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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야곱의 노년 (창 46:1~7, 47:7~10,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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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노년 (창 46:1~7, 47:7~10, 49:1~2)

  옛날의 어머님들은 연세가 드시고 기운이 진하여지셔서 더 이상 집안 살림을 맡아 이끌어 나가지 못할만한 때가 되시면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당시의 광이란 쌀에서부터 시작해서 온 대가족 식구를 먹이고 살릴 모든 보급품이 다 재어져 있던 곳이니, 그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준다는 말은 집안의 경제권을 완전히 인계해 준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물론 그런 광도 없지만, 혹 있다 하더라도 시어머니들이 그처럼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쉽게 물려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찍 자식에게 경제권을 넘겨주었다가는 남은 생애에 속된 표현으로 '찬밥신세'가 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때가 되면 열쇠꾸러미 넘겨주어라.'고 하던 말 대신에, 이제는 '죽을 때까지 유산분배해 주지 말고 어찌하든지 저금통장 꽉 붙잡고 있어야 자식들이 한번이라도 더 얼굴 내민다.'는 말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와 모녀 관계가 더욱 삭막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서글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또한 매우 현실적인 말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어쨌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끝까지 대접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부모 고유의 '가진 것'이 있어야 할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믿음의 조상들 중에 하나인 야곱의 노년이 그 대표적인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노년은 적어도 광 열쇠나 저금통장 가지고 자식들 앞에서 부모 권위를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이미 자식들 앞에서 완전히 뒤떨어진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이미 일상사에 종사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였으며, 그 아들 중에서 특히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전 가문의 광 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는 입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곱의 노년이 자식들 앞에서 무력하거나 초라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마지막 침상 머리에서까지 그 창창한 젊은 자식들 앞에서 오직 아버지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권위와 영광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야곱으로 하여금 그처럼 자식들 앞에서 끝까지 존경과 효도를 받는 능력 있는 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습니까?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로 찾아보면서, 연로하신 부모님들께서 젊은 자식들 앞에서 끝까지 지키고 있어야 할 '영적 광 열쇠'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배 생활'을 신실하게 이끄는 가정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노년의 부모가 지켜야 할 권위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그의 모든 열두 아들들이 다 합쳐도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창세기 46장 1절부터 7절의 말씀에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2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6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자기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는 꿈같이 기쁜 소식을 이제 '흰 머리' 다 된 인생 말년에 와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요셉의 초청을 따라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온 가족들뿐 아니라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는, 즉 완전한 이민이나 다름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애굽을 향해 "발행하여" 길을 가던 야곱은 그 도중에 있던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즉 일종의 특별 가정예배 같은 것을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기 전이나 애굽에 도착한 후에 하지 않고 유독 '브엘세바'란 곳에 도착했을 때 그런 특별제사를 드렸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브엘세바는 가나안 땅의 최남단 지점에 해당되었습니다.
  즉 그 브엘세바만 지나면 이제는 진짜로 가나안을 완전히 벗어나 애굽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그의 장차 올 자손에 이르기까지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습니다.
  아무리 지금 기근이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약속의 땅을 온 가족이 다 등지고서 다시 돌아올 기약도 보장도 없이 떠난다는 것이 영 마음 편치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그들이 가고자 하는 애굽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항상 시험거리가 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조부 아브라함은 바로 그 애굽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바로 앞에서 속이게 되는 바람에 큰 화를 당할 뻔 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 역시 애굽으로 가려 한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셔서 마음을 돌린 적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애굽이었고 바로 그런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그 고향 땅을 정말로 벗어나게 되는 브엘세바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그가 가는 이 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아무도 미처 생각도 못했던 점이었습니다.
  요셉은 그저 아버지를 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풍요한 곳으로 모셔 와서 육신적으로 잘 봉양해 드려야 하겠다는 이 생각만 들었을 뿐, 아버지와 자기 온 형제들이 그 약속의 땅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닿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다른 열한 명의 아들들도 그저 잘사는 나라 애굽으로 이민가게 되었다는 그 흥분에, 또 애굽의 총리가 된 형제 요셉 덕분에 자기네들도 제법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쁨 때문에 그 애굽 땅이 영적으로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들의 생각에 그들의 현시점이란 모든 것이 지극히 순조롭고 잘되어 가는 때였을 뿐이며, 애굽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무슨 재고고 무엇이고 해볼 필요조차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야곱만이 그런 영적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드림으로써 지금 가는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그 자신과 그 가족의 앞날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3절과 4절에 기록된 대로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켜 주시고 그뿐 아니라 "정녕 내가 너와 네 자손을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올라오게 할 것이라"고 약속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과 가족의 앞날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줄 알았던 아버지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다시 한 번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해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버지 야곱이 행하기까지는 다른 혈기왕성한 젊은 자식들로서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자식들이 세상 물정에 밝고 사회를 적응하는 능력은 앞설지 몰라도,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시시때때로 제단을 쌓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줄 아는 신앙에 있어서는 지극히 무지하고 무능력할 때가 많습니다.
  오직 야곱과 같은 부모된 자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자식들이 도무지 따라오지 못하는 귀중한 영적 리더십의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은 '어디 가서 살면 돈 벌기 좋을까, 어느 곳에 집을 사두면 팔기 좋을까, 어디 학군이 자녀 교육에 더 좋을까?'라는 것들만 생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쁘게 살더라도, 우리 부모님들은 그럴 때마다 그런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고 그런 자식들의 판단을 위해 성경 말씀으로 조언하며 그런 자녀들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예배생활에 충실하도록 이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족과 자녀들의 가정에 일어나는 모든 대소사를 두고 늘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배드릴 줄 아는 부모가 되시면 바로 그런 부모님 앞에 그 자녀들은 항상 머리 숙이고 공경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고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영권을 끝까지 지키고 발휘하는 부모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회생활'에서 신자로서의 의연한 자세를 지키는 것이 노년의 부모가 보여주어야 할 모범입니다. 

  자식들은 우물쭈물하게 되는 불신 권력자나 부자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지극히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것이 또한 연로한 야곱이 애굽의 바로 앞에서 보여준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47장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7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9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애굽에 도착한 야곱 일행은 당대 최고의 통치자였던 애굽 제국의 왕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야곱이 그 바로를 대하는 모습은 정말 얼마나 여유만만하고도 당당한 것입니까?
  그는 요셉의 인도를 받아 "바로 앞에 서게" 된 순간 즉시 "바로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대면을 끝내었을 때에도 다시 한 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만 본다면 야곱에게 바로 같은 사람에게 축복해 줄 그 무엇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 천하를 다 쥐고 있는 바로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축복해 주겠으며, 또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야곱처럼 그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남의 나라에 이민 온 무력한 촌로(村老) 주제에 어찌 바로를 위해 축복이란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뒤에 업고 있던 야곱은 그처럼 여유만만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온 세계를 호령하는 군주라 할지라도 그를 위하여 오히려 축복해 줄 수 있는, 신자로서의 당당함과 부요함이 야곱에게는 가득했었습니다.
  비록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아니 국적조차 제대로 없는 떠돌이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일백 삼십년의 세월을 오직 영원한 내세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던 야곱에게는, 금세에서 모든 것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 바로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의 아들 요셉은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1절로부터 6절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어떻게 하든지 바로를 잘 설득해서 자기 아버지 살기에 좋은 땅을 바로에게서 얻어내고자 온갖 사전공작을 다 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목축을 혐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요셉은, 그런 애굽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 형제들이 그 생업인 목축에 종사하며 살 수 있도록 바로의 허락을 얻어내려고 온갖 머리를 다 짜내었습니다.
  그래서 열 명의 형들을 다 바로와 만나게 하지 않고 그 중에서 "오인을 택하여" 인터뷰를 하게 했는데 아마도 첫인상이 좋은 사람들을 특별히 골라서 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형들로 하여금 바로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까지 미리 다 사전에 리허설을 시켰습니다.
  물론 필요한 일이었고 요셉이 지혜롭게 대처하여 뜻대로 성취되기는 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하여 요셉이 바로를 대하는 방법을 보면 자기 아버지 야곱이 바로를 대할 때와 같은 여유는 찾아보기 힘든 것도 분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한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온 영적 부모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각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매일 쫓기면서 사는 자식들은 자연히 자기보다 더 높고 더 유력하고 더 돈 많은 사람을 대할 때에는 비록 그가 불신자라 해도 아무래도 그 앞에서 주눅이 들게 마련입니다.
  아니 부모라 할지라도 불신 부모들은 역시 꼭 같은 자세를 보이기 십상입니다.
  자기 아들보다 더 좋은 대학 나오고 더 좋은 직장 가지고 더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있는 다른 집안의 아들들을 볼 때, 자기와 자기 아들은 그들 앞에서 창피하고 못난 인생처럼 여겨지고 그래서 미리 기죽고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 그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한 인생을 살아온 백전의 노장과 같은 아버님, 어머님들은, 그런 소위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불신자녀나 유력하다는 불신자들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지극히 당당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자기 아들 다니는 회사 사장이라 해도 그가 불신자인 한에는 여전히 신자의 기도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신 사장은 기껏해야 자기 아들에게 줄 월급 액수를 정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신자 사원의 부모는 그 회사와 그 사장을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유는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아이고 얘야, 아무개는 교회 안 다녀도 저렇게 잘만 살고 있는데 너는 예수 믿고 산다는 게 왜 늘 이 모양 이 꼴이냐?"라고, 신앙생활 없이 세상에서 잘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것을 두고 자식에게 핀잔만 주는 부모가 된다면, 저 야곱이 누렸던 백발의 영광은 결코 지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회에서 자식들은 눈치 살피는 '유력해 보이는 불신자'들과 자식들은 부러워하는 소위 '성공했다는 불신자'들을 오직 뒤에 계신 하나님의 '빽'을 가지고 지극히 여유 있고 당당하게 대함으로써, 자식들로 하여금 그 '의연하고도 명예로운 센 머리' 앞에 절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부모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축복생활'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전수해 주는 것이 노년의 부모가 남겨 주어야 할 유산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그의 마지막 침상에서까지 자식들 앞에서 발휘해 보였던, 정말 멋있는 아버지로서의 면모였습니다.
  창세기 49장 1절로 2절에 보면 "1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하의 말씀은 야곱이 자기 열두 아들들에게 각기 해당되는 축복 혹은 예언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끝난 후 33절에 "33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본문은 흔히 '야곱의 마지막 축복'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 모두가 다 축복만으로 일관된 것이 결코 아님을 곧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열두 아들들에게 '너희들 무조건 잘 되어라.'는 식으로 내린 축복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큰 아들 르우벤에 대해서는 그가 비록 야곱의 장자요 기력의 시작이기는 했지만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일" 즉 그가 아버지 야곱의 첩이었던 빌하와 간음했던 일을 꾸짖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전에 '세겜에서의 집단 살인'의 죄를 저질렀던 것을 책망했습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축복으로 일관되었지만 그것도 보통 흔한 세상적인 축복의 내용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영적 우월성'을 두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의 경우를 보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누리게 될 육신적인 축복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들의 나쁜 성격을 고칠 것을 촉구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당할 정치적 상황을 예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들에게는 그 자손에게서 나타날 우상 숭배를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야곱의 축복이란 것은, 그냥 도매금으로 잘 되라는 식의 값싼 축복이 아니라, '너희들이 이런저런 행실을 바로 잡고 이런저런 일에 조심하고 살아야만 이런저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라는 실로 구체적인 축복들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이라고 해서 왜 자기 자식들이 무조건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이라고 해서 어떻게 열두 아들들 중에 '깨물어도 아프지 않을 손가락' 같은 아들이 있었겠습니까?
  자기 자식들이 다 잘되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다를 바 없었겠지만, 야곱은 그저 '너희들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는 식의 유치한 축복 한 번 해 준다고 그들이 정말 진정한 축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그 점에 대하여서는 자신의 한 평생을 통하여 속속들이 다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이런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저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회개해야, 사람이 이런 일을 맞이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로 판단하고 행해야 진짜 영육 간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야곱은 그야말로 '숙달된 인생 조교'와 같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마지막 침상에서 자기 자식들을 불러 놓고서, 진짜 신앙의 아버지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정말 그 자신의 실제적인 체험으로 구구절절 젖어있는 유언을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정말 복 받는 인생이 될 수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상하고도 구체적으로 일러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이 세상의 아무 부모나 할 수 있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그 어떤 백만장자라 해도 자기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없는, 실로 값지고 특별한 유산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런 아버지를 어찌 감히 경히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만 정말 축복받는 인생이 될 것이다.'라고 뜨겁게 유언하는 그 아버지의 앞에서 어찌 절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의 아버님, 어머님들이 소유하고 자식들에게 반드시 전해 주어야 할 진짜 재산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아놓은 돈을 끝까지 쥐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부모가 자식 앞에서 마지막까지 큰소리 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뱅이에게 생선 한 마리 주는 것보다 생선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더 낫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을 엄히 꾸짖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스스로 축복의 길을 막는 영적 자충을 저지르고 있을 때 그를 그 죄의 길에서 돌이켜 축복의 길로 바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지혜는 목사보다도 오히려 그 부모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돈 몇 푼 남겨 주는 것보다,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이 잘되는 것과 같이 범사도 형통케 되는'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자신의 평생의 체험을 통하여 가르쳐 줌으로써, 자식들에게 진정한 인생의 보배를 귀중한 유산으로 반드시 남겨주는 진짜 부요한 부모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무언가 '가진 것' 있는 부모만이 끝까지 자식들 앞에서 대접받고 존경받고 효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광 열쇠'나 저금통장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그저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다 누린' 불신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부모님들이 노년에 이르도록 그 권위와 존경과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똑똑하고 젊어도 자식들 편에서는 가지기 어려운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백발의 부모가 창창한 자식보다도 훨씬 더 유리하고 우세하고 압도적인 어드밴티지를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재력은 아닐 것입니다.
  은퇴한 부모가 기껏해야 자기 수중에 남아 있는 돈밖에 없지만, 자식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더 많이 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체력이나 미모가 될 수도 없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어찌하든지 세월을 속여 보겠다고 제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자식의 힘을 당할 수는 없고 그 무슨 성형수술을 해도 며느리의 젊음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은혜와 축복의 체험 가운데 살아온 신앙의 부모들은 바로 그런 '영적 노하우'에 대해서는 그 자식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우세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광 열쇠'나 저금통장과는 비교도 안 될 명예로운 권위이며 막강한 영향력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보유하고 있는 한 그 자식들은 그 부모가 아무리 육신적으로는 늙어가도 조금이라도 무시하거나 감히 얕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의 '예배생활'을 리드하는 영적 권위를 발휘하며 자기 자식의 '사회생활'에 대하여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며 또한 자기 모든 후손들에게 '축복생활'의 비결을 전수해 주는 부모가 됨으로써, 남은 생애를 통하여 더욱 '백발의 면류관'을 자랑하며 '복되고 영광스러운 노년'을 누리시는 경향의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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