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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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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마 18:21~35)

I. 용서의 종교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우리 몸을 치료하고 불행한 우리 마음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며 우리 영혼을 구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세계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만이 용서하시는 신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 끓여 엑기스로 만들어 한방울 물로 떨어뜨리면 "용서"하고 떨어질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누구나 다 교회에 처음 찾아 나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드라마를 이 땅에 펼쳐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는,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용서의 역사였습니다.
제1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제2막 3년동안 그분은 용서의 복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3막 일 주일 동안 우리가 당해야 될 온갖 수치와 냉대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될 온갖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몸에 감당하셨습니다.
제4막 그분은 용서를 완성하시기 위해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용서의 역사를 펼쳐가십니다.

이 강단은 하나님의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곳입니다.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주님 전에 찾아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II. 용서의 한계 철폐

존 브로크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성인 110명이 선정한 위대한 발명품 121가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 발명품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우개입니다.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데생이나 스케치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많은 작곡이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지워주는 용서의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성경의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도 사도바울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5개의 긴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네 번째 설교입니다. 교회생활 설교 혹은 신앙공동체 설교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교회생활 하는 가운데 용서가 가지고 있는 천국의 용서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책무를 수치화 하려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니까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범하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게 되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에 의하면 용서를 해야 하는데 이럴 때에 어디까지 얼마만큼 용서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들 보다는 마음이 너그럽게 여겨졌던 모양이지요. 한껏 인심을 써서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대단히 엉뚱하기만 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일곱 번씩 일흔 번" 헬라어의 이 말은 70 더하고 7이라는 말도 되고, 70 곱하기 7이라는 말도 됩니다. 똑같은 이 단어를 구약 창세기 4장 24절에서는 라멕이 받을 벌이 77배나 될 것이다 그래서 70 더하기 7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이 본문에서는 70 곱하기 7 = 490번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오늘 본문은 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의 양에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용서의 횟수 제한을 철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제한적인 용서, 이것이 천국의 용서요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실천해야 될 용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용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용서의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공동체로 돌아오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방인이든 창기든 세리든 어떤 죄인이라도 그들을 용납해야 된다. 교회 공동체는 그들을 용납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III. 용서는 하나님의 것

1. 왜 그렇게 용서가 중요합니까?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용서가 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용서가 잘 안된다는 뜻일까요? 역설적으로 말하면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몸으로 기적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어렵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셔야 할만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용서의 선언이요 대헌장이요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절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모질고 쓰린 아픔을, 온 인류가 감당해야 될 고통을 한 몸에 지금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그분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바로 용서의 절정이요 용서를 완성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다가 이웃들에게 오해 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평안도 천국도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IV. 천국의 용서윤리

본문은 교회생활 설교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용서"부분입니다. 사회윤리를 묻는 상대적인 윤리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천국은... 천국의 윤리, 절대적인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천국 그랬을 때 죽어서 가는 영원한 천당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곳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한번 예수님을 믿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여러분 지옥 가기는 틀렸습니다.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이제는 우리가 천국백성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내 마음이 천국을 경험해야 됩니다. 우리 가정이 신앙공동체가 내가 머무는 그곳 안에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IV-1. 원수 없다

천국의 용서 원리를 본문이 가르쳐 주는데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용서 원리가 무엇인가? 용서의 윤리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 번째 천국은 원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우리와 우리 사이에도 "원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무려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진 사람이 이제는 빚을 갚으라는 명을 받고 주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자기가 진 빚을 갚지 못하면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일만 달란트라는 이 빚은 인간이 갚을 수 있는 빚을 크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종의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종으로 팔아 치워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영적인 파산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주인 앞에 엎드려서 조금만 참아 주시면 다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그러나 애걸로 갚아지는 분량이 아닙니다. 기도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는 종교로 갚기가 불가능합니다. 선행이나 도덕이나 윤리를 쌓아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채무 증서를 가져오게 하고 찟어서 훠어이 날려버렸습니다. 

성경에 "탕감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피에미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용서한다는 뜻으로도 번역되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피에미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로 씌여지고 있습니다. ① 죄를 멀리 옮겨버린다. ② 죄를 완전히 불태워 먼지로 만들어 죄를 날려버린다. ③ 더러운 오물을 깊이 묻어 덮어버린다. 

시편 103편 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버렸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피에미 - 탕감해 준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까?
왕으로부터 모든 부채를 탕감받고 기쁨에 겨워 나오는데 보니까 옛날 친구를 만났는데 자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친구입니다. 멱살을 움켜쥐고 그 빚 갚으라고 소리를 질러댑니다. 친구는 엎드려서 조금만 말미를 달라고 싹싹 빕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습니다. 너는 감옥에 들어가라. 네 부인보고 갚으라 하라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내모습이요 너의 모습이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 모두다 탕감 받았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받은 상처, 미움, 손해, 분노는 일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갚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암덩어리를 내 감기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는게 인간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태산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준 것은 티끌처럼 느껴지는게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데, 내가 받은 용서가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데,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받은 손해만 기억하고 살아가는게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들여다 보면 내가 용서하게 되면 내 인격과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러서 내가 너무 멍청해서 업신여김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용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용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용서할 수 없다는 내면을 들여다 보면 자기 의가 크게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생각하여 이렇게 못된 인간을 용서하면 사회질서가 파괴되어진다. 저런 인간이 용서받고 세상에 버젓이 살아간다면 세상의 정의는 누가 세우겠느냐? 누가 세상의 공의를 세우겠느냐? 내가 아니면 누가 세우랴? 내가 아니면 저 인간을 누가 처단하랴? 자기가 처단하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 뭐라 말씀하십니까? 너에게 심판의 권세를 준 적이 없다. 공의는 내가 세우는 것이지 너에게 맡긴 적이 없다. 너는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려무나. 

IV-2.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것처럼

천국의 용서윤리 두 번째는 천국에서 용서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그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나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너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것처럼 나도 너를 용서하는 윤리 이것이 천국의 용서윤리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주께서 용서하신 것같이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도 너를 용서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너를 사랑하는 윤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 죄를 담당해 주셨듯이 때로는 내 자존심이 도려내어 지는 듯한, 내 양심이 도려내어 지는 듯한 아픔이 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것이 천국의 용서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IV-3. 죄인의 얼굴은 나의 자화상

천국에서의 용서는 너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움켜쥐었을 때에 땅바닥에 엎드려 "친구 한번만 용서해 주게나. 조금만 말미를 주면 반드시 갚을 것이네." 쩔쩔 매고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바로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왕 앞에서 당황하고 쩔쩔매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엎드려 있던 자기 얼굴 자화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워주는 시간입니다. 

내가 걸핏하면 남을 비판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작 나를 비판하면 그것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비판하면 그때는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회개의 열매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감사의 열매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은혜를 덧입었는가에 대한 열매! 그것이 용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IV-4. 일만 달란트

네 번째 천국의 용서 윤리가 있습니다. 내가 가장 큰 은혜를 입었다는 감사입니다. 내가 누구보다도 큰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입니다. 내가 누구보다도 놀라운 자비를 덧입었다는 감사! 그것이 바로 본문의 용서입니다. 

이것을 비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퍽 재미있는 비교를 했습니다. 금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장정이 하루동안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만 달란트는 1억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억 데나리온은 일꾼 1천명이 274년을 벌어서 한푼도 안쓰고 모으면 1만 달란트가 됩니다. 

나라의 세금으로 계산해 보면, 그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임금이 거두어 들이는 세금이 약 600달란트 정도 됩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에서 임금이 거두어 들이는 세금이 200달란트 정도 됩니다. 유대땅 전역에서 거두어 들인 1년 세금이 800달란트 정도 됩니다. 1만 달란트면 유대땅에서 임금이 분봉왕들이 다 거두어 들인 세금이 12년 내지 13년을 모으면 1만 달란트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종은 보통 종이 아니라 나라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왕을 얘기합니다. 신분의 과장입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는 것은 과장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그런 빚을 지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과장법입니다.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섬기고 아버지의 나라로 만들어 가야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마귀의 땅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죄 값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이냐?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권력자도 어떤 돈을 가진 자도, 어떤 지혜있는 자도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는 수준이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 모든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습니다. 내가 용서받은 그 용서의 덩어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 그 덩어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용서의 신비는 우리의 지혜로 능히 깨달을 수 없는 어마어마 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금 1만 달란트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마어마한 은혜를 덧입었는데 억울하다고요 아프다고요 분통이 터진다구요. 하나님께서 네가 받은 죄의 덩어리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IV-5. 그러면 너도 갚아라

이제 천국의 용서 윤리의 마지막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용서받고 나가다가 자기한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왕이 그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러면 너도 갚아라" 내가 이미 너에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네가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줄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너도 내게 갚아라. 내가 너에게 탕감해 준 것은 네가 다른 사람들을 탕감해 준다는 조건을 붙여서 탕감해 준 것은 아니다.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준 것은 네가 앞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는 조건을 붙여서 네 죄를 용서해 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건을 걸어서 비판이 된다면 조건을 걸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탕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조건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왜 몰랐더냐? 용서가 저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왜 몰랐더냐? 무조건적인 용서가 조건적인 저주로 바뀌어 지게 된다는 놀라운 지혜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V. 천국 심판대 앞에서

오늘 비유는 천국 심판 비유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24절 "결산할 때에" 결산이란 단어는 마태가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마태가 "결산"이란 단어를 쓸 때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연상하고 언제나 사용하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큰 사역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어마어마한 봉사의 흔적을 안고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했던 놀라운 열매들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았다. 나의 모든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았다. 이 확신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게 아픔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내게 부담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내게 손해를 끼쳤던 모든 사람을 나는 용서했다. 하나님 앞에 용서의 흔적, 용서의 선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게 건강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이 시간 말씀합니다. "아니다. 네게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네게 치료하는 능력이 되어 줄 것이다." "하나님, 내게 친구가 필요해요." "아니다. 진정 네게 필요한 것은 현재있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 친구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발이 없다면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맹인 소경에게 안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돈을 벌면 악한 영향을 남길 뿐입니다.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친구를 얻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할 때에 군말을 붙이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을 도무지 용서할 마음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니 용서합니다." 군말붙이면 용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유와 변명을 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족을 붙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용서할 때에 조건을 붙이지 마십시오. 

용서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다음 부활주일부터 "용서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설교끝난 다음 집에 가서 분위기 잡고 촛불 켜놓고 앉아서 손 마주 잡고 "용서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용서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해야 합니다. Now and here!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광부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한 아이가 가슴을 푹 쥐어박습니다. 교실에 앉으면 한 아이가 등을 확 쥐어박습니다. 또 돌아오는 길이나 만날 때마다 가슴을 푹푹 쥐어박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그래서 온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옷을 벗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누구든지 나를 치면 이 다이나마이트 터진다. 그리고 너 죽고 나 죽자."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도 겁이 나서 그 아이 곁에 가질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아이 주변에는 아무도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친구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작 불안하고 공포에 시달려야 했던 사람은 이 아이였습니다. 

미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이나마이트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은혜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불가능해 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막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집니다. 믿음이 떠나갑니다. 손해 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혼도 쇠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마귀에게 맡겨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사이가 멀어져만 가는 것입니다. 상처에 묶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유없이 가끔 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대게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손과 발이 마비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병이 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세포가 꾸준히 생성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 갈등의 문제,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경통, 위궤양, 밥만 먹으면 이유없이 설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든가요? 이 시간 "용서하라"고 말씀할 때에 여러분에게 떠오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원수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까? 아니예요. 

저는 제 마음속에 용서의 설교를 준비하며 "하나님 아버지, 이 설교가 내 입술의 설교가 아니라 내 삶의 설교가 되게 하시고, 내 인격의 설교가 되게 하시며, 내 신앙고백이 되게하여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두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① 나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인가? "아멘" 한 후에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② 내 마음속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누구인가? 정말 내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 설교를 하는 것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시인 에무센의 글 한 토막을 읽으므로 오늘 설교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기 한 마리 잡겠다고 온 집을 태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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