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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대변인 (마 27: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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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대변인 (마 27:38~44)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에는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우선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대못을 맨 양손바닥에 박고, 발등에도 포개서 박았습니다. 발등에는 몸무게가 쏠리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듯 당기는 극심한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팔에 힘을 주어 매달리면 발등에 쏠린 고통은 일시적으로 가십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양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옮겨집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는 내내 번갈아 발을 움츠리고 팔을 움츠리면서 고통을 겪습니다. 이 고통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으리만치 컸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워 놓았기 때문에 찌르는 고통이 따랐습니다. 채찍을 맞아 망신창이가 된 등의 상처는 쓸리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고통은 부끄러움입니다. 십자가에 매달 때에는 발가벗깁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 높은 곳에 매달리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심한 모멸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세 번째 고통은 조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반대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꼼짝 못하는 십자가에 달리자 왕성하게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기 전까지는 함부로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워낙 신비로운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에 상황이 바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관원과 군병이 놀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경하던 관원들이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군병들도 비웃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마태복음 본문에는 지나가던 자들의 조롱이 나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했습니다. 42절부터 보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43절에 이어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예수님을 조롱한 이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처형장에는 예수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강도 두 명이 함께 매달렸습니다. 이 강도 두 명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누가복음에 이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강도 중 하나도 비방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할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확하게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남을 구원하시는 분, 하나님을 신뢰하는 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으시는 분.

이들이 말하는 조롱 속에 온갖 정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들 모두 예수님에게 똑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양손과 발에 커다란 쇠못을 박아 놓았기 때문에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왜 이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도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각종 기적을 놓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나운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이를 살렸습니다.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 넘게 먹고 남겼습니다. 물위를 걸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먹으면 자연 현상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마귀도 벌벌 떨었습니다. 아주 지혜로워서 언변이 뛰어나십니다. 권세가 있으시고, 법과 제도보다도 위에 계십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항상 자신감이 넘쳐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고 인기 최고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은 이제까지 그들이 보아오던 사실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일도 능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들이 왜 이런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을 수 없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믿고 싶었습니다. 믿으려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해코지를 한 것은 결정적일 때 믿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결정적인 고백을 합니다. 42절 마지막에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믿을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진짜 기적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려면 기적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조심스러웠지만 예수님은 기적을 나타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필요한 현장에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에는 언제나 믿음이 따랐습니다. 믿는 자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날 때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이 기적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보여준다면 과연 이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음의 형틀 십자가도 예수님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불사신입니다. 사람이 아니고 신이십니다.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된다면 산헤드린도,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도 종교적인 문제로 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문제로 논쟁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조건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조금 전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말은 전에 어디서 듣던 말입니다. 그것은 공생애 처음에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중에 두 번째 시험이 뛰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시험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사람들 눈에 기이하게 보입니다. 마술과 같은 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씀이나 은혜 받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 쇼를 구경하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기적을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인기는 구세주로서가 아니라 뛰어난 마술사로 얻는 것이 됩니다. 대중의 인기에 취하면 그 사역자는 타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허다한 은사자들이 자기 영광의 시험에 빠졌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후 점쟁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요청을 받아 들였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십자가에서 조롱하던 모든 자들이 일순간 엎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행한 무례함 때문에 봉변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하면서 엎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 모든 족속들까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올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위대한 메시야를 영접하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만 하셨다면, 3 년 동안 전도해서 얻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전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에 수백 명 수천 명을 전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 기회를 쓰지 않으셨을까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사실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제물 되시는 자리입니다. 지상 최대의 쇼를 보여줬다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믿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은 것은 십자가에서 못 박혔던 자가 차력이나 마술 같은 능력을 발휘해서 못을 빼고 멀쩡히 살아났다는 현상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모두 구경꾼들입니다. 묘기 대행진이나 스타킹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출연해달라고 섭외가 올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다는 말은 믿음의 고백이 아닙니다. 믿을 가능성을 보인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이 말은 사단의 유혹입니다. 3 년 전에 성전 꼭대기에서 속삭이던 바로 그 마귀가 십자가 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로 또 속삭인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구동성으로 외친 관원들이나 지나가는 자들이나, 군병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장로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고통 가운데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예수님과 같이 곁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가 예수님을 대변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까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 반대편에 매달린 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는 모릅니다. 사람들은 오른쪽이라고 하던데 근거가 없습니다. 오른쪽 왼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한 사람은 믿음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조롱했던 자는 예수님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말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조롱이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앞둔 자로 구원이 가장 절박한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맞다면 자기 스스로와 우리까지 함께 구원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전부 예수님을 조롱하는 분위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조롱으로 들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반대편 강도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사람도 지금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을 받으면서 원망이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벌을 받을 분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비록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백한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유일한 변호인은 빌라도의 아내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외롭게 조롱을 견디고 계실 때 주님을 대변해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한 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이 얼마나 큰 힘을 얻으셨을까요?
그는 염치없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끝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구원을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롱하는 자들에게 일절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청하는 소리에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능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평생 나쁜 짓만 하고 살다가 십자가 형장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 구원을 청했더니 허락받았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구원의 소망을 품은 자들이 많습니다. 반면 약 오르고 실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평생 나쁜 짓도 안 하고 착하게 살면서 교회 다니고 믿음 생활 열심히 했는데, 누군 막판에 한 마디만 하고 똑같이 구원받는다니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평생 착하게 산 이들이 유감스럽게 여길 수 있지만 막판에 예수님 믿어도 구원받습니다. 공력을 따지고 싶은 사람들이 서운해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착하고 살고 악하게 산 것과 상관없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따져보면 이게 하나님의 불공평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가장 연약한 자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 기준이 조금 더 높게 잡혔다면 어찌 될까요? 여기 있는 우리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수히 많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입니다.

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구원 사건은 복음을 정말 복음 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도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구원 받으려면 적어도 죽기 한 달 전에는 믿어야 한다. 최소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 논쟁하다가, 죽기 전이라도 회개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의 주장이 눌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이 사람은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입니다. 죽는 순간에라도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약아빠진 사람들은 함부로 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믿을란다고 합니다. 정말 밉상 맞고 얄미운 생각입니다. 죽는 시간에 맞춰 믿음 고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언을 남기고 정리할 것 다하고 죽는 것은 복입니다. 그렇게 죽지 못하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인생을 얕잡아 보지 마십시오. 믿음은 준비하는 것입니다. 막판에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와 구원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과 착한 행실은 하나님 나라에서 따로 계산이 될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계획하지 말고 영광스런 구원을 예비하십시다.

복음은 임종을 앞둔 이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평생 예수님 믿지 않고 핍박을 하던 사람도 죽을 때 뉘우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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