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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바람직한 자녀 교육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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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자녀 교육 (엡 6:4)

   일제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억압과 천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인격적인 대우를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런 현상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그는 어린이들에게 존대말 쓰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장래는 다음 세대를 존중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어리신 이라는 뜻의 “어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1921년의 일이었고 그 다음 해인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 날을 제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1923년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1일에 아동 문화 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했습니다. 해방 후 국회는 1956년에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공휴일로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의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늘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암송할 뿐 아니라 그것을 써서 손목에 매기도 하고 미간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도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교육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과외 공부를 시키지 않습니까? 과목도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영어, 피아노, 미술, 웅변, 컴퓨터, 태권도 등을 가르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인은 자녀들과 함께 외국에 나가 있습니다. 소위 기러기 아빠들은 혼자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부가 헤어져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지만 우리는 아직 노벨상 근처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어려서부터 성경 말씀을 가르친 유대인들은 단골로 노벨상을 수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어떤 목사님이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길을 가다가 동네 찐빵 집에 들러서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찐빵을 만들어 파는 것이 몹시 고되지만 그래도 아이들 교육 시킬 정도의 벌이는 된다고 했습니다. 궁금해서 그분에게 사교육비가 얼마나 들어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아이를 위해서 월 120만원 정도 지출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쓰느냐고 물었더니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특목고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목사님은 섬뜩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가게 주인은 아이들이 특목고에 들어가는 것에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 아이들의 그 후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학부모들이 그 찐빵 가게 주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 자녀들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목표가 좀 올라가서 미국의 유명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꿈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유명 대학에 많은 한국 학생들이 입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도 탈락하는 학생들도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도 탈락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명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학교라는 것은 삶의 한 단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서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다면 먼저 자녀들의 인생 전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이 앞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의 상급 학교 진학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별로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만 하면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엉뚱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학교란 삶의 한 과정이요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나 단계를 잘 밟아야 합니다.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인생 전체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녀 교육도 중요하지만 바람직한 자녀 교육 이전에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할 것을 성경은 부모에게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공동 번역 성서는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자녀들을 잘 가르치는 것, 즉 바람직한 자녀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잘 기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을 기르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자녀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것이 바로 함부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화가 날지라도 자녀들에게 결코 해서는 아니 될 말이 있습니다. “너 같은 애는 정말로 구제 불능이야!” “이 바보 같은 자식아! 이것도 모르니?” “넌 그것 밖에 못하니?”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니?”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넌 누굴 닮아서 그러니?”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는 말했습니다. “찢어진 옷은 쉽게 수선할 수 있어도 폭언으로 상처받은 어린 가슴은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 가운데 말로 하는 것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먼저 지나치게 자녀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 하지 마!” “T.V. 보지 마!” “컴퓨터 게임 하지 마!” “그런 친구랑 놀지 마!” 자녀들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은 자녀들의 성장을 막을 뿐 아니라 자녀들을 반항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결국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통제가 너무 없는 것도 자녀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자녀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놔 두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하도록 놔 두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자녀들 앞에서 일관성 없는 삶을 사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부모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부모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삶을 살면서 자녀들에게만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가 자녀들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마침내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까? 부모는 자녀들을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극히 제한적인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 유행이나 풍조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잘 길러야 합니다. 양육한다는 것은 귀한 생명을 기르는 일이기 때문에 시행착오 같은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들을 보면 하나 같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아들입니다. 그 방송을 보고 있으면 그 아이들의 부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런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러나 그 방송을 끝까지 보면 그 아이들의 문제가 부모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꽃밭과 아이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잘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아 주고 잘 돌봐 줘야 아름다운 꽃밭이 됩니다. 아이들도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봐 줘야 합니다. 아이들이 문제아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가 제대로 돌봐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자녀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 주님의 정신으로 교훈하고 훈계할 것을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마태복음 19장 14절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천국의 주인으로 존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정신으로 무엇을 교훈하고 훈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일찍이 시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값진 교훈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르침으로 자녀들로 하여금 바른 길로 행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자녀 교육을 잘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습니까? 공부나 시험 때문에 교회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녀들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아울러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심정으로 자녀들을 잘 길러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자녀들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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