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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에 사랑이 넘치게 하라 (눅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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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 사랑이 넘치게 하라 (눅 15: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캄보디아선교사 영성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는 선교사님들의 연합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입니다. 교단 선교단체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모습. 캄보디아 선교 현장의 부흥이 까닭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 안에 연합이었습니다.

  일정 중에 한인 교회 집회가 하루 있었습니다. 설교 제목을 급히 부탁하시기에 보내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설교 제목을 기도 중에 [서로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바꾸게 하셨습니다. 캄보디아! 하면 킬링필드라고 잔혹한 살해가 있었던 역사를 듣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잔혹사 박물관에 갔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안내하시면서 이따금 너무 끔찍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입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순수하고 좋은데, 한번 이상한 혈기가 일어나면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는 살인과 증오의 영이 뒤덮고있는 나라였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 부모와 가족을 죽인 사람들이 이웃에 버젓이 살아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 땅에서 영적으로 눌리지 않고 살아가려면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민 교회 집회에서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이 캄보디아 선교사님과 교민들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너무나 필요합니다. 부부 사이에 부모 자녀 사이에. 

복음 중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랑에 푹 빠지셨다.”는 것입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눈에 내가 사랑스러울까? 무엇이 사랑스러울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듣지만, 마음으로부터 느끼지 못하고 의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15절에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믿음보다는 무서운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비밀을 보여주신 성경 중의 하나가 소위 탕자의 이야기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 말씀입니다.
한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아픔을 주는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기가 너무 힘드니 지금 유산을 물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못된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와 같은 요구는 아버지 보고 빨리 돌아가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나 아팠지만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려서 내쫓지 않고 달라는대로 돈을 주어서 보낸 것은 돈은 잃어버릴지언정 아들에게 집으로 돌아올 여지를 남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아버지가 다 이와 같지 않지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렇게 했습니다.
유산을 받고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결국 돈이 다 떨어지던 해, 그 땅에 극심한 기근이 들게 되었고 그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돼지 치는 자가 되었지만 돼지먹이 조차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 생각나는 것이 아버지 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가면 양식이 풍족한데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지만 자기가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까.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돌아와 말합니다.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눅 15:22-24)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는 결코 탕자를 죄인이나 품꾼의 하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잃어버렸던 아들을 세월이 지나서 다시 되찾을 때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부모없이 지내는 동안 거칠어진 모습과 성품 때문에 실망하고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더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모든 거리의 아이들이 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자녀이니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관점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기에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생명도 대신 줄 수 있는 자식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인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죄와 저주의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있던 창조의 원형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토록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원래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되찾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부모를 되찾은 고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는 부모가 안 계신 줄 알았어요. 고생은 말할 수 없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생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네 아버지라고 하면서 끌어안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고아가 실감이 나겠습니까? 그 아버지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나를 끌어안지만 그 고아는 그냥 눈만 멀뚱멀뚱한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이 내 아버지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는가?’ 

성도 여러분, 우리가 꼭 그와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에서 읽어도 내 마음이 실감이 안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정말 믿어야 합니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지막지한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다가 쓰러집니다. 쓰러진 예수님을 보면서 로마 군인은 잔인하게 웃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을 이기지 못할 것을 여긴 신문관이 그만 하라고 제지합니다. 그 때 쓰러진 예수님의 손이 바르르 경련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채찍을 맞는 자리에 다시 일어섭니다. 그것을 본 로마 군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독한 마음을 품고 다시 채찍질을 합니다. [영상] 

  예수님은 왜 쓰러진 채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나요? 왜 굳이 다시 일어나서 스스로 채찍질을 받으신 것일까요? 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죄인인 우리와 철저히 한 몸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인 된 몸과 한 몸이 되신 것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역시 새 생명으로 우리와 한 몸이 되십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엄청난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함으로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후예로 죄와 저주의 종이 아닙니다. 창조의 원형,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원합니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 낙오하고 패배자였던 이가 승리하는 장면, 가망성없던 이가 자신에게 있던 온갖 장애를 다 극복하고 결국 승리를 움켜쥐는 모습, 자기 희생과 관용의 정신이 드러나는 모습.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 드러나 멋진 남자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와 맺어지는 모습. 이런 요소들이 있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깊은 내적인 열망이 있고, 내면 깊은 곳에 그런 영화의 주인공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망이 우리 안의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감동이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이후 상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창조의 원형이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생명이 바뀐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자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보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스가랴 2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신의 눈동자로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아버지 되심을 믿습니다. 사랑하심을 믿겠습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려야 될 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가 먼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가족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그대로 흘려보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더럽고 타락한 죄인으로 보시기 않고, 가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으로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내 아내, 내 남편에게 부모님에게 자녀들을 보아야 합니다. “당신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형입니다. 그것이 당신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들에게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가족이기에 가정 안에서 가장 솔직한 모습, 정확한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가족들의 죄성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미국에 사시는 양아버님은 천사같은 분이라는 말을 들으십니다.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시는지. 그러면서 어머님에게 그러신답니다. “천사같은 분하고 사시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그러면 어머님은 한숨을 쉬시며 말하신답니다. “하나님 만이 아시지요.”

십자가 복음을 소유한 자들만이 가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믿고, 인정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가정에 넘치는 것입니다. 가정 행복은 기도만 한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믿고 인정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깨달았고 받았고 누렸다면 이 사랑을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요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으셔서 잃어버린 자식으로 품으신 것 처럼, 나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자로 그에게 말해주고 또 우리도 그를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 안에 사랑이 흘러넘치는 역사가 일어나는 열쇠입니다. 가정에 사랑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고 그 사랑을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가장 먼저 흘려보내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오른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진짜 나쁘고 치사한 거 알아? 난 나야. 난 나일 뿐이라고. 나로서 날 봐주고. 나로서 날 인정해줘. 나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칭찬해줘. 어른들의 욕심은 왜 이리 큰 거야? 그냥 날 그대로 봐주면 안 돼? 내 모습 그 자체로 받아들여주면 안 되는 거야? 뭐가 문제인 거야? 자신이 비교 당하기 싫으면 남을 먼저 비교하지도 마. 결국 돌아오는 건 비난뿐이니까. 날 알고 난 뒤 말하란 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을 거면 자꾸 들춰내지도 말란 말이야. 난 그리 강하지 않아. 쉽게 상처받고 쉽게 아파해. 비교하지 마. 난 나일 뿐이니. 세상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태어나서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거고, 내가 있기에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자녀들은 상처받고 아파합니다. 가장 큰 상처는 남과 비교 당할 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엄마 친구 아들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너는 중요하지 않다.’ ‘넌 어딘가 부족하다.’ ‘난 네가 자랑스럽지 않다.’ ‘난 널 부끄러워한다.’는 의미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열등감 속에 빠져들고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부터 남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 잡지에 실린 한 부부 이야기입니다.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는 조건의 이상적인 남녀가 결혼했는데, 갈등이 너무 심한 것입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남편, 구불거려도 즐거우면 OK인 아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원칙과 기준이 없는 “대책없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반면 아내의 눈에는 남편은 앞 뒤가 꽉 막힌 “융통성 제로의 사람”으로 비춰졌습니다.

  신혼 여행갈 때 아내가 버스표를 집 안에 두고 온 것을 터미널 가서 알았습니다. 또 신혼 여행 중에 예물을 분실하는 대형 사고까지 생겼습니다. 매사에 꼼꼼한 남편은 덤벙거리는 아내에게 대경실색을 했습니다. 문제 많은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다그침을 받는 아내는 마음에 상처가 쌓여갔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늘 인정받으며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남편의 눈에는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늘 남편으로부터 지적만 받다보니 자존감이 없어졌습니다. 밤마다 울면서 잠자리에 들었고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발랄함이 주특기였던 그녀에게 남편은 그야말로 감옥이었습니다. 드디어 아내가 ‘이혼을 선언’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하와이 코나에서 열린 DTS에 참가했다가 심리 유형검사인 MBTI를 받아보았습니다. 사고만 친다고 늘 ‘불량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던 아내가 불량품이 아니라 정품이란 걸 알게 된 것입니다.서로를 용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냐는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렸답니다.

  효창교회 김정만 담임 목사님은 젊은 목사님으로 역사가 50년 된 묵은 교회에 부임하여 참 목회를 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흥회 중에 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 중 의사가 기형아 가능성이 크니 낙태하라고 권유하였답니다. ‘기형아가 나면 어떻게 기르나. 목회는 어떻게 하나?‘ 고민이 되더랍니다. 그러나 ’아이를 낙태하고는 목회 못하겠다.‘고 깨닫고 기도를 하면서 사모님과 동일하게 기도가 바뀌더랍니다. “우리 아이가 기형아라도 좋습니다. 어떤 아이라도 사랑하며 기르겠습니다.” 태중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부터 두 내외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편안해지더랍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 것입니다.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가 정상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도 않았답니다. 그러나 정상아였답니다. 이 목사님이 왜 교회를 부흥시키시는 목회를 하시는지 이유를 알았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목회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믿고 사는 것 뿐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찬양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변화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가겠다고 헌신한 청년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믿음 없는 부모님이 '너 땜에 교회 갈려고 했는데 이젠 못 가겠다.' '너 땜에 피말려 못살겠다.'. '꼴도 보기 싫으니 집 나가라.' 등의 말을 들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저와 저희 집을 구원하신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어머니께서 큰소리로 우시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웃고 넘겼는데 오늘은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교회에 가서 목 놓아 사단을 대적하고 깨부셨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집을 나가야 되나 말아야되나를 묻는데 답을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고 주님 믿고 주님께 모든 것 의탁했는데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찾았습니다. 저에게 빠진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요. 기도할 때도 믿음만 구했지 사랑은 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말씀 중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말씀을 듣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믿는다며 험한 말을 하는 부모님이 믿음이 없어 그렇다.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나? 라며 부모님을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마음에 큰 부담만이 다가왔고 고민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에게 사랑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랑만 하고 주님이 부모님을 구원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야 평안이 찾아오네요. 목사님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받은 아버지의 사랑을 가족들에게 흘려보내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은 다 주님이 맡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랑만 하며 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은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 마음 중심에 폭포수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옵소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게 해주옵소서. 가족을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말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부르실 때까지 사랑만 하기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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