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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예수님은 효자이십니다 (요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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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효자이십니다 (요19:25~27)

어버이주일이 되면 사실 설교하기가 두려운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아가는 교우들이 많은데, 부모도 모시지 않는 사람이 부모님을 잘 모시라고 설교한다는 것이 정말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만 같아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오래 전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는 가정을 표창하며, 최근 3년 전부터는 우리 교회 어버이 상을 시상하는데, 이 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만80세가 넘어야 하고, 심사위원의 투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 공정한 시상이 이루어진다는 봅니다.      우리 교회는 어버이상을 한 해에 5명씩 드리는데, 자녀들이 교회를 잘 나오고, 오래 사시기만 하면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금반지 3돈을 선물하는데, 정말 기념하고, 기념패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받으신 어떤 상패나 기념패에 못지않은 가치있는 상패가 될 수 있습니다. 금반지는 살아생전에 기쁜 마음으로 끼시고, 돌아가실 때에는 꼭 모시고 살아온 자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어르신이 돌아가실 때에 약력을 소개하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교회에서 어버이상을 수상하신 분이라고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노회 안에는 저의 어머니의 친구 분의 아들이 목사님이 계십니다.  일전에 시찰회에서 야유회를 가면서 일부러 목사님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전도사로 시무할 때에 청년회원이었고, 신학을 늦게 한 후배이지만, 나이는 몇 달 빠른 분입니다. 요즈음 어머니는 건강하시냐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정말 모시고 살아가기에 힘들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니는 교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 어머니가 아픈데 심방도 오지 않는다고 야단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한번 심방을 오면 다음에는 수시로 전화 걸어 또 오라고 하는데, 교인들이 여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었는데, 잘못 전화를 걸어 그 집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와서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 밤중에 남의 집에 전화를 걸었느냐고 따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가 치매가 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하시라고 통사정한다고 합니다.  아들이 설교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불러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합니다.  

예배드리면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를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조금 안심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또 불러 예배드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인에게 어머니와 함께 가정 예배드리라고 부탁을 하면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고, 조금 후에 우리 또 예배드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자부인 사모님도 이젠 하다하다 지쳐 쓰러지고 만다고 합니다.  다른 아들들이 좀 모셔보겠다고 하는데도 큰 아들 집을 떠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 사랑하시는 어르신들 잘 들으세요.  지금 여러분을 모시고 있는 자부를 칭찬하시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어쩌다가 와서 용돈 주고 가는 딸을 칭찬하고, 저런 딸이 없으면 어쩔 뻔하였느냐고 말씀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30대의 아들 내외가 어버이 날이라고 하여 부모님을 찾아가 용돈 드리고 저녁 식사하는 것은 5월의 날씨 좋은 날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식사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한 가족이 한 자리에서 즐겨 친교 하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건강하여 손자들을 보아주시고, 아직은 돈을 버시는 것이 있어 자식들에게 밥이라고 사주신다면 그런 자녀들은 효도라는 말을 꺼낼 것도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이 80을 넘기시고, 어디 한번 나가실 수도 없고, 전적으로 자식을 의존하게 될 때에 비로소 효도를 말하고, 모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TV에서 영화를 보다가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아직 미완의 형사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형편없는 형사가 사건에 빠져들면서 우리 사회 공공의 적을 소탕한다고 하는 줄거리였습니다.   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사업가는 자기 앞에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비위를 상하게 하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립니다.    나쁜 것을 골몰하게 생각하면서 운전하다가 택시를 추돌하였는데, 운전수가 나와서 욕을 하였다고 밤중에 운전수를 뒤따라가서 죽여 버립니다.  음식점에서 음식을 가져가다가 노신사분이 자기 옷을 더럽혔다고 하여, 그를 죽입니다.  세상에 이런 미친 사람이 다 있나싶은 못된 사람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자선 사업가이신데, 당신이 후원하시는 고아원이 문을 닫게 되었으니, 아들이 회사에 투자한 18억원을 빼어 고아원을 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사업가의 두뇌로 보면 아버지가 하는 일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투자한 회사가 곧 상장이 되면 무려 380억 원이란 돈으로 불러나는데, 18억 원을 빼겠다고 합니다.  아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반대합니다.  고아들을 위하여 그런 돈을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못된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만 있는 밤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와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절규하는데,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어머니도 십여 차례 질러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칼을 잘못 사용하여 자기 엄지손가락의 손톱이 절반 정도 잘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어머니는 아들의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그 잘라진 손톱을 집어 목구멍에 삼킵니다.    자칫하면 미궁에 빠질 사건인데, 형사가 시신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목덜미에 깊이 난 칼 구멍에서 손톱을 찾아내고 맙니다.  그래서 사건은 해결되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못된 아들인데,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까지도 죽이는 패륜아인데, 그 어머니는 아들을 살려보겠다고 손톱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아들을 보호하려고 사랑하는 어머니는 죽어가면서도 현장에 남아 있는 손톱을 집어삼켰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식은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잘 덮어주시고, 용기를 주시던 어머니를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를 십자가에서 마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그 골고다 형장에는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을 따라오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은 같은 죄인으로 취급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치고 만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의 동정도 있을 수 없는 즉결심판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요한과 네 명의 여인들이 십자가 밑에 나아왔습니다.  사랑은 말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형장에 나아갔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요, 예수님의 사랑받을 제자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도 시기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고 하여도 힘들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친 마리아의 관계를 살펴보면, 참으로 은혜가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성령으로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 마리아에게 못할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정혼한 요셉에게 버림을 받을 수 있는 일이요, 사생아를 가지고 있다고 널리 알리면 돌에 맞아죽게 할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보내시기 위하여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나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은 예수가 귀신이 들렸다느니, 바알세불에 들려 미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동생들이 찾아와서 미친 짓 그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말은 듣지 않으니, 어머니까지 찾아왔는데,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내 형제니라”(마12:46-50)라고 했습니다.  단호하게 인간적인 정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정으로 말하면 마리아에게 아픔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33살의 한참 일할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합니다.  그 처형장에 지금 어머니 마리아가 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기막히고, 안타까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데, 육신의 어머니가 그 곳에 와서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마리아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해야겠다고 하여 마리아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자식으로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어머니의 노후를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여”라는 말은 “귀나이”라는 말로 여자를 하대하여 부르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남자와 구별하는 것은 것으로 여자, 여주인, 여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였는지, 지금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데, “어머니”라고 부름으로 더 큰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옛날 이삭이 제물이 되려는 순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아버지의 마음이 더욱 아팠다는 것을 생각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정말 효자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부터 어머니로 생각하고 주님을 대신하여 잘 돌보아 드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고 가셨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11년간 살았으며, 후에 에배소에 모시고 왔으며, 마리아는 에배소의 한 동굴에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이 늦게 순교한 것이나, 늦게 활동한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처럼 타락한 세상에서 늙으신 부모님은 천덕꾸러기와 같아졌습니다.  당신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건강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집도 보아주시고, 손자들도 살펴주실 때에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파서 응급실로 가고, 여러 번 입원해야 하면 자녀들이 바빠집니다.  그러다보면 장병에 효자가 없습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이 계속될 때에 진정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출20:12의 십계명은 제5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륜의 계명에서 가장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 사도바울은 에배소서6:1-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6:1-3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인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간 지혜자들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잠23:25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즐겁게 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부모 모시는 것이 싫어서 한 부인이 남편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내가 장자인데, 부모님을 모시고 살자고 했지만, 부인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국에 이민 간 부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한인교회를 나가다보니,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가 잠30:17을 보았습니다.  잠30:17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인은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드넓은 사막 지대를 가면서 생각했답니다.  이런데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는다면 내가 부모 모시는 것이 싫어서 이곳까지 왔는데,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의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말씀을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은 축복의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저주의 말씀도 있습니다. 

제5계명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연결고리와 같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마침이요, 인간에 대한 계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다시 쓰는 신명기 5:16의 말씀에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버이날을 맞이하였는데, 사실은 부모 공경이라는 것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모 되라는 교훈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잠시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으며,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엡6:4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마음이 전달되면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교훈이란 실제 훈련을 말하며, 체벌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훈계는 말로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을 잘 안 듣는 아들을 둔 어느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번번이 부모와의 약속을 어기는 늦게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최후의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 집안의 규칙을 한 번만 더 어기면 다락방으로 보내겠다.” 그러나 며칠 후 아들은 또 부모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부모에게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도 않고 집을 나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밤이었지만 다락방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아들을 냉방인 다락방으로 보낸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너무 춥고 무서울 거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아버지는 그래도 그 아이를 다락방에서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소리를 들으며 괴로움에 잠 못 이루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은 추운 다락방의 딱딱한 바닥에서 베개도 없이 얼어붙은 듯 쪼그리고 잠들어있었습니다.  아들을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 곁에 누웠습니다.  아들을  꼭 안고 팔베개도 해주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도 다락방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들을 안고 누운 아버지와 그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겨 철없이 잠든 아들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아들을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맞은편에 살며시 누워 아들의 뺨에 볼을 갖다 댔습니다. 양쪽에서 안아주는 부모님의 체온에 몸이 녹고 눈을 뜬 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고 “아버지,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면서, 교훈하고 훈계할 수 있어야 상처받지 않습니다.  잘 하다가 한번 독하고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지혜로운 임금이었던 효종의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왕께서 민정 시찰 중에 길거리에서 어떤 젊은이가 팔순이 넘은 노모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늙으신 노모를 업고 서 있느냐?”  그는 대답하기를 “어머님의 평생소원이 임금님의 용안을 우러러 뵙는 것이어서 제가 십리 길을 걸어서 어머니를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임금님은 그의 효행을 기특히 여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퍼지자 그 동네에 별로 효자가 아니었던 젊은이 하나가 자기도 노모를 업고 임금이 지나는 길옆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임금님이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와 있느냐?”   그랬더니 그는 지난번에 후한 상을 받은 사람과 꼭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하도 임금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 제가 먼 길을 걸어서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   이 때에 동네 사람 하나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천하의 불효자식인데 상금을 타 먹으려고 나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여러분이 이 상황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는 “저런 나쁜 놈은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라고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의외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저자에게도 후한 상을 내릴지어다.”고 했답니다. 

효도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십자가란 자원하여 지는 것만이 아니라, 억지라도 지다보면 복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자녀들이 부모를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인들이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이 시대는 병든 시대입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라는 존재는 그렇게 짐처럼 느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 부모처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부모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오늘 사람들이 너무나 모릅니다. 늙으신 부모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팽팽하던 얼굴이 흉하게 주름살이 지고 그 예쁘던 몸매가 엉망이 되고 꽉 찼던 뇌가 반으로 줄어 치매가 생겨서 분별력을 잃고 헤매는 모습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나의 인생이 소중한 것처럼, 부모님의 남은 인생도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귀찮다고 짐스러워할 일입니까. 

오늘 자식들은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모르다가 언제 알게 되는가 하면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존재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고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어머니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한 후에 가서야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눈물짓는 존재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생존하여 계신 분들은 효도하십시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지극히 공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식의 도리이고 사람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마지막까지 부모님을 잘 모시는 중에 약속하신 은총을 받아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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