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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올바른 자식사랑 (삼상 3:19~21, 잠언 2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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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자식사랑 (삼상 3:19~21, 잠언 23:13~14)

오늘은 꽃과 같이 아름다운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자녀들을 복 되게 양육하는 귀한 사명을 성도 여러분 각자의 역할과 사명을 잘 감당해서 복된 신앙의 가문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가문으로 세워 나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006년 5월 1일 모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일본 내각부가 한국, 일본, 미국, 프랑스, 스웨덴의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자기나라의 ‘자녀를 키우기 쉬운 나라’라고 대답한 사람이 스웨덴은 98%, 미국이 78%, 프랑스 68%, 일본이 48%였으나 한국은 19%로 최하위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가 ‘자식을 키우기 힘든 나라’임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자녀를 올바르게 잘 키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흔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농사"라고 합니다. 자식만큼은 아무도 장담해서 큰 소리를 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사무엘에 관한 기사입니다. 사무엘은 부모님님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으므로 직접적인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무엘이 성장할 때 돌봐주었던 엘리 제사장 가정에 두 자녀가 함께 성장하고 있었는데 두 자녀들은 특별한 제사장 가문이요,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가정이었고,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말썽꾸러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말은 비참하게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무엘의 경우는 오늘 본문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부모님과 떨어져서 엘리 제사장 집에서 자란 사무엘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는 훌륭한 선지자, 그리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다윗왕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없었으며, 사무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들어 주셨으며,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로 인정할 정도의 훌륭한 선지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가 하면 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무엘과 함께 생활하였고, 오히려 당시 제사장인 엘리의 직접적인 사랑과 관심과 보살핌과 지원을 받고 자랐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가 되었을까요?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와 함께 해 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책임져 주셔야 그 자녀가 복된 길로 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사무엘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어머니인 한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오늘은  한나의 아들 사무엘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도 좋은 사랑이 있고 나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에도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거짓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고전1 6장14절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일에도 분명히 사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데 있어서 사랑은 최고의 훌륭한 교육 방법이고 최고의 건강제이며 최고의 치료약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잘못 된 사람으로 빠지면 안 됩니다. 어린이 날에 아이들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는데 1위가 무엇인지 아세요. 물론 언론사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1위가 ‘부모님과 함께 노는 것’이 65%나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비싼 장난감이나 로봇이나 인형 하나 덜렁 사주는 것으로 부모 노릇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모치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을 해야 할까요? 하나, 아니면 둘 밖에 없는 귀한 자식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사랑할 때 어떤 사랑이어야 할까요? 자식 사랑에 대한 참 사랑은?


1. 절제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요사이는 부모가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많아 졌습니다. 밥상 반찬이 어린이 중심으로 구성하는 가정이 많아 졌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할머니 아버님의 밥상은 항상 따로 차려 드렸습니다. 위 아래가 분명했는데 밥상에서 부터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아이들 중심으로 밥상도 바뀌고 있습니다. 

옛날보다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과 투자가 더욱 많지만 청소년 문제는 더 심각하고, 가정은 더 붕괴되는 조짐이 많이 일어 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무조건적으로 감싸주는 사랑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가정을 통해 질서를 가르치고, 올바른 교육으로 사람답게 사는 인격체가 되도록 지도하며, 특히 신앙을 가진 부모는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잘 따르고 철저한 교회 생활을 잘 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지고 아래 위를 분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경우를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심지어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게 일방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즘 외동아들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다 귀합니다. 그야말로 황제의 아들인 황태자요. 딸도 무남독녀 귀한 딸로 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간혹 자녀가 여러명 있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 현대인들에게 자식을 양육하는 부담 때문에 자식이 많은 집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귀한 자식 그야말로 내 몸속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가장 값비싼 선물인 우리가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말하기를 자식을 적게 낳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나라도 잘 키우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회를 위해서입니다. 국가를 위해서입니다. 한번 보세요. 올바르게 키워낸 한 사람이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면 얼마나 그 영향력이 큰지 모릅니다. 반면에 잘못된 자녀를 키워놓으면 사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랑도 절제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부모님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자녀를 마음대로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마음대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못했습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절제된 사랑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절제된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엘가나와 한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상 1장과 2장에 보면 사무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이 아내 둘을 두고 살았습니다. 본 부인은 ‘한나’이고 둘째 부인이 ‘브닌나’입니다. 브닌나는 아들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 부인 한나는 늘 브닌나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아 속이 상했습니다. 하나님 전에 올라갈 때마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어 태문을 여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기도는 체질도 생리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늦게 낳은 귀한 자식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그동안 아들 낳지 못한다고 구박받고 당한 서러움을 일시에 날려 보낼 수 있도록 해 준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아들을 사랑하는 한나였습니다. 곁에 두고 잘 키우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고 어떤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고 싶은 아들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한나는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이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엘리 제사장이 있는 성전에 두고 내려옵니다. 사랑하는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한시도 곁에 없으면 안 되는 아들, 그 어떤 엄마의 아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하고픈 아들 사무엘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제물까지 준비해가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아들을 부탁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27-28). 

이것이 절제된 사랑의 표본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자식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해서 지나친 사랑으로 자식을 그릇되게 하는 일이 없는지요? 한나는 사무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절제된 사랑을 하면서 자주 가보고 싶었겠지만 그것도 절제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장18절 이하에 보면 한나와 엘가나는 매년 유월절에만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때마다 성전에서 입을 수 있는 ‘에봇’이라고 부르는 겉옷을 지어서 주었습니다. 기도하변서 어머니는 옷을 정성껏 만들어 입히기를 몇 년 정도 하니까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사랑을 쏟을 수 있는 후손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쁘게 여기사 자녀를 주셨는데 사무엘 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울러 절제된 사랑을 할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온 백성들이 인정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자식사랑이 우상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절제된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도록 하십시오. 사무엘처럼 말입니다. 올마르고 참된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2. 헌신적인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강도만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줄 때 ‘돌보았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봄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돌봄’입니다. 어린아이는 돌봄의 대상입니다. ‘돌본다.’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돌봄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돌봄이 과잉보호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잉보호가 잘 돌보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어 학비를 대어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서 해결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2007년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발생했던 총기난사사건의 주인공 '조승희씨에 대해서 오히려 우리가 회개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국내에서 오히려 높았습니다.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우리가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도 역시 돌봄의 대상이었는데 그에게 관심을 제대로 갖지 못했고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추모비를 세웠는데 32개가 아닌 33개였습니다. 이유는 '가해자 조승희 형제도 희생자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우리의 돌봄을 받지 못해 발생한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돌보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혼자서 아무 말 없이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잘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분노의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왕따 당한 좌절감에 젖어 있는지, 아니면 패배감에 젖어 있는지, 아니면 혹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누가복음10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 볼 때 혹시 비용이 더 들면 자기에게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치료해주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한 번의 돌봄으로 끝내지 않고 끝까지 돌보아 주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말에 저는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일을 보면 삼년상까지 본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남의 일을 돌볼 때 끝까지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이 많습니다. '한 사람의 문제는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나의 경우 사무엘을 어떻게 사랑했는가를 보면 가까이서 매일 올라가거나 매달 올라가서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1년에 한번 올라갈 때 겉옷인 에봇을 지어서 가져다주는 것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자신이 돌보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러나 사무엘의 경우를 생각해서 당신의 돌봄이 아니면 하나님의 돌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녀들에게 신앙을 갖도록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돌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에 대한 참된 사랑은?


3. 초달(楚撻, 사랑의 채찍)이 필요합니다. 

잠언 23: 13절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잠언 13: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 라는 말은 '어리석은'이 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특징은 ‘어리석음’ 입니다. 아직 깨닫거나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부모는』 결국 자식에게 <반드시 행해야 되고,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하게 깨우치지 못하게 되도록 방치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의 어리석음을 다스리기 위해 매를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19장 29절에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잠언29장 15절 말씀에도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자녀가 아무리 귀하더라도 귀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일생동안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세상을 헤쳐 나가도록 가는 곳마다 인정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고 살도록 자기 자리를 매김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채찍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쁜 버릇이나 잘못된 태도나 올바르지 못한 인격이나 언어나 행동이나 아래 위를 모르는 불순한 행동은 반드시 채찍질을 해서라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 우리사회의 주요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부자간의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발생한 사건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화그룹의 총수 김승연 회장이 둘째 아들이 술집에서 종업원들로부터 몰매를 맞아 13바늘이나 꿰매는 것을 본 아버지의 감정은 아마 충분히 그렇게 되리라 여겨집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감히 말도 끄집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맞은 아들에 대한 모습을 보면서 분개하여 그것을 보복하기 위해 술집 종업원을 불러 폭행을 했느냐 안했느냐를 놓고 수사를 하였고 재벌 총수로 실형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까?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만 한다고 해서 될 일입니까? 그러면 평소에 잘못을 한 아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성경은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한다는 핑계로 무조건 꾸중만 해서도 안 됩니다. 

잠언23장13-14말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진짜 잘못이 있을 때는 보듬어야 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사랑의 훈계와 사랑의 채찍이 필요합니다.  채찍은 늘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만 필요할 때 사용하지 않으면 구부러진 나무를 어릴 때 잡아주지 않으면 영원히 못쓴는 나무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13장 24절 말씀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성전에 드려졌을 때 당시 제사장이 엘리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이들의 소행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 이하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에는 ‘불량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다 더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이들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 중에서 고기를 삶을 때 종을 보내어서 세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는 솥에 삶고 있는 제물을 마구잡이로 가지고 갔습니다.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종들을 보내서 제사장에게 구워드릴 고기를 내어놓으라.'고 하면서 가져갔습니다. '삶은 것을 원하지 않고 날 것을 원한다.'고 하면서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정하기를 '먼저 기름을 태운 후,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가져가라.'고 한 규례를 말하고 그 후에 가져가라고 하면 지금 내라고 해서 억지로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결국 두 아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였고 결국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엘리 제사장이 그것을 제재를 했다.'는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채찍질해서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헌금을 일부분만 드리고 일부분은 과자를 사 먹는데도 그 사실을 알고도 자식을 방치한다면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와 놀거나 T.V를 보기위해  가지 않는 것을 방치한다면 엘리 제사장의 처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초달인 사랑의 회초리가 필요합니다. 어릴 때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장성해서 자신의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리겠습니까? 어떻게 복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이것뿐만 아닙니다. 삼상 2장 22절 이하에 보면 엘리 아들들의 소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아버지 엘리는 점점 연세가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에게 대한 말발이 서지 않습니다. 어릴 때도 마음대로 했는데 늙어서 능력이 없는 부모의 말에 귀를 기ㅐ울이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해도 귓등으로 여기고 결국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 말발이 더 안 먹혀들어갑니다. 심지어는 두 아들이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을 불러놓고 타일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 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 도다 /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고,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기로 뜻을 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전쟁에 나갔을 때 적탄에 일시에 두 사람이 맞아 죽었습니다. 우연입니까?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죽지 않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정도 되면 매를 들어야지요. 채찍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채찍을 제대로 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것이 있고, 타일러야 할 것이 있지만 신앙의 문제는 엄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때로는 채찍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도 찢으셨지만 도로 싸매어 주시듯이 우리들도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 뿐인 자식, 귀하다고 아무렇게나 키울 것이 아니라 채찍으로 잘 양육하여 지혜로운 자녀로 키우시기 바랍니다.  참된 사랑은?


4. 마지막으로 균형 잡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경우에는 자칫 '편애'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덜 아픈 손가락과 더 아픈 손가락이 있습니다. 아픈 손가락을 깨물면 더 아픕니다. 

건강한 손가락 엄지손가락 같은 경우는 덜 아픕니다. 자식들을 다 사랑하지만 그러나 사랑이 더 가는 자식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을 때 더 아픔을 느낍니다. 가난하게 살거나 형편이 어려우면 좀 더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장남을 선호하고 다음으로는 막내를 늘 마음이 더 가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마음이 더 간다고 해서 사랑을 더한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느낄 때는 더 사랑한다고, 나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편애의 대표적인 가정이 '이삭의 가정'이었습니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사내답고 야곱은 딸 같은 느낌이 드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에서를, 어머니는 야곱을 더 사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경우는 지극히 당연하게 장자에게 축복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머니 리브가의 경우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이 받아야 할 축복권을 어머니가 남편을 속여서 야곱이 받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야곱이 부모와 형제를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20년 동안 살아야 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해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았는지 모르지만 아들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은 형님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3여 년 동안 야곱은 뼈아픈 경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편애한 아들을 잃어버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얼굴이 잘생겼던 못생겼던지 다 사랑해야 합니다. 누구 보다 더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더 사랑해야 할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 모든 것 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10장37절에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나님은 사무엘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이제 다른 형제들에게도 쏟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형제자매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직 사무엘에게만 사랑을 하고 있으면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를 줌으로 인해 골고루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사무엘로 집중되던 사랑이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졌던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른'이 라는 말은 '어우르는'이 라는 말의 줄임 말입니다. 그래서 어른의 특징은 '어우름'입니다. 

어른이라는 뜻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함께 모나지 않고 잘 어울리도록 조화를 이루는 포용력'이 바로 '어우름'인 셈입니다.

어른은 그동안 살면서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 의견이 다른 여럿이 모여 산다는 것과,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배려해야 나도 좋고 남도 좋다는 것을 깨우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조금 손해가 되고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도 포기할 줄도 알고 다음을 기약하면서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 어른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어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균형 잡힌 사랑으로 사랑에 기갈을 느끼게 하거나 다른 형제들보다 자신이 덜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제된 사랑, 돌봄이 있는 사랑, 채찍이 함께 하는 사랑, 균형이 잡힌 사랑으로 여러분의 자녀손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올바로 양육하시어 나라와 세계와 교계의 주역으로 양육하시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녀로 양육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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