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천국에서 큰 자 (마 18:1~6)

  • 잡초 잡초
  • 249
  • 0

첨부 1


천국에서 큰 자 (마 18:1~6)

중세 때 이야기. 한 성당에서 찬양대원들이 열심히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 한 어린이가 지휘자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니?” 
지휘자가 물었습니다. 
“저 찬양대원이 되고 싶어서요.” 
소년의 대답에 지휘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 찬양대는 어른만 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어린이는 받아들일 수 없단다. 너는 안 되겠다. 네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자 이 당돌한 꼬마는 맑은 눈빛으로 지휘자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지휘자님, 그러나 주님께서 저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요.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왔어요.” 

주님께서 쓰신다고 했다는 고백을 들은 지휘자는 감동을 받고 그 어린이를 찬양대원으로 발탁합니다. 그 소년은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찬양도 탁월하게 잘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창작한 역사적인 인물이 됩니다.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입니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은행에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참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은행원들이 모두 서서 근무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은행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고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객을 앉아서 맞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 그들은 앉아서가 아니라 서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행에 있는 손님들의 모습도 우리네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한 줄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번호표를 받아가지고 내 번호가 불릴 때까지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은 오는 순서대로 줄을 섭니다. 그리고는 한 창구가 비면 차례대로 그 빈 창구로 가서 일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줄서기는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변함없이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줄서기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는 우리도 어느 곳이든 줄서기가 많이 질서를 잡아가고 있지만 이런 질서와는 상관없는 경쟁적인 줄서기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누가 더 큰 자냐 하는 줄서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할 것과 다시 살아날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관심은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일까 하는 것으로 옮겨갑니다. 그래 제자들이 묻습니다. 이때 주님은 누가 천국에서 큰 자냐 하는 것을 말하기에 앞서서 누가 과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부르시더니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선생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어리둥절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이미 나이가 많아 어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태 안에 다시 들어가 두 번씩이나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시면서 유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사도행전에서도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이 말씀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곧 어린아이처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모를 조릅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다가도 이윽고는 아이들에게 다음에 해 준다는 약속을 하죠.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부모가 그것을 해 줄 때까지 계속해서 졸라댑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그 아이가 해 달라는 것을 해 줄 수밖에 없게 되죠. 그것은 갓난아이 때부터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배가 고프다고 하면 사정없이 울어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젖을 물리게 되죠. 그러니까 아이는 울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부모가 다 해 줄 줄로 아이들은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전혀 부모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부모의 사정까지 헤아린다고 하면 그건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줄 수 없는 경우도 흔히 있지만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그런다고 해서 이루어질까 하고 저울질을 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아이는 부모를 조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해 주겠다고 하면 약속하고 새끼손가락을 겁니다. 그리고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냥 지나가면 아이는 그 약속한 것을 들이대면서 해달라고 보챕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부모가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곧 부모가 한 약속대로 지켜줄 것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 역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우리의 가족이나 친지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고 이 믿음을 가지고 그 날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나라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하나님 앞에 날마다 간구함으로 우리의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귀한 삶이 날마다 이어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가 누구입니까? 

이왕이면 높은 자가 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저 밑바닥 인생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무론 지금 내 형편이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만은 남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고 더욱 자녀들에게 공부 공부하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우리는 어땠습니까? 우리는 어릴 적에 학창 시절에 정말 후회 없도록 공부에 전념했던가요? 아닐 겁니다. 

우리들 역시도 예전에는 공부하라는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로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에게 그토록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내 자식만은 그래도 나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내 자식들만은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에 그토록 자녀들의 공부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언서에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누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닌데도 자기를 낮출 줄 압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의 말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자식을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다르기는 해도 그래도 자식들은 부모를 따릅니다.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어린아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대들 때도 있겠죠. 버틸 때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에는 부모 앞에 고개를 숙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국물이라도 있는 것을 어린아이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것은 곧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느 잔치 집에 초청이라도 받아서 간다고 할 때 저 끝자리에 앉도록 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 자리가 어디쯤이 될 것인가는 초청한 사람이 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리지 않고 함께 앉도록 동그랗게 자리 배치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문에 가까운 자리가 보통은 낮은 자리로 생각들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잘 생각해서 먼저 자리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청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이왕이면 이리 올라앉으시지요 한다면 그것이 누가 보더라도 더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춘다고 하는 것의 또 다른 뜻은 앞에서 이끄는 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을 따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고자 한다면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불평불만이란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것도 내 뜻을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일점일획이라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절대 복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투덜투덜하고 있다면 과연 그런 자를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힐 수가 있겠습니까? 가장 높은 자리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라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말도 잘 안 듣는 사람을 누구라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둘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거리나 하면서 나 못해 하는 사람을 과연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힐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와 같은 어린아이를 환영하는 사람은 나를 환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환영한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를 그만큼 보살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귀찮다고만 하겠습니까? 아니죠, 환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잘 돌보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무슨 보답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그냥 끝없이 퍼부어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무어 보상을 바라지 말고 보잘것없는 사람 때로는 귀찮기만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을 끝까지 살펴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속상할 때도 있겠죠. 울고불고 매달리며 생떼나 부리게 되면 그것처럼 곤란할 때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고 살펴주어야 합니다. 왜요? 그래야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란 이 땅에서도 그만큼 상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욱 복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아이처럼 낮춘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뜻으로는 섬긴다는 것입니다. 영접한다고 하는 것 역시 섬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더욱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자요 끝까지 베풀어주며 도움의 손길을 펼침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도로시 르 놀드라는 시인이 쓴 “사는 것을 배우는 아이들”이라는 시입니다. 

어린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어린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한 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린아이라고 해서 무시해도 좋은 존재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를 믿는 어린아이란 곧 하늘나라 백성이 아닙니까?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아서 잠시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어린아이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르치고 이끌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닌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만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기 되도록 가르칠 때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온전히 세워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또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주님만을 믿고 바라보며 주님께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구하되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섬겨나가며 오직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한 명이라도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