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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신앙의 상속 (히 11: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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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상속 (히 11:17~26)

 저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신앙의 상속”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예로부터 인류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부모의 신분이나 재산을 상속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장자가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고 상속재산의 상당부분을 가졌습니다. 그런 다음, 나머지가 아우들의 몫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지위와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영예로 여겼습니다. 이와 같은 상속에 대한 욕망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자식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남겨주고 싶어 하고, 아무 재산도 남겨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자녀들이 수고 없이 부모의 부를 대물림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상속에 대한 생각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함에 따라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상속보다는 자기들의 노후 준비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노인들이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그래도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무언가 상속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부모의 의무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회장인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288억 달러를 내서 게이츠 앤드 멜린다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성공으로 나는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많은 재산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부를 사회에 돌려줄 책임이 있고 또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고 했습니다. 또 그는 상속에 관해 말하기를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재산이 자녀에게 돌아가는 것은 그들에게도 건설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으면 당장은 편하게 살지 몰라도 땀 흘려 수고하지 않은 재물은 결국 그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하여 무익한 인생을 살다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땅이나 집과 같은 부동산이나 현금이나 주식과 같은 동산이 아니라,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무형의 재산인 신앙을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였으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체 없이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화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금방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무려 25년이 지나서 그의 나이 100세가 되어서야 성취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8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인 신앙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말씀과 같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자식을 생산하는 일에 관해서는 죽은 것과 같았다는 표현은 적절합니다.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백세 난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은 독자 이삭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백세에 낳은 독자일 뿐 아니라,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삭이 결혼도 하지 않았고 대를 이을 자식을 낳은 것도 아닌데, 그를 죽여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으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번에도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아브라함이 그처럼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대단하지만 이삭의 믿음도 아버지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짐작하건대, 당시 이삭의 나이는 20세에서 25세쯤 되었다고 보는데, 그처럼 혈기왕성한 이삭이 120살이 넘은 아브라함이 하는 대로 순순히 결박당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완력으로 하자면 얼마든지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순순히 결박을 당하고 자기의 목숨을 아버지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말해 줍니다.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이 평소에 철저한 신앙을 이삭에게 심어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에게 그의 신앙을 그대로 상속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기 아들 야곱에게 신앙을 상속했습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 챈 것은 비열한 행동인 것이 분명하지만,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데 반하여 야곱은 그것을 갖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큼 귀하게 알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의 행동은 신앙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 역시 야곱에게 신앙을 제대로 상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 역시 그 아들들에게 신앙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열 두 아들 가운데 특별히 요셉은 야곱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17살의 나이에 머나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디서나 그 조상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생각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애굽인들이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이시니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7년 기근으로부터 아버지 야곱을 비롯해서 온 혈족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요셉이 죽은 지 근 400년 후의 사람인 모세에 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졌던 그 신앙이 맥이 끊어지지 않고 모세의 시대까지 계승되어 왔음을 말해 줍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부모가 자식들에게 상속해 준 결과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해서 세계 도처로 흩어졌으나 1900여년 만에 팔레스틴에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유대교 신앙을 자손들에게 면면이 계승해 온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을 가리켜 역사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에 의한 기적이 아니라 신앙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전 세계인이 다 알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생겨났을까요? 자녀 사랑도 이 정도가 되면, 병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자녀의 조기 영어 교육이 가족의 생이별을 감수해야 할 만큼 우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족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남보다 먼저 영어를 습득해서 성공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기러기 아빠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이란 형통할 때나 역경의 때를 막론하고 함께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합니다. 어느 기러기 아빠의 말을 들어보니 삼년 만에 외국 갔던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는데,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고 서먹서먹하다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정이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아서 자녀들에게 신앙을 상속하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재산을 물려주지 못해도 그리 마음 아파할 것이 없습니다. 조기 유학을 보내지 못해도 미안해 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상속해 준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유산을 상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위대함을 자주 말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딜 가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자녀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해 주었습니다. 그 약속은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서 받은 바로 그 약속 곧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살 동안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였고, 나그네로서 그 땅에 머물러 살았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경을 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삭의 생애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삭 역시 아브라함처럼 목축을 하면서 가나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야곱도 이 약속을 받았지만,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 자식들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 그의 온 가족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갔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고센 지방에서 430년 동안이나 머물러 살게 되었습니다. 말이 430년이지, 실로 긴 세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가나안 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가서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자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함께 그 약속도 잊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위대한 약속들이 오늘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 7절 이하에 이르기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비록 이방인이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고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할 자격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에게 팔레스틴 땅에 가서 살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대한 약속은 육신으로 이스라엘 자손된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나안에 대한 약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에 대한 많은 약속이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곧 오래된 약속과 신약 곧 새로운 약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성취된 약속들도 있지만, 성취를 기다리는 약속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시대를 초월해서 성도들의 삶속에 적용해야 하는 약속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하신 약속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서 화란으로 피신가던 야곱에게 하신 것이지만, 야곱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약속을 신약성경에서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그것인데,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부모는 항상 자녀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언젠가 그들 곁을 떠나겠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 자녀들과 함께 계시면서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복과 저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역시 고대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오늘 믿는 우리에게도 주신 약속입니다. 시간 관계상 복에 대한 약속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8)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9)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10)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11)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복을 받는 비결이 소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고 지극히 쉽고 간단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것이 복 받는 비결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믿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자녀 교육에 대한 온갖 처방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방법이 최고라고 내세웁니다. 만일 우리가 교육 장사꾼들의 말을 다 들을라치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결과에 맞닥뜨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교육하되 사람들의 말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주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앞길을 열어주시면 어딜 가나 머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명철을 주시면 어딜 가나 인정받는 인재들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요셉이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씀하기를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전 8:12)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 되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복된 약속들이 그의 삶속에서 그대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어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약속하신 대로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자녀들이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으나 평생도록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가나안에 살면서도 그들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마치 나그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0절에 보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이 정작 간절하게 사모한 것은 지상의 가나안이 아니라 하늘 본향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는 현세 지향적이 아니라 내세 지향적인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이 땅에서도 복을 받아 잘 되지만, 궁극적인 상급은 이 땅이 아닌 천국에서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원한 세계에 속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4절로 25절에 이르기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니, 모세에 관해서 언급합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서 왕궁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의 양어머니인 공주는 매우 유력한 사람으로서 후에 여자의 몸으로 애굽의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저절로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땅의 영광보다 더 위대한 영광을 얻기 위해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특권을 내버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보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그가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밤낮 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술꾼이 되고, 남을 속여 먹을 생각만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밤낮 학문을 생각하는 사람은 학자가 되고, 돈벌이에 몰두하는 사람은 사업가가 됩니다. 그러나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 땅에서도 잘 돼야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처럼 더 크고 영광스러운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 된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다음 세대의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가 지금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들이 낮은 차원의 꿈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꿈을 갖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대는 자녀 교육이 가장 시급한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생존경쟁이 치열해 진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을 보면 자기 자녀가 남에게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고 부자로, 성공자로 살게 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성 교육은 실종되고 지식을 주입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교육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가지 말고 성경적인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자녀들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일생에 함께 하시면서 의와 평강의 길로 인도해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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