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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난 아버지와 달라(2) : 아버지 사울, 아들 요나단 (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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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울, 아들 요나단 (삼상 20:17~23) 

의리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의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어떤 분은 '의리' 하면 제일 먼저 '조폭' 생각이 난답니다. 일명 '깍두기'라고도 부르는 조직폭력배 말입니다. "목사님, 역시 의리 하면 조폭 아닙니까? 영화 같은 데 보면 이런 사람들은 의리 위해 살고 의리 위해 죽잖아요? 아, 거 왜 '형님' 위해 죽도록 충성하지 않습니까?" 크게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의리가 아니라 객기(客氣)요 치기(稚氣)입니다. 의리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의리'(義理)는 "사람이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신의를 지켜야 할 도리"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의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의리는 옳을 '의' 자를 쓰므로 반드시 의, 옳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데, 죄를 짓는데 의리랍시고 함께 돕는 것은 절대 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폭이나 범죄자들이 말하는 의리는 의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의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옳은 도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의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특히 '의리'가 인간관계에서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한 번 보세요.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내 이익과 손해에만 민감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거나 이익이 안 된다 싶으면 언제라도 도리를 어기곤 합니다. 이런 사람은 똑똑하고 약삭빠른지는 몰라도 정말 의리가 없는 사람이지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 있어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어렵더라도 상대방에게 반드시 도리를 지킵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또 옳은 일이라면 이렇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지만 반대로 불의한 일이라면 절대 안 합니다.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이요 의리가 있는 사람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의리가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사람이 되려고 애써 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지금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남들에게 인정받고 신뢰 받지 않습니까? 요즈음을 의리가 없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이익이 된다고 하면 약속이고 신뢰고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제가 아는 어떤 의사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 요즈음 간호사 구하기가 참 힘듭니다." "왜요? 간호사 할 사람이 그렇게 없나요?" "그게 아니라 요즈음 간호사들이 이웃에 있는 병원에서 조금만 월급 더 준다고 하면 금세 가버려서 정말 오래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 간호사만 그렇습니까? 직장도 다른 곳에서 조금만 더 대우 잘 해준다면 금세 떠나 버립니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그렇다며 한 숨 쉬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약삭빠르게 더 좋은 곳을 찾아가고 더 큰 이익을 찾아 떠도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시편 1편 말씀처럼 이런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결국 열매를 못 맺고 망하고 맙니다. 좀 우직해 보여도, 지금은 당장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신의와 의리를 지키는 사람,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사람이 결국에는 인정도 받고 잘되게 마련입니다. 왜요? 결국 사람들의 이런 사람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의리를 가장 잘 지키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참 손해 많이 보셨습니다. 이 성경책의 구약과 신약은 '옛날 약속'과 '새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담은 책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어떤 손해까지 보십니까? 외아들을 주기기까지 희생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아버지인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 예수님도 우리와 한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바친 의리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 믿는 백성들도 이 의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본을 보이고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자녀들에게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절대 손해 볼 짓 하지 마라. 남에게 피해를 줄지언정 너는 피해보지 마라"고 가르친다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일 수는 있지만 결국 의리를 저버리는 불의를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셈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네가 손해 안 보고 이익 보는 것도 중요하고 네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드시 약속은 지켜라. 반드시 불의한 길이 아닌 의로운 길을 가라. 반드시 의리를 지켜라."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까? 아니면 "목사님이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현실을 잘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사울과 다윗의 차이

성경에는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한없이 겸손하고 좋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스의 아들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택하신 이유는 그의 잘난 외모 때문만이 아니고 무엇보다 사울이 너무도 충성스럽고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하게 참 잘 하던 분이 조금만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태도가 변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정치하는 분들 중에도 지금까지 이런 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교회에서 직분이 좀 높아졌다고 태도가 싹 달라지는 분도 있습니다. 식당이 처음에는 참 친절하고 음식도 잘하다가 조금만 장사 잘되고 손님 많아지면 금세 불친절해지고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마라 식으로 도도해지는 것을 봅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왕이 되자 점점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대신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에게 있어 교만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의리(義理)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옳은 일을 위해 상대방에게 도리를 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의리를 위해 내가 손해 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디 다윗이 남입니까? 우리말로 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다윗은 공적인 관계로는 골리앗을 때려눕힌 자기의 가장 귀한 부하요, 사무엘하 16장 21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해서 자기의 무기 드는 자, 즉 호위병으로 임명했으며 이뿐 아니라 악령이 사울을 괴롭힐 때 수금을 타서 악령을 쫓아내 주기까지 했습니다. 

또 사적인 관계로는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했으니 사위이기도 한데도 결국 사울은 다윗이 자기의 왕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려 합니다. 내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니 신하고 부하고 사위고 상관없이 무조건 다윗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군사를 거느리고 끝까지 다윗을 쫓아가 죽이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사울은 의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구분 못하고 그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사람입니다. 그토록 충성스런 부하요 사위지만 의심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요즘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재산을 놓고 부모와 자식이 소송을 벌이고 형제가 원수 되어 서로 싸웁니다. 이익 앞에서는 친구고 동료고 같은 교회 성도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한 마디로 정말 의리 없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한 가지 예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쫓아 엔게디 광야까지 갔을 때 사울은 뒤(큰일)를 보려고 다윗 일행이 숨어있는 굴에 혼자 들어갑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큰일 보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만 살짝 베어낸 후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며 사울을 해치지 않습니다. 

또 사무엘상 26장에도 또 한 번 다윗은 하길라 산에서 잠든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똑같은 이유에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갑니다. 이런 다윗을 보고 부하들이 차려준 밥상도 못 받아먹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의와 의리에 감동을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3장에는 이런 사건도 나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때 "누가 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내게 길어다 마시게 할까?"라고 무심코 말하자 다윗의 세 용사 아비새, 요셉밧베셋(아디노), 엘르아살이 목숨을 걸고 가서 그 우물물을 길어 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것은 물이 아니라 너희들의 피인데 내가 어떻게 마시겠냐며 자기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 드립니다. 부하들이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리고 다윗에게 푹 빠져서 "저런 분이라면 내가 목숨을 걸 수 있겠다"고 결심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다윗은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의리를 지킬 줄 알았기 때문에 부하들을 감동시키고 사울과는 달리 좋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이제 요나단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봅니다.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아버지와 달리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친구가 되었는데 그냥 친구가 아니라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라고 할 정도로 정말 귀한 친구가 됩니다. 3절에는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온 언약과 같은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끝내 친구 다윗을 죽이려 하자 요나단은 자기 목숨까지 걸고 친구 다윗을 도망하게 하면서 이 약속을 합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함께 읽어볼까요?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목숨보다 귀한 친구로서 서로와 서로의 집안과 자손들에게까지 의를 지키기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이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 다윗을 도망시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에게 다윗이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입니까? 자기가 물려받아야 할 왕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는 최대의 라이벌이요 정적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사위 다윗을 죽이려 한 것인데도 요나단은 라이벌이고 정적이고 내 손해고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명보다 귀한 친구와의 약속과 신의가 먼저이기에 이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요나단뿐 아니라 다윗도 친구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킵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과 함께 블레셋과 싸우다가 길보아 산에서 비참하게 죽은 후 다윗은 친구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끝까지 돌보아 줍니다. 므비보셋은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가 아이를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됩니다. 옛날에는 왕 자리를 놓고 형제와 혈육까지도 무참하게 죽이던 때라서 틀림없이 이대로 있다가는 삼촌들, 즉 요나단의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 생각해 도망가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졸지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두 다리까지 절게 된 이 불쌍한 므비보셋, 게다가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이 비참한 인생을 다윗이 거두어 준 것입니다. 어찌 보면 다윗에게도 이 므비보셋이 왕권을 놓고 다툴 수도 있는 정적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친구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애아인 므비보셋을 거두어 주고, 게다가 므비보셋에게 모든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고 자기 친아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왕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도록 특혜까지 베풀어 줍니다. 보세요. 이 모든 것이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이루러진 의리 때문입니다.

다윗은 물론이요 그 친구 요나단은 결국 아버지와 비참하게 죽었지만 끝까지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킨 것을 보며 정말 아버지와 다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금 위험한 말을 좀 할까요? 내 아버지, 부모라고 반드시 편들지 마세요. 내 자식이라고 무조건 편들지 마세요. 잘 한 것은 잘 한 것이고 잘못 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혈연이나 사적 관계보다 의를 좇아야 합니다. 부모라고 자식이라고 잘 못 했는데도 무조건 잘 했다 잘 했다 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망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의를 선택했고 친구를 도운 것이며 그래서 친구 다윗도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통해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킵니다. 결국 의리가 보상을 받은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우리는 아버지 사울과 아들 요나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너무 다른 아들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살펴본 기드온과 아비멜렉처럼 아버지를 닮지 않은 부정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극복한 아들의 긍정적인 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모의 긍정적인 면을 잘 배워야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점을 잘 배우면 참 괜찮은 아들딸이 됩니다. 또 우리 자녀들도 내 장점을 잘 배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내 부모가 정말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심각한 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술이나 먹고 폭력이나 휘두르는 아버지, 바람이나 피우고 매일 죽도록 싸움이나 하는 부모 밑에서는 정말 똑같은 자녀밖에 안 나올까요? 물론 그럴 가능성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분명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도 다 극복하고 정말 좋은 자녀가 나오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극복되는 것이 아니고 참 '은혜'를 체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죄인도 원수도 다 용서가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만약 은혜가 아니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만일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며 어떻게 나를 괴롭힌 사람을 품어줍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내 부모라도 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하고 품어주고 나서야 비로소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상처와 원망을 내 깊은 속에 꽁꽁 감추어 둔다고, 그래서 그것이 겉으로 잘 안 드러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속에 있는 상처와 응어리가 폭발합니다. 따라서 죽을 죄인도 용서하고 원수도 품어주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먼저 받고, 그 다음에 그 은혜로 부모를 용서하고 품을 때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그 상처와 그리고 모든 단점까지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뿐 아니라 내가 자녀에게도 상처와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이 왜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고 서로 용서되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친구인 다윗도 그 사랑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알았기에 친구에게 진정한 의리로 대했고 나중에 그 친구의 의리로 보상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 아버지의 문제를 극복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자신의 타고난 환경이나 부모를 탓하기 이전에 이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불우한 환경이나 아픔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다른 어떤 출세나 성공의 비결보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반드시 옳은 길로 갈 것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되고 우리 자녀가 잘되는 유일한 길임을 이 가정의 달, 특히 어버이주일에 깨닫고 실천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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