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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크냐? (막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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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막 10:32~45)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 만나면, 
나이를 따지고, 족보를 따지고 기수 따져서 위아래 구분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집안의 항렬자를 외우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친구 아무개가 무슨 항렬이니 나는 당신에게 할아버지벌이 되는 셈이다.’
‘우리 집안의 아무개가 이 항렬이니, 당신은 내게  조카뻘이 된다.’ 라는 식입니다. 
학교학번이나 군대기수를 따지는 것도 일상적인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보는 수평사회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는 모든 것을 서열화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런 우리사회는 수직사회인 셈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나이, 재산, 지위, 학벌, 직책, 계급이 조금만 나아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다분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힘을 추구합니다. 
남보다 강해지고, 남을 지배하려는 야망이 강합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야비한 방법을 써서라도 남을 이기려 합니다. 

지난번 정당에서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마이너스 전략’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상대방을 비방하여 깎아내리는 전략입니다. 
상대방을 낮춰버리면 자기는 상대적으로 높아진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상대도 마이너스 전략을 사용하여 비방하고 깎아내리니 
       결국은 모두 낮아지고 맙니다. 
이런 정도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경영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나라를 맡겼다가는 
    현상유지는 고사하고 마이너스성장을 이룰 것이 뻔합니다. 

유대인들도 차별이 심한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직업으로도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냄새가 나거나 소음을 일으키는 직업은 천한 직업으로 여겼습니다. 
     어부나 목수가 그런 직업이었습니다. 

로마에 협력하는 세무공무원은 죄인으로 간주되어 천대받았습니다. 
그러니 사캐오의 집에 예수님이 유하시는 것을 보고 수근 그렸습니다.
거주 지역으로도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요1:46절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7:41절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신분이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출신 어부들이었고, 세리출신, 열심당 자객출신도 있었습니다. 
어디 가서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제자들도 자기들 간에 누가 더 높으냐면서 다퉜습니다. 
      지위다툼이요, 주도권싸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예고하신 내용과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누가 크냐며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해지고자 하는 이기적 욕망을 노출시키는 제자들에게       
섬김과 겸손의 도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속에서 
       겸손과 섬김의 도를 따라가는 교우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자신들의 욕망을 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1. 야고보와 요한이 어떤 상황 가운데서 자신들의 욕망을 구하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32-35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어져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며
     예수님 십자가의 죽으심  즉 수난의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이 수난의 예고 처음이 아니고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마16:13절 이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아울러 
         십자가의 죽음을 말했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는 책망을 당했지요.

두 번째는 본문 앞에 막9:30절 이하에 보면 
        이때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변화산상의 신비체험 이후입니다.
       눅9:32절에 졸다가 깨어나 신비한 광경을 보았는데
       주여 초막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야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고 합니다.
       그러니 자다가 일어나 헛소리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산 아래에 내려와 
      제자들이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두고 어찌할 줄 몰라 할 때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책망하시며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는
      막9:29절 [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를 지날 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의 수난의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건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뒤에 따라오면서 쑥덕거리는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하는 것이 무엇인냐? ] 물으니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데 실은 누가 크냐 하고 쟁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은 세 번째 예수님의 수난의 예고입니다.
32절 보면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가시는데
           그들은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 고 합니다.
그러니 분위기로 봐서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엄숙함과 단호함의 분위기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능욕과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큰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 때 한 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합니다.
         즉 영적으로 민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 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엇갈린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흔한 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 모여서 기도를 드리지만, 
정작 우리가 청하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목숨을 바치는데, 사람들은 주님 덕에 군림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상 앞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정작 속으로는 엄청난 이기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현실이 
      이 말씀 속의 제자들과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한 마음입니까? 
    아니면 제자들과 한 마음입니까? 

지금 야고보 요한이 주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 야고보 요한이 주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주님께 기대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36-37절)

35절에 [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교회가 지향하고 교회가 나타내야 할 것은 바로 예수 십자가입니다.
       즉 십자가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런데 야보고 요한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관심은 
      바로 자신들의 야망의 성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할 때 37절에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즉 예수님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혁명 정부를 세우시면
   장관 자리 하나 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함께 고난 받는 것에 있지 않고 
        높아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혹 이런 모습이 우리 모습이 아닌지
   능력은 없으면서 높은 자리는 가고 싶고, 가진 것도 없으면서 뽐내고 싶고
       자랑 할 것도 없으면서 나팔만 불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욕망을 가진 다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욕망은 
       세속적 욕망이 아니라 거룩한 야망 즉 하나님의 비전인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낮은 땅에 살고
     섬김으로 위대하게 되신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야망으로 불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에 힘쓰지 않고 
     세속의 가치를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사회에서 살고 있으므로 
경제적인 소유나 지위에 따른 권력과 명예, 학벌에 의한 자기과시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거룩한 삶보다는 
    세속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쪽을 선택합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대로 좁은문으로 들어가고 좁은길로 가기보다는 
       넓은문으로 들어가고 넓은길로 가는 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누가 크냐?’를 놓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다른 길을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서는 직분이 계급처럼 변질했고, 
    중직자는 다른 교인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변질된 모습으로 살면, 그날에 주님께서 외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누가 크냐?’를 따질 일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섬기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는 심고, 뿌리고, 
     그날 거기에는 거두는 지혜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에 대해 주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3. 야고보 요한의 간청에 주님의 답은 무엇이라 말하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38-40절)

38절 [ 너희가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진심인지 모를 확신에 찬 대답으로 응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39-40절에
[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 
[ 내 좌우편에 앉는 것으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좌우편에 앉으려거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어야 한다.
내 좌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똑같이 마시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자리는 하나님이 예정하신다.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성찬식 때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그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잔을 마시는 것처럼
        [ 할 수 있나이다 ] 라고 장담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피땀 흘려 기도했지만 잠만 잤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실 때 때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의미를 깨닫고 
결국 야고보는 그 잔을 마시고 순교했고, 
요한도 심한 핍박의 잔을 받아 마셨던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책「이 잔을 들겠느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그분은 나의 사제직과, 
       인간으로서 내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수년 전 내가 손에 아름다운 성찬의 잔을 들었을 때 
     즉 성직자로서 임직을 받을 때
     그 질문에 내가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온갖 생각과 이상으로 가득 찬 새로 서품된 신부이었고, 
          삶은 온갖 약속으로 풍요롭게 보였다. 
    나는 그 잔을 너무나 마시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서 오늘, 장애를 지닌 이들과, 
그들의 도우미들이 둘러앉은 초라한 식탁에 앉아서 
       그들에게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돌리면서 
       똑같은 그 질문은 나에게 영적인 도전으로 다가온다. 
‘나는, 예수가 마셨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나는 그 순간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같이 너무나 쉽게 십자가 지고 주님 따르겠다고 하지만
정작 눈앞에 있는 섬김의 십자가는 외면하는 신앙생활이 아닌지
나의 잔을 마시고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는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높은 자리를 청하는 것을 보고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 말씀하십니다.


4. 큰 자가 되기 위한 삶의 자세 중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42-44절)

42-44절 의역한다면 
[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 
세상 사람들은 큰 자가 되어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거나,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섬김과 종이 되어야만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섬김과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43절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 
세상은 그래도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상대방을 누르는 것이 크고 으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 결국은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항복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내가 섬기고 심지어 종이 되어줄 때 
        진정한 승리와 행복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나라의 법칙입니다. 

사실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은 
다른 제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 바로 섬기는 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새들백교회에 출석하는 한 성도의 간증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의 주변에서 미용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불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성도들이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중학생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병원에서 항암치료로 머리를 다 빠졌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그를 데리고 교회에 갈려고 하니까 
         머리 때문에 주저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 모두가 머리를 깎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미용실 주인은 감동하게 되어 그 교회에 출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송국에 연락을 해서 여자 아이가 
       부모님 따라 교회에 오는 것을 몰래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조심스럽게 교회의 문을 열었는데 
교인들의 머리를 보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대머리인 것을 보고 놀랐고, 
자신도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었다고 합니다. 
이 방송을 담당한 아나운서는 마지막 멘트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직 크리스찬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교회에 나올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선택할 때 
       반드시 이런 교회를 택할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교회와 성도의 존재이유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45절) 

45절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그 가치 기준이 전혀 다릅니다.
      아니 다를 뿐만 아니라 전혀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 나라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입니다. 
세상 나라는 권력과 부를 빼앗고 차지하고 지배하고 
     다른 사람을 종으로 부려먹는 사람이 귀중하고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대접하고 나누어주고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이 귀중하고 높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몸소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우리 주님보다 존귀하고 높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추구해야할 목표를 제시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여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섬기는 삶과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칠 수 없는 
      우리 주님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절대적인 낮아지심과 섬김과 순종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목적과 결과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고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열심히 부지런히 일했더니 
          결과 부자가 되면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목적과 결과는 많은 영역에서 혼동되고 있습니다. 
부를 목적으로 삼고 권력과 명예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건전한 가치는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결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답게 산 결과로 주어진 것이 가치 있게 쓰입니다.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지난 2월 25일 대통령 인수위원장직에 임명됐습니다.
여성 인수위원장이 나온 것은 1998년 인수위원회가 생긴 이후 처음입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첫 공직 임명자로서 그를 선택한 이유는 
이 당선자가 ‘실적’을 중시 여길 뿐만 아니라 
이 총장의 ‘섬김의 리더십’이 
   이명박 당선자의 리더십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총장은 교수직선 선거에서 네 번이나 총장에 선출될 정도로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는 분입니다. 
지난 1995년 취임 당시 밀려 있던 수억 원의 부채는 
      2006년까지 1천억 원 이상의 기금을 모아 청산했고, 
6천여 평에 불과했던 캠퍼스를 2만 5천여 평 규모로 늘렸습니다.

그는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서울 소망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이 총장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 부딪힐 때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의 표현대로 ‘두 손 두 발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면 
     기가 막힌 방법으로 더 멋지게 이뤄주신다는 것이 그의 신앙입니다.

이 총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예수’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섬김의 리더십을 최고의 리더십으로 꼽으며
섬김의 리더십에 대해 
“이 리더십은 실천하기 굉장히 힘들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에     
최고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총장의 리더십은 숙명여대 총학생회의 등록금 동결 투쟁을 
  대학발전기금 모금 운동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섬김은 한자어도 외래어도 아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우리사회가 인식하고 있는 섬김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낮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섬김이라고 인식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섬김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섬김이라는 것은 그 반대 개념입니다. 
지도자이기 때문에 섬기고 
구세주이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박히는 것이 섬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목적 섬김과 희생이
          내일 교회와 나의 삶의 존재이유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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