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하나님 나라와 어린이 (눅 18:15~17)

  • 잡초 잡초
  • 448
  • 0

첨부 1


하나님 나라와 어린이 (눅 18:15~17)

    5월 가정의 달에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어린이주일이나 어버이주일이 기독교 절기는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의 소중함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교회가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적으로 건강한 가정, 사회를 세워가도록 앞장서는 것은 적극 권장할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교회에서 어린이를 주제로 하는 메시지들이 선포될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라는 가르침들은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시대마다 세상의 훌륭한 교사들로부터 충분히 교훈 받고 있습니다.   그 교훈들만으로도 우리가 사람다운 길을 걷는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훌륭한 가르침과 교과서가 됩니다.   그런데 어린이주일 또는 어버이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역시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부모가 되고,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자녀들로 살라고 가르치니 목사의 설교가 윤리와 도덕 강의로 들려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인간의 윤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씀하면서 동시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사람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고 그의 자녀가 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마땅한가?  그리고 나와 똑 같은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인간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은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그 열 가지 계명 속에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기본도리가 담겨있고 다음에 이웃에 대한 인간의 도리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이지 않은 가르침은 실제 생활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론에 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만 이론으로 그친다면 거기서 사람을 변화시켜 새롭게 만드는 선한 열매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이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죄인이 변하여 의롭게 되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그 자리를 바꾸게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읽고 들음으로 사람의 마음이 수양되고 좀더 고상한 교양인으로 살게 하는 윤리 교과서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의 달을 맞아 주의 말씀으로 교훈 받아 부모와 자녀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서로 나눔으로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으니 이보다 귀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어린이주일에 ‘하나님 나라와 어린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곁에 오게 하시고 모델로 삼으신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 고 하셨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어리다고 무시하고 어린이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들의 행동을 유치하다고 여겨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지나쳐버립니다.   하지만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에게 배워야 할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점을 지적하여 어른의 특권을 내세워 어린아이들을 무시하던 제자들에게 따끔한 책망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부모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보내어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였는데 제자들은 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어른들이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아이가 소란을 피우거나 울음을 터뜨려 예배 분위기를 깨뜨렸을 때 방해꾼으로 여겨 눈을 흘기는 것처럼 제자들 눈에는 어린이들이 예수님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 가사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운 성경 내용도 모르는 체 멀뚱히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눈길은 어쩌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예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고 내쫓던 제자들의 마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아빠 엄마들은 언제나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그날을 고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아기를 돌보며 예배에 동참하고 싶어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성장한 부모님들도 전에는 같은 형편이었음을 기억하고 어린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을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기 부모님들은 예배 도중에 아기가 보채고 울거든 꼬집고 쥐어박지 말고 조용히 데리고 나가 달래주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도중에 아이들을 꾸중하거나 눈치를 줘서 예배 드리는 시간이 어린아이나 부모들에게 마음 상하는 경험이 되어서는 서로에게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내쫓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주님은 ‘어린이가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거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아이들을 가까이 오게 하신 주님은 그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어른들에게는 귀찮게 여겨지고 무시당하던 아이들이 예수께 환영 받고 진정한 천국시민의 모델로 소개를 받았습니다.  어린이를 소중하게 여기신 주님의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어린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신대 기독교교육학 양금희 교수의 글 ‘예수님과 어린이’ 참고) ‘받든다’는 말은 ‘받아들인다’ ‘영접한다’ 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베버(H. R. Weber)라는 신학자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객관적인 겸손’이라는 말로 어린이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설명합니다.   어린이가 가지는 객관적인 겸손이란 어른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주관적 겸손이 아니라 이미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되어 있는 상태, 즉 '받는 자' 혹은 '맞아들이는 자'의 자세라는 입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볼 때 어린이들이 반드시 어른들보다 겸손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겸손하기는커녕 얼마나 영악스러운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똑 소리가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겸손한 태도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고 얼마나 욕심이 세고 고집스러운지 절대로 양보를 안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이들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존할 수 밖에 없어 ‘받아들이는 자’ ‘맞이하는 자’ 의 자세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막 태어난 신생아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아기는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심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씻겨주고 재워주는 것과 심지어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까지도 모두 엄마의 도움에 의존합니다.  아기는 엄마의 보호와 사랑과 배려에 철저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의존적 존재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도움을 받는데 무슨 주저함이나 거부가 있을 수 없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던가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계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자녀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데 무슨 계산이 필요하고 체면이 필요합니까?

    베버가 말한 이 '객관적 겸손'이라는 개념을 따르면, 어린이가 보호자에게 음식과 보호와 사랑을 요청하고 그것에 철저히 자신을 여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늘나라를 요청하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열려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백성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이고,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부모 의존적인 갓난아이에게는 부모에게 내놓을만한 어떤 자랑도 업적도 공로도 없습니다.  한 가지 있다면 그 존재의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것뿐입니다.   아기를 기르는 부모에게는 아기가 건강하게 똥을 잘 싸도 이쁘고 젖을 먹고 트림만 시원하게 잘해도 이쁘기만 합니다.  내가 무엇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랑하는 자는 이미 어린이가 아닙니다.   내가 무슨 선한 행위를 많이 하였으니 내가 하나님 나라에 당연히 들어갈 사람이고 또 그 나라에서 큰 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어린이의 겸손을 잃어버린 자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무엇입니까?   나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심을 고백하며 그 손길을 요청하는 자세가 겸손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지 않음’이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않음’이 죄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음’이 죄라고 말합니다.  누가 이것을 죄로 생각하겠습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린아이처럼 그 사실이 믿어집니다.  예수를 믿지 않음이 죄라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래서 성전에 나가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스럽게 보시고 기쁨으로 영접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나오는 새 생명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어린이들의 낮아짐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큰지 다투고 있을 때(막 9:33 이하; 눅 9:46-48), 천국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마18:1 이하),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고 하시고,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눅 9:48)고 하셨습니다.  이 어린 아이 같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 작음을 인정하는 자만이 하늘 나라에서 진정으로 큰 자가 된다는 역설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부모님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무시하고 어린이들을 꾸짖어 보내는 것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정한 행동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잘 되기를 바라십니까?   예수께 가까이 하도록 인도하십시오.   그날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무시하여 아이들을 쫓아냈다면, 오늘날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의 공부시간이 아까워 주님 만나는 시간마저 생략하여 아이들을 예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내쫓고 있습니다.   

    어린이 때 주님을 만나도록 함이 인생을 바꾸게 하는 복된 기회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천국을 받들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린이는 그 어느 시기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에 가까운 시기입니다.   여기에 어린이들을 위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 말고 일반적인 아이들, 아직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깨끗한 마음의 상태, 하얀 백지처럼 그곳에 무엇을 그리던지 그대로 남는 상태의 어린이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나라를 그려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차서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경험, 철학으로 가득 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세계어린이전도협회가 제시한 통계를 보면,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보너 박사를 통해 성공한 크리스천 전문직 종사자 233명에게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질문한 결과 20세 이전이 138명(55%)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어 21∼30세가 65명(26%), 31∼40세가 22명(9%), 41∼50세가 4명(2%), 51∼60세가 3명(1%), 60세 이상이 1명(0.4%) 순이었습니다.   세계어린이전도협회는 또 다른 조사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인 86%가 15세 이전에 기독교를 알고 거듭났다고 말하고 있으며, 스펜서 박사가 1000명의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집계한 ‘언제 구원 받았는가’란 질문에 548명인 55%가 20세 이전에, 34%인 337명이 30세 이전에 거듭남을 체험한 것으로 대답했다고 밝혔습니다.    어릴수록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유년주일학교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엄마 아빠 앞에서 재롱을 떨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고 단순합니까?  그런데 조금 나이가 들어가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돈을 준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재롱을 피우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를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비싼 학비 들여 좋은 학교 보내고, 좋은 과외선생님 붙여주었다고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지 맙시다.  그 보다 더 소중한 인생의 길을 걷도록 주님을 만나는 자리로 인도하는 부모들이 되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갓난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모두 하나님의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집시다.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합시다.  부모의 품 안에 있는 어린 아이는 결코 염려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린이의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그 나라 백성으로 살면서 우리에게 맡겨진 선물, 자녀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좋은 부모의 책임을 힘써 이루는 성도들로 살아갑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