을 갖고 있었고, 바로 그것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유일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면 우리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그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쉽지 않은 가시밭길이요, 고난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마음만큼은 천국의 평안을 누리며 걸어가는 길이요,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걸어가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오늘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는 가장 실망스러운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바라보며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보라.” 왜 앉은뱅이가 필요로 하는 은과 금도 없으면서 자기들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까? 

앉은뱅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앉은뱅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건강을 추구하기도하고, 금과 은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하여 단번에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걸어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몇 살입니까? 사도행전 4장에 보면 그의 나이가 40이라고 이야기합니다. 40년 동안 단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어쩌면 걷는다는 것은 그의 꿈에서 조차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 단지 하루하루 먹고 살 돈이나 구걸하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사람. 바로 이 앉은뱅이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때로는 돈이 필요해 보였고, 때로는 큰 집이, 때로는 건강이, 때로는 좋은 학벌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영적인 앉은뱅이와 같이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질적인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렇게 넉넉하게 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 이렇게 모여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받기 위한 것입니다. 이후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된 사건 이후로 성전에 모여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게 되고 그 때에 앉은뱅이가 걷고 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는데 남자만 5천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도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잡혀가지만 자기들도 늘 봐오던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풀려나게 되고 이 일을 모여있는 성도들에게 말하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로 성령 충만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였지만 이제는 오히려 공회 앞에서도 당당하게 증거하면서 너희들을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옳지 않느냐고 담대하게 소리치기도 합니다.

무엇이 베드로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며,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의 이유가 되며,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교회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지만, 현대의 교회들은 여전히 은과 금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또한 여전히 은과 금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요소는 신앙적인 색깔을 입고 위장해 있는 그릇된 가르침들일 것입니다. 마치 신앙적인 것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알고보면 여전히 은과 금을 쫓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고,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 가운데 하나인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도 읽어봤습니다만 책을 읽는 기간 동안에는 정말 좋은 내용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얼마 전 옥한흠 목사님의 글을 읽고 그것이 무엇인지 비소로 알게 되었습니다. 

“긍정의 힘”, 그리고 “잘되는 나”라는 책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은 사실 신학공부를 정식으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고 그 설교 자체가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빠른 속도로 부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긍정의 힘, 즉 긍정적인 자기계발을 하고 긍정적인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마치 성경에 나타난 복음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더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오스틴의 메시지를 전세계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신앙인들뿐만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조차도 좋아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말 진리가 될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엘 오스틴은 자기 최면적인 자기 계발이나, 긍정적인 자아상의 회복을 통해서 잘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의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고, 복음의 본질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실하게 믿는 사람의 삶은 물론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목적입니다. 이 땅에서 좋은 환경에서 넉넉하게 사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말처럼 조엘 오스틴이야 말로 이단이 아니면서도 이단에 버금가는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라고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지금 이시대는 오히려 교묘한 말로 위장하여서 반대로 말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 뒤편 어딘가에 보이지도 안지만, 은과 금은 내게 넘쳐납니다. 라고 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분의 모든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복음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자신이 가진 경제적 능력, 학벌, 가문, 열심, 장래의 모든 비전까지 이 모든 것은 배설물과도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또 어떻습니까? 갈수록 현대의 교회들이 맘몬주의와 물량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회들은 초대교회와 비교해 볼 때 초대교회보다는 훨씬 부자입니다. 초대교회와 비교해서 더 많은 은과 금을 가졌고, 유능한 교인들에, 합리적이고 좋은 시스템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은근히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현대 교회의 진정한 힘이 된다면 우리가 가진 은과 금으로 몇푼 구제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행하는 일들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돈은 사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힘이 없습니다. 좋은 환경과 시스템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결국 그것에도 궁극적인 힘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물론 없을 때보다는 있을 때가 더 낫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는 비교할 수 있는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가졌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하고 값진 보석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돈과 물질과, 인력과, 환경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무엇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은과 금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그릇된 길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4장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를 담았다고 말합니다. 보배를 담는 순간 우리는 질그릇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배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보석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훨씬 더 가치있고, 능력있는 그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연약한 나의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질 없는 세상 것들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으로 사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되어서 행세해보겠다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배로 사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자랑, 나의 가진 것, 나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내려놓을 때에, 그때에 비로소 보배되신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가 되는 것이며, 이 땅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으로서가 아니라 보배로서 살아가려고 힘쓸 때에 보배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의 이야기입니다. 
스탠리 존스는 일평생을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산 사람입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성자로 추앙합니다. 하루는 그가 쓰러졌습니다. 중풍에 걸린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89세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중풍인데 90세 가까운 나이에 쓰러졌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미국 보스턴으로 후송이 되었는데, 그는 자기를 치료하는 의사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이렇게 외쳐주십시오." 의사가 그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아니,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또 부흥사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외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스탠리 존스가 억지로 강권하니까 의사는 어쩔 수 없이 볼 때마다 그렇게 외쳤습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때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있다가 큰 목소리로 "아멘! 아멘!"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놀랍게도 6개월만에 완쾌가 됩니다. 그리고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90세에 가까운 노환자가 중풍에서 완쾌될 수 있습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입니까? 진정 여러분의 생명이 되고, 여러분의 산 소망이 되시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단지 신앙 생활을 영위해 나가기 위한 한가지 형식으로만 보고 계십니까?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은 금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 금과 비교할 수 없는 경건의 능력, 영적 권세가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믿으려하고, 신뢰하기 쉬운 은과 금에는 사실상 권세가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갈 때에 앉은뱅이와 같은 우리의 영이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고 나아갈 때에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다시 그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시고, 세상적인 방법과, 은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믿음을 의지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이 있을 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능히 넘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의 것입니다. 이 땅의 은과 금이 마치 나의 것인 것처럼 생각 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그 어떤 권세도, 그 어떤 능력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이름을 믿을 때에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있고 소망이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이름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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