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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그리스도인 (롬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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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 (롬 8:9)

 오늘 저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신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계시느냐의 여부입니다.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계시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그리스도인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상관없이, 박식한 사람이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그 사람 속에 성령이 계시면 그리스도인입니다. 반면에, 교회생활에 익숙하고 직분자가 되었더라도 그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에 불과하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육신에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자연인은 육신에 있는 사람입니다. 자연인의 상태란, 죄와 허물로 인해 그 영이 죽은 상태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에 이르기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나름대로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수많은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그 같은 신들이 해와 달과 별들과 바다와 산과 거대한 바위와 고목과 짐승이나 새, 물고기와 같은 것들을 신격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왕이나 조상을 신격화해서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숭배해온 신들은 하나같이 피조물을 신으로 경배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천하지에 신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해와 달과 별들과 산과 바다와 초목과 동물을 창조하신 신은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 우상숭배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큰 바위를 보고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고 하면서 공경한다면 다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물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와 허물로 인해 사람들의 영이 죽어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과 영은 그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육신에 있는 사람은 영적 세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6)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려면 그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어 있는 영이 신생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듭남 곧 영의 신생(新生)은 사람의 방법으로 불가능합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였으나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남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아기 인형을 얼마나 정교하게 잘 만드는지, 언뜻 보면 살아있는 아기처럼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인형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인형에 불과합니다. 인형은 감각이 없습니다. 젖에 대한 욕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생명의 활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갓 태어난 아기라도 정상적인 생명의 활동을 합니다. 비록 말도 못하고 무능해 보이지만,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울고, 배가 부르면 만족한 웃음을 웃고, 제 엄마를 알아봅니다. 

영적인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기와 같아서 영적인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갈급함이 있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하루아침에 청소년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듯이, 거듭난 사람 역시 영적 성숙을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난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동차에 대하여 알지 못하지만 문제지의 답을 외워서 운전면허시험을 치듯이, 교리 문답집을 외워서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신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입으로 주님을 부를 수는 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것은 성도님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증거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듭났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몇 년 동안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입니까!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으므로 사회를 이루고 서로 기대면서 살아갑니다. 또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친구들을 사귑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람들 사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납니다.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한 사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고독하게 혼자 남게 됩니다. 노인들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외로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 곁을 떠나도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바로 성령이십니다. 

(찬 486장)

♪ 내 마음에 임하신 주의 성령 
늘 계실 줄 믿습니다
그 사랑이 내 맘에 충만하여 
날 기쁘게 하옵소서

우리가 우리 속에 와 계신 성령을 의지하고 그 인도하심을 구할 때, 성령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면서 한없는 위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날마다 새롭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고아와 같이 고독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 동행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고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 세상의 허탄한 것에 속지 아니하고 생명의 진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제가 이번에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인도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지시해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 13절에 이르기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열망과 확신을 주셔서 그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속에 어떤 소원이 일어날 때 그것이 성령께서 주신 것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기준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일 성령께서 주신 소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양심 상 떳떳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깃듭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소원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인 줄 알면서 행하지 않거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전자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고(살전 5:19), 후자는 성령을 근심하시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엡 4:30).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들 생각대로 살아가지만, 성도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하실 때 위협하시거나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으시며 온유한 음성으로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면 성령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와서 끈질기게 자기 몫의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자 그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을 고집하자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 아들과 같이, 우리가 성령의 뜻을 묵살하는 것을 가리켜 성령을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고 제 뜻대로 살면 결국 사망의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생명과 평안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한편,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보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되 성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올려 주십니다. 성령께서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각 교회가 처해 있는 형편과 실상을 아시고 적절한 권면을 주셨는데, 각 편지의 끝에 보면 일곱 교회에게 공동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같이 말씀하신 것은, 지금 교회시대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역사하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인격을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본문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있는 사람이므로 언제나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자, 성경이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과 대립적으로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이르기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였고, 로마서 8장 6절 이하에 이르기를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방금 소개해 드린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그 차원과 성격이 하늘과 땅과 같이 정반대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 영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고통을 안겨주지만 영의 생각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의 생각을 하지 말고 영의 생각을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는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영의 생각만 하면서 산다면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좇지 않고 영의 생각을 좇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 23:7)는 잠언처럼, 생각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유다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선과 악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과일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 

가시나무가 ‘올해는 포도를 맺어야지’ 다짐한다고 해서 포도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요, 엉겅퀴가 ‘올해는 무화과 열매를 맺어야지’ 마음을 먹는다고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사람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결심을 할지라도 육신의 생각밖에 할 수 없고, 그 결과 사망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로 21절에 이르기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추악하고 무섭습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삶은 이처럼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변화되었으므로 이제 성령을 좇아서 살아갈 수가 있고, 그 결과 생명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이르기를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답습니까!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하신 결과가 이처럼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성도라고 해서 저절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성령의 지시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은 신앙양심에 비추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면 여러분의 신앙양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뜻을 거역하려고 하면 여러분의 신앙양심이 가책을 받아 괴로울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양심은 마비되어서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살아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우리의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위대한 사도라도 영적으로 어린 아이 시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점점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지시에 순종한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아니,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죄를 이길 힘을 주시며,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절대로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날마다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성도님들 속에 역사하셔서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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